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의 옛 이름은 수릿날이다. ‘수리’ ‘수’는 순우리말로 ‘높다’라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수릿날은 높은 날, 즉 ‘신의 날’로 새겨야 한다. 한국인의 단오 행사를 대표하는 것이 강릉단오제다.
강릉단오제는 진행 절차나 내용이 복잡하다. 음력 4월 5일(원래는 음력 3월 20일) 강릉 주민 대표들이 도가(都家)에 모여 제사에 쓰일 술 담그는 신주근양(神酒謹釀)을 시작으로 해서 음력 4월 15일부터 대관령 산신제, 대관령 국사 성황제, 대관령 국사 여 성황신 봉안제, 대관령 국사 남녀 성황신 영신제, 대관령 남녀국사 조전제, 대관령 남녀국사 송신제 등과 함께 단오굿, 영동 전통 민속 연희 즐기기 등을 치르고 음력 5월 7일 소제로써 모든 의식과 놀이를 마친 후 남녀국사 성황신을 대관령으로 봉송하는 것으로 끝낸다.
각종 제의에 쓰일 술을 담그는 신주근양(神酒謹釀). 사진 강릉단오제위원회
강릉단오제의 유구한 역사성은 가히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그 전승 역사를 대략 1천 년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 더 멀리 볼 수도 있다. 즉 고대 동예(東濊)에서 시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수가 쓴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강릉은 부족국가인 동예의 옛 땅으로, 천제를 거행하고 남녀가 모여 술 마시며 함께 춤추는 무천(舞天)이라는 축제가 있다.”라는 기록을 보면 강릉단오제의 시원을 동예 무천에서 찾을 수 있음이요 그렇다면 그 역사는 대략 2천 년을 헤아릴 수 있다.
강릉단오제의 ‘신적 영매’에 대한 일부 기록이 있다. 왕건을 도운 명주(강릉) 호족 왕순식이 고려 건국 후 강릉 일대를 계속 다스리면서 왕건의 꿈속에 나타난 대관령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김종서 정인지가 쓴 『고려사(高麗史)』 <왕순식 조>에 보인다. 이것을 보면, 고려 이전부터 대관령은 강릉을 비롯한 영동 지역 일대의 신앙의 중심지이자 신화 그 자체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왕순식이 모신 대관령 산신령은 김유신이다. 김유신 이전에도 다른 신적 영매들이 등장할 것이요, 그들 또한 대관령을 본관으로 삼을 것은 자명하다. 이 제사와 단오와의 관계는 조선 초기 문인 남효원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영동 민속으로 해마다 3, 4, 5월 중에 택일해서 무당들이 산신을 제사하는데, 3일 동안 큰 굿을 벌였다.”라고 한 내용이 있고 그중 5월을 단오와의 연결고리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강릉 출신 허균이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1603년 단오를 맞이해서 대관령 산신을 제사했다.”라고 언급하고 있음은 대관령 산신제가 단오와 직결한다는 증빙이 되기도 한다.
강릉단오굿을 이끄는 무당들은 세습무로서 연희예술성이 매우 뛰어나다. 사진 강릉시청
현재 강릉단오제는 대관령 산신령 김유신 외에 대관령 남녀국사 성황신도 모신다. 이들은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선승으로 강릉 문씨 처녀가 석천(石泉) 물을 마시고 낳았다는 선승 범일 국사와 고려 때 강릉 정씨 처녀 커플을 이른다. 두 사람이 시차를 극복하고 커플이 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강릉에 딸을 두고 살던 정현덕이라는 사내가 어느 날 꿈에 범일 국사가 나타나 딸과 혼례를 치르고 싶다 했고 이에 중 사위 두기가 싫은 정현덕은 단호히 거절했다. 며칠 후 정현덕이 바깥일 마치고 돌아와 집에 들어서는데 딸이 곱게 단장한 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 차에 호랑이가 집에 뛰어들어 딸을 물고 사라졌다. 화가 난 정현덕이 뒤를 쫓아가자 호랑이는 범일 국사를 모셔놓은 국사 성황당 안으로 들어갔다. 정현덕이 따라 들어가 보니 딸은 이미 범일 국사와 혼례를 치른 채 죽은 상태가 되어 옆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날이 음력 4월 15일이요 마침 단오와 때가 비슷함에 그 후 사람들이 이 커플을 남녀국사로 삼아 단오 제사 때마다 모셔온 것이다.
강릉단오제의 상징 신간목(神竿木)을 대신하는 화개(花蓋)를 앞세우고 행차하는 영신제 행렬. 사진 강릉단오제위원회
사람들은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한 강릉단오제를 한민족의 대표적 전통축제로 여기고 있으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의 강릉단오제는 대관령 산신령과 남녀국사 성황신만 모시고 있으나 예전에는 함께 모시던 12신이 더 있었다. 12신의 정체는 강릉의 역사와 인문지리를 기록한 『임영지(臨瀛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악남신으로 송악산지신·태백대왕신·남산제형태상지신·감악산대왕지신·대관령산신이 있고, 여신으로는 성황당덕자모지신·초당리부인지신·연화부인지신·서산송계부인지신(추모의 친모 유화)이 있으며, 인격신으로는 이사부·범일국사, 성황신에 신무당성황신 등이다. 이 12신에는 유불선과 무속 사상이 골고루 담겨있기에 한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대관령 산신령이나 남녀국사 성황신 커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지위에 있는 신들이 되는 것이다. 물론 범일 국사는 12신에 속하면서도 혼자 있으면 외로울 정씨 처녀와 함께 묶어 남녀국사 성황신 프레임으로 잡은 모양새이고. 이 12신을 모시는 제의가 현재의 강릉단오제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 원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의 민족문화 탄압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는 12신을 모시던 대성황당을 한민족 정기를 드높이면서 민족 단합 정신을 고취하는 매개체로 보고는 흔적도 없이 없앴다. 그렇기에 대성황당에서 12신을 조전제로 모시던 내용은 현재 남대천 임시 제당에서 남녀국사 성황신을 유교식으로 모시는 형태로 축소되어 있다. 12신 외에도 특별한 신이 또 있었다. 일제는 대성황당뿐 아니라 대창리 성황당을 없앴다. 이 성황당에는 생육신 김시습과 진시황을 죽여 고역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고자 떨쳐나섰던 창해역사가 모셔져 있었다. 대창리 성황당이 없어짐에 이 신들 역시 설 자리를 잃었다. 일제의 악독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으니, 모든 제의의 상징물인 신간목(神竿木)을 모시고 굿을 치른 약국 성황당 마저 없앰으로써 강릉단오제의 혼을 뿌리째 뽑고 말았다.
강릉단오제는 원래 읍치제(邑治祭)로 치러지던 축제였다. 오늘날 이 땅의 웬만한 지역축제들에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 시장, 군수, 시군의회 의장 등이 앞을 다투어 나서고 있는 것과는 달리, 조선 시대의 읍치제는 주민이 주인공이 되는 큰 잔치였다. 옛 강릉단오제에서는 관 수령이었던 부사(府使)가 일절 나서지 않았고, 대신 관아 육방 중 연장자를 호장(戶長)으로 내세워 1만 명에 이르는 양반 관속 백성이 함께 즐겼다. 조선 시대 축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읍치제로서의 강릉단오제가 이제는 무슨 행사에든 나서지 않으면 조상 묫자리 뒤숭숭해지는 지역 선출직들과 각종 기관장이 모든 제의의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도배하듯 맡음으로써 고유의 미덕을 상실하고 있음이다.
현재 시행되는 강릉단오제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희한한 것이 있다. 남대천 일대에 최대 5백여 개에 이르는 천막이 설치되고 이불 베개 등 침구류 일습을 사고파는 난장이다. 단오제 중심 행사들을 덮을 만큼 주객전도 양상의 전국 최대 난장판을 벌이는 것인데, 일제가 강릉단오제를 탄압하자 남대천 일대 상인들이 단오 때마다 남대천에 모여 벌인 난장 속에 단오굿을 집어넣는 식으로 강릉단오제의 맥을 이었던 것이 그 기원이겠으나, ‘강릉단오제’가 아니라 ‘강릉이불제’로 여기게 하는 거대 난장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는 없다. 강릉단오제위원회가 자릿세 수익에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음의 소치다.
한국 유일의 무언극 강릉관노가면극. 사진 강원관광개발공사
국내 유일의 무언극인 강릉관노가면극 등 대단한 공연예술의 진수를 보이는 한민족 최고(最古) 민속이자 한민족 역사를 꿰고 있는 신화적 축제인 강릉단오제가 오늘날에는 핵심 원형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세계문화 유산 이름 앞에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일제 탄압으로 핵심 원형을 훼손당한 상태인데도 아직도 해당 지자체나 강릉단오제위원회는 없어진 성황당 복원과 12신 부활에는 관심 두지 않고 그저 경제적 관점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 올해 단오도 정신 차리지 못한 식으로 구렁이 담 넘기는 듯하기에 못내 한심하다.
최정철 /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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