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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화성행궁(華城行宮)의 비밀

세상을 여는 잡학

조선의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수원에 화성을 쌓아 제2의 도읍으로 삼는 등 일대 변혁을 추진했다. 그와 함께 사도세자를 부정했던 사대부들에게 보란 듯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소재의 융릉(隆陵)을 찾아가 그곳에 안장되어있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했다. 그의 행행(行幸) 길은 창덕궁을 떠나 노량진을 배다리(舟橋)로 건넌 후 시흥을 거쳐 수원에 도착하는 편도 60km의 멀고 먼 길이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걸었던 그 길은 사대부 권력층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길이었으며 힘없이 수탈만 당하던 백성들에게 온풍을 불어 주기 위한 길이기도 했다.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 정조는 백성들이 잘살고 행복이 넘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런 정조가 수원에 이르러 기거하던 곳이 지금의 수원 화성행궁이다. 화성행궁은 일제 강점기 당시 낙남헌(洛南轩)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강제 파괴되었으나 1980년대 말 수원시 시민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 화성 축성 200주년인 1996년에 공사 첫 삽을 떠서 2003년 완공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화성행궁 중심 건물은 봉수당(奉壽堂) 전각으로 현재 수원화성문화제의 핵심 프로그램인 봉수당 진찬(進饌) 재연행사를 치르는 곳이기도 하다. 1795년 정조는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그녀의 회갑연을 베풀어 드렸다. 필자가 2016년 수원화성문화제 예술감독 직을 맡았을 때 이 행궁을 처음 실물 대면했다. 의아스러웠다. 행궁 규모가 너무 작은 것이다. 마침내 봉수당에 들어섰을 때는 다리 아래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정도로 아연실색하게 되었다. 봉수당 전각 크기야 첫눈에 구분해내지 못했으나 뜰 공간을 보니 너무도 좁았다. 1995년부터 시행되었던 각종 궁중문화 재연행사에 연출자로 참여한 전력상 그동안 툭하면 봤던 것이 의궤(儀軌) <봉수당진찬도>였고, 그것에는 넉넉한 보계(補階) 무대 공간에서 수많은 연희자에 의해 화려한 정재(呈才)가 펼쳐지고 있었거늘 실제 현장에서 보니 그럴 만한 공간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기록문화는 세계 유일의 정확성으로 정평 나 있는 만큼 절대 오류나 과장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궤보다 눈에 확 띌 정도로 훨씬 좁은 이 공간은 어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조여 왔다.

그런 궁금증으로 답답해하고 있자니 봉수당 진찬 재연행사 연출을 맡은 연출가가 싱긋 웃으며 답을 들려주었다. 궁중의례 관련 박사학위를 딴 30년 지기이기도 한 그인지라 헛말 할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들려준 말은 충격적이었다. 화성행궁은 20년 전 복원으로 재탄생할 때 규모가 대폭 줄어들었다는 것. 그 이유는 바로 잣대를 잘못 썼다는 것이었다.


수원화성행궁 봉수당. 사진 최정철


조선 시대 때는 도량형으로 길이는 척(尺) 단위를, 용량은 곡(斛) 단위를, 면적은 결부속파법(結負束把法)을 따랐다. 용량과 면적을 따지는 두 단위를 내려놓고 척 단위를 보자. 조선 초기 무렵의 척 단위는 고려 때 쓰였던 주나라 척도의 주척(周尺. 20.6cm)을 이어받아 썼다. 세종 때 박연이 악기 제조에 쓰자고 만든 황종척(黃鐘尺. 34.48cm)을 척의 기준으로 일반화하려 했으나 길이를 재는 용도로는 여전히 주척이 활용되었다. 

그 이후 용도별로 많은 자가 생겨났다. 포목 재는 데 쓰인 자는 포백척(布帛尺)이요, 제기 제작에 쓰인 자는 예기척(禮器尺)이요, 농사철 시작 기점인 음력 2월 1일 중화절(中和節)에 임금이 재상과 시종에게 상징물로 내려준 중화척(中和尺)이 있었고, 수의를 만들 때는 장척(丈尺)이 쓰였으며, 기녀가 응급용으로 쓴 응급침척(應急針尺)에 길이를 잴 때는 먹물통이 부착된 붓통 자를 썼다. 그리고 건축에 쓰인 자가 있었으니 바로 영조척(營造尺)이다.                                 


영조척.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영조척은 군선이니 하는 규모가 큰 군수물자를 만들 때 쓰는 자였지만 일상에서는 목수들이 집을 지을 때 주로 활용했다. 이 영조척은 시대에 따라 길이가 바뀌었다. 태조 때는 32.21cm이었던 것이 세종 때는 31.22cm, 성종 때는 31.07cm, 일제 강점기 때는 30.30cm였다. 이제 이 많은 자 중에서 주인공들을 추려보면 두 가지가 솎아진다. 주척과 영조척이다. 주척은 영조척에 비하면 대략 30% 정도 작다. 현재 화성행궁의 봉수당 뜰 직선 길이를 재보면 약 25m가 나온다. <봉수당진찬도>를 분석해보면 이 구간이 아무리 짧게 봐도 35m 정도는 충분히 나오니 주척과 영조척의 비율과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원래 행궁이 영조척으로 지어졌으나 훗날 복원할 때 주척을 써서 지은 것 아니냐 하는 의문에 이르게 된다. 척 수치를 그대로 적용했더라면 말이다. 왜 규모가 줄어들었느냐 하는 질문이 공식적으로 대두된다면 당시 복원공사를 총지휘했던 도편수 이 아무개 씨가 나서서 실상을 밝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이런 의문도 들 수 있다. 당시 수원시에서 예산상 문제로 혹은 복원할 터의 공간상 문제로 규모를 줄여 복원하도록 했을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수원시도 대답할 입장이 된다. 어쨌든 간에 지금의 화성행궁은 원래 규모와 비교하면 상당히 축소되어 복원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갈아엎고 새로 다시 하려면 그 많은 예산은 또 어찌 감당할 것인가. 화성행궁의 비밀을 드러냄에 난감만 따른다.


말 나온 김에 다른 아쉬움도 얘기해 보겠다. 화성행궁은 해외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국내 인기 관광코스 중 하나다. 그런 곳에 부끄러운 오류들이 있다. 드라마 ‘대장금’ 주인공의 실물 크기 사진을 입식 간판 형태로 만들어 놓고 관광객들이 기념사진 찍도록 유도한다. 수라간 상궁으로 대활약 펼친 장금의 인기를 20년 가까이 사골국물처럼 우려먹고 있는 것인데, 드라마 대장금은 왜곡 극치의 소산물이다. 상궁들은 조선왕조 내내 왕궁 수라간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수라간에서는 숙수(熟手)라 불린 남정네들이 음식을 만들어내었고 상궁들은 임금에게 바치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장금이 일약 수라간 상궁으로 활약한다는 것이 드라마 내용이었다.

약방기생으로 시작한 내의녀(內醫女) 장금이 당시 임금 중종의 주치의로서 의학적 관점으로 음식들을 추천했던 것이 전부인 것을, 황당하게 요리사 장금으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어쨌든 드라마가 재미있으니 온 세상 사람들이 조선왕조의 수라는 상궁들이 만든 것으로 신봉하면서 일대 대장금 열풍에 휩싸였다. 2016년 수원화성문화제 당시 행궁 안 수라간 공간에서 장금의 흔적일 드라마 사진들을 발견하고는 당장 치우도록 했다. 행궁 좌측 주차장 근처 작은 공터에 세워져 있던 대장금 사진판도 치우라 했고.

봉수당 옆 유여택(維與宅)에 들어서면 여러 개의 뒤주가 행랑에 전시되어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음을 열변하고 있는 장면으로, 그중 하나는 관광객이 직접 들어가 보는 체험용으로 쓰이고 있다. 정조의 의지가 담긴 화성행궁과 끔찍하기만 한 사도세자의 뒤주 속 죽음 간에 무슨 연관성이 있다고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는지, 그 잔인성에 할 말을 잃는다.


행궁 입구 신풍루(新豊樓) 안쪽의 오방기(五方旗)는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음에도 그저 울긋불긋 장식용으로 세워두고 있다. 세워두려면 순서라도 맞춰야 할 것이나 현재는 그조차 맞지 않으니 오방기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정조의 호호부실 인인화락과 효 정신의 상징공간인 수원화성행궁을 100% 왜곡 물인 드라마와 오류투성이로 범벅 색칠하고 있는 현상은 수원시나 수원문화재단의 영혼 빠진 행정의 소치로, 하루빨리 시정되기를 바란다.     


최정철 /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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