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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한국판 밸런타인데이

세상을 여는 잡학

며칠 전, 설 연휴 끝자락 날이 2월 14일로 서양 정인절(情人節) 밸런타인데이였다. 늘 그렇듯이 많은 초콜릿이 사랑 표현으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또 그 한 달 후인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라 하여 헤아릴 수 없는 사탕들이 여인네들 입속에서 녹아 없어질 것이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가 초콜릿 사탕 판촉을 위한 상술로 생겨났음을 알면서도 가슴 뛰는 애정 표현을 대놓고 할 수 있다는 것에 젊은 청춘들은 해만 바뀌었다 싶으면 손꼽아 기다리곤 한다.                                           


밸런타인 사제. 사진 위키백과

      

3세기 무렵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북쪽 땅 고트족 정벌에 필요한 군대를 갖추기 위해 징집대상인 젊은 사내들에게 금혼령을 내렸다. 이에 반기를 들어 청춘남녀들의 애정전선을 사수하려 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밸런타인(이탈리아명 발렌티누스) 사제였고, 황제는 그런 밸런타인을 끝내 처형하고 만다. 그가 처형된 날이 곧 서기 269년 2월 14일이다. 그 후 청춘남녀들은 이날을 밸런타인데이라 이름 짓고 밸런타인을 추모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인절로 삼았다. 로마 제국 이전에 존재했던 아이네아스 왕국에서는 이미 정인절을 즐기고 있었다. 루페르키라는 사제들이 여는 루페르칼리아(Lupercalia) 축제가 그 주인공이다. 루페르키는 라틴어 루푸스(Lupus)로 늑대와 연관되는 말이면서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도 연관된다. 로마는 로물루스의 땅이라는 뜻이고. 전쟁 신 마르스와 여사제 간 있으면 안 될 사랑에 의해 사생아로 태어난 로물루스는 아이네아스 왕 아물리우스에 의해 쌍둥이 동생 레무스와 함께 티베르 강가에 버려진다. 이때 목 좀 축이자고 강가에 나타난 늑대가 두 아이를 거두어 자기 젖을 먹여가며 엄친아로 키워냈다는 신화가 축제 발생에의 요인이 되고 있고, 한편으로는 늑대로부터 양 떼를 지켜주는 원시 신을 기리는 내용과 다산을 기원하는 내용도 축제에 포함된다고 한다.

이 축제에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가동된다. 젊은 여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표를 큰 항아리에 넣으면 젊은 남자들이 그중 하나를 골라내어 커플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맺어진 커플들이 사랑에 빠지면 마침내 결혼에까지 이르고. 그러니까 밸런타인데이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 청춘남녀들은 정인절을 즐기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루페르칼리아가 치러지는 날인 2월 15일은 훗날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자연스레 흡수되면서 본격적인 서양 정인절이 출범하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밸런타인데이에 연애편지를 보냈고, 18세기 중엽까지는 친구 간이나 연인 간 연정을 표시하는 작은 선물이나 편지를 주고받았다. 18세기 말에는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카드를 주고받았다. 여기서 어떤 현상 하나가 두드러진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는 것. 그래서 오늘날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여자들이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초콜릿을 남자 손에 쥐여주는 것으로 그 유풍을 전승하고 있음이다.

초콜릿 선물은 19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생겨났다. 20세기 들어서서 이것을 베낀 나라가 일본이다. 1936년 모로조프라는 제과업체가 밸런타인 초콜릿을 만들어 크게 광고했고 1960년 모리나가라는 제과업체가 아예 밸런타인데이는 여자들이 초콜릿으로 남자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대못 박는 캠페인을 벌였다. 결국 우리가 즐기는 밸런타인데이는 일본풍 밸런타인데이인 것인데, 요즘 젊은이들이야 일본풍이든 뭐든 무슨 상관이냐, 재미만 있으면 되지, 식인 듯하다.

화이트데이는 순 일본산이다.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 매출로 재미 보니까 이번에는 초콜릿 받은 남자가 한 달 후인 화이트데이에 맞춰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날, 이렇게 구도를 짰다. 그리고는 ‘전국사탕과자공업협동조합’이라는 단체가 1978년 총회를 열더니 매년 3월 14일을 화이트데이로 정하고는 1980년 3월 14일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원래 화이트데이라는 명칭은 영어권에서는 ‘운 좋은 날’이라는 뜻으로 쓰는 것을 일본 상인들이 억지 발상 식으로 밸런타인데이에 응대하여 쓴 것이다.     

왜 우리는 밸런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나아가서는 크리스마스니 핼러윈이니 하는 애정 표현용 외래 풍속 명절에 환호하는 것일까? 그에 걸맞을 마땅한 우리네 전래 풍속이나 명절이 없으니까 그런 것이다.

이 말에 대뜸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석을 댈 것이겠으나 미안하지만 칠석은 정인절과는 일체 관련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음력 7월 7일, 즉 칠석이 되면 밤하늘 중천에 밝은 별 하나가 뜬다. 직녀별이다. 이때가 시기적으로는 입추 일주일 정도 후인만큼 여름 지나고 가을 초입 무렵이다. 가을부터는 겨울 걱정하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챙겨야 했기에 남정네들은 추수에 나서고 여인네들은 길쌈을 시작한다. 여인네들은 추워지는 날에 쫓기며 밤늦도록까지 길쌈을 해야 했다. 그 밤중에 뻣뻣해진 목 좀 펴느라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하나가 유난히 빛나는지라 그 별에 저네들의 애틋한 정서를 붙여보자고 길쌈하는 여인, 직녀라는 이름을 갖다 붙였다.

이 직녀별이 중천에서 밤하늘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을 즈음 직녀별 맞은편 은하수 건너 동남쪽 하늘에도 밝게 빛나는 별 하나가 보인다. 견우별이다. 견우별은 음력 8월 직녀별이 서쪽 하늘로 기울어지는 것에 맞춰 그 자리를 이어받아 중천에 든다.     

옛날 중국의 군주는 연말 섣달이 되면 하늘의 상제에게 올리는 대전(大典) 제사를 거행했다. 제사에 쓰일 희생(犧牲)은 소, 양, 돼지의 어린 것들을 추려내어서는 음력 3월부터 정성껏 키운다. 그러다가 음력 8월 되어 견우별이 밤하늘 중천에 뜨면 희생 짐승들을 본격적으로 살을 찌우도록 해야 했고 그때 보이는 별이라 하여 견우(牽牛. 소를 끌다) 이름을 붙인 것이다(류쭝디, 산동대교수, 2013년).

이 얘기의 핵심은 직녀별과 견우별은 도무지 만나지 못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은커녕 쫓아 오는 견우별을 두고 직녀별은 매정하게 냅다 도망이나 하고 있다. 이렇듯 직녀별과 견우별은 각각 겨울을 준비하는 여인과 남자의 상징으로서 애끓는 연인 관계와는 전혀 상관없음이다. 각자 길쌈하고 짐승들 치느라 정신없는 지경에 사랑 타령이 가할까? 

따라서 칠석을 정인절로 보는 것은 개연성 없는 억측에 불과할 뿐이요, 어쩌다 별 이름들 붙이고 보니 하나는 여인네 이름이요 하나는 남정네 이름이라, 심심풀이 삼아 까마귀 다리 띄워 둘이 만나니 어쩌니, 그저 그런 삼류 로맨스 갖다 붙인 것이다.     

이제 눈여겨볼 것 하나가 눈에 띈다. 청명절(淸明節)이다. 청명은 24절기 중 하나로 해마다 4월 5일 무렵에 든다. 이날은 한식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일 수도 있다. 국가적 명절로 삼은 중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그저 절기 하나 지나가는 정도로 여기지만 이 청명이 의미하는 바가 실로 깊다 하겠다.

청명은 곧 활기찬 새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옛날로 치면 농사 준비를 분주히 시작할 때로, 일 년 중 날씨가 가장 명랑한 때가 바로 청명 즈음이다. 입춘은 여전히 추위를 머금고 있고 우수에는 비 질척거린다. 경칩에는 벌레 난무하니 눈에 띄어 아름다울 리 없다. 드디어 경칩이 지나면 슬슬 남정네들이 기운을 추스르고 연이어 춘분 되면 코끝에 봄 냄새 달라붙고 청명 될 즈음 본격적으로 봄이 완성된다. 여인네들은 살랑살랑 봄바람에 치맛자락 나풀대며 봄놀이 꽃놀이에 마음 싱숭생숭해지고 남정네들은 불끈거리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땅 가는 가래질 소리에 산천이 울린다. 한 마디로 젊은 남녀들 정분나기 좋은 때가 바로 이때다.

그러니 이제는 허황한 견우직녀 얘기는 내려놓고, 중국에서는 성묘에만 집중하는 청명절을 우리식 정인절로 삼아 사랑 축제를 만들어봄은 어떨까? 가뜩이나 후손 증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임에랴.             

  

20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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