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민족 나라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는 벽

세상을 여는 잡학

by 최정철 Jong Choi

‘한국인 단일민족 설’을 이야기하면 이제는 듣는 사람들 모두 실소를 지을 것이나, 20세기 말까지 누구 하나 단일민족에 고개 갸웃거렸다가는 대번에 주변 사람들 눈알에 흰자가 가득 채워지곤 했다. 박정희 정권이 국민총화의 일환으로 내세운 ‘5천 년 역사의 단일민족인 한민족’ 문구는 ‘혈통적 단일민족’으로 포장되어 각종 교과서와 언론 매체를 누볐다. 고려 때까지 무한 개방적이었다가 조선 5백 년 동안 쇄국으로 외인들과의 교류를 겪지 못했던 한국인은 외인에 대한 경외심이 체질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단일민족 운운은 한국인의 귀에 솔깃하게 심어졌음이요 그로써 외국인과의 접촉에 더욱더 경직된 과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으니,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국제결혼을 패가망신 급 변고로 여겼을 정도다.

이광수는 1933년 자신이 쓴 「조선민족론」에, “조선 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단일민족 설’을 제기했다. 여운형과 김구도 단군의 성스러운 피가 흐르는 단일민족으로서의 역사적 전통과 찬란한 문화를 말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은 외세를 물리치고 생존할 것과 남북 분단 극복에 대한 민족적 열망과 의지 발로로서의 ‘공동체적 단일민족’ 개념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고지순했던 단일민족 설이 20세기 후반 들어 느닷없이 ‘혈통적 단일민족’이라는 황망한 정치성 문구로 변질한 것이다.


말 그대로 우리가 혈통적 단일민족이라면 예부터 한반도에 들어온 외인은 모두 씨가 말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삼한시대 때 말갈족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넘나들었던 것은 무엇이며, 처용과 허황후는 무엇이며, 고려를 침공했다가 충청도 박달재에서 김취려가 이끄는 관군에 패해 강원도와 함경도로 도망 들어가 종적을 감춘 거란군 5천 명은 무엇이며, 만두 사러 온 처자 손목 잡고 희롱하던 송도 회회인은 무엇이며, 포로나 귀화인 신세로 이태원에 몰려 살았던 거란족 말갈족 몽골족 왜인들은 무엇이며, 원나라 공주들이 시집올 때 수행원으로 왔다가 정착한 몽골인들은 무엇이며, 함경도 지역 언어에 영향을 준 여진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시달리게 된다. 전쟁 중에 강압으로 생겨난 혼혈인들을 따져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반도에서 가장 번성했던 외인은 회회인들이었다. 고려 때 대거 유입한 회회인들은 조선 초에 이르러서는 무려 2십만 명이나 될 정도로 한반도 땅에서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문화적으로도 이 땅에 끼친 영향력이 사뭇 컸다. 세종대에 편찬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은 회회력(回回曆)을 따르는 역법서였고 조선의 청화백자에 사용하는 푸른색 안료가 회회청(回回靑)이었다. 세종은 회회인들의 코란 송축을 좋아해서 각종 궁궐 행사 때 반드시 회회인들을 참석시키기도 했다.


이 정도로 다양한 외인이 한반도 땅에 장구하게 활발히 살아왔음이요, 원주민격인 동이족과 섞어 살면서 서로 간 핏줄 교류가 어찌 없었겠는가? 숱한 혼혈인들이 이 땅에 태어나 가족으로 이웃으로 함께 살아온 것이다. 그랬음에도 박정희 정부는 어리석게도 민족 순혈주의를 역설했다.


20세기가 끝날 즈음부터 민족 순혈주의에 대한 재고가 일어나면서 화제가 된 것이 ‘신라 왕족 흉노 김씨 설’이었을 것이다. 신라 문무왕은 이런 글을 자신의 묘비에 남겼다. “나의 선조는 15대조가 성한왕(聖漢王)이다. ······투후(秺候. 秺는 산둥성 일대를 말함)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했다.” 『한서(漢書)』에, “투후는 한 무제가 김일제를 위해 만든 관직이고 하늘을 제사 지내는 종족의 후손이 제천지윤인데, 본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이 제천금인(祭天金人. 금으로 사람형상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냄) 했기에 김일제가 한 무제로부터 김씨 성을 받았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리하면, 성한왕의 7대손과 15대손이 각각 흉노족 김일제와 문무왕이기에 문무왕의 경주 김씨는 흉노족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흉노족 제천지윤의 후손들이 어떻게 경주에까지 들어왔느냐 하는 것이다. 왕망이 한나라를 무너트리고 신(서기 8~24년)나라를 세울 때 강력하게 후원해준 세력이 제천지윤 가문이었다. 얼마 후 신나라가 유수에 의해 패망하자 제천지윤 가문은 살아남기 위해 한반도로 도주했을 수 있다. 아니면 왕망이 건재할 때 막강한 힘을 앞세워 일찍부터 한반도에 진출했을 수도 있다.


왼쪽이 김일제, 오른쪽이 김일제의 친부 흉노번왕 휴도왕. 한무제는 죽기 전 부마 김일제를 투후로 봉해 산둥성 일대의 제후로 삼았다. 사진 위키백과


그렇게 한반도 경주에 이른 김씨 일족은 서기 261년 미추 이사금을 배출하면서 정권을 잡고는 김알지라는 신화적 인물을 한반도 시조로 내세웠다. 경주 김씨의 김알지 시조 설은 신화적 어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알지의 ‘알’은 중원과 한반도 동이족이 공통으로 갖는 난생 신화의 소산으로도 볼 수 있으나 그 실체는 ‘금’이다. 몽골어 ‘알티’, 투르크어 ‘알틴’ 등 알타이어의 ‘알’이 금이기 때문이다. 제천지윤 가문으로서의 전통인 금을 내세운 것은 권력 집단의 출생 배경을 ‘황금 가문’으로 치장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들은 경주 김씨의 원래 본관이 ‘낙랑군 경조’임을 밝히기도 했다. 고려 문종 때 사람 김인위의 봉작인 ‘상서좌복야참지정사주국경조현개국남식읍삼백호’에 경조가 보인다. 그의 사위 이자연의 묘비에는 ‘낙랑군 경조씨를 아내로 맞이했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옛사람들은 요동 땅 낙랑군(樂浪郡)을 들어 중원을 통칭하던 경향이 있었다. 경조(京兆)는 지금의 시안(西安)이다. 그로써 원래 북방 흉노족이었던 김일제 가문이 훗날 중원 시안에 뿌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김씨와 북방 종족들과의 연관성을 밝히는 물적 증거도 있다. 북방 사람들이 이동 중에 언제든 고기를 삶아 먹을 때 쓰던 청동제 용기가 동복(銅鍑)이다. 그 동복이 부여족, 몽골족, 흉노족뿐 아니라 가야인과 신라인의 유물에서도 볼 수 있다. 종족의 교류와 이동을 증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무왕의 성한왕 후손 운운에는 의문보다 수긍을 더 얹어줄 수 있다.


왼쪽부터 가야 동복(대성동 29호분), 오르도스 동복(내몽골박물관), 부여 동복(길림시박물관). 신라기마인물형토기의 동복(금령총). 사진 STB상생방송 화면 갈무리 & 위키백과


그러나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소호금천씨를 먼 조상으로 두는 김수로와 김유신의 가야계 김해 김씨는 익숙하나, 흉노계 김씨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이 적통으로 잇고 있는 동이족에는 만주족, 선비족, 거란족, 몽골족, 훈족, 예족, 맥족(부여족), 왜족 등이 포함된다. 그중 맥족의 윗대가 될 부여족의 한 갈래가 훈족이다. 훈족의 시조가 투먼이요 부여 시조가 동명으로 같은 이름이다.


신의 채찍으로 불린 훈족 정복 군주 아틸라(Attila, 406년~453년). 5세기 초 동유럽 북부 넓은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사진 위키백과


한 고조 유방은 투먼의 아들 모돈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때부터 한나라는 천하 미인 왕소군을 바치는 등 훈족 제국의 조공국 신세가 되었다. 이후 훈족과 연관된 일로 궁형을 당한 자가 사마천이다. 그는 중원인으로서의 수치심과 밑천 사라짐에의 분노로 훈족을 경멸하고자 흉노라는 명칭을 자신이 쓴 『사기(史記)』에 떡하니 등재하고 말았다. 그것을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덥석 수용하고는 조상 중 한 갈래였던 훈족을 먼 외인이자 흉악한 노예 종족으로 여기며 오랫동안 터부시하면서 이질감을 가진 것이다.


해외 이주민 출신 가정의 자녀들이 겪는 따돌림 현상. 그래픽 최정철


한국인은 이제 2021년 기준 국내 인구의 6%에 육박하는 3백만 명 외인들과 15만 명에 이르는 해외이주민 가정 자녀를 품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외인과의 거리 두기 습성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출신 사람들에게는 다문화가정으로 부르며 선을 긋고 있고, 탈북정착민들에게는 새터민으로 부르며 왕따를 주고 있다. 아직도 피부색을 따지고 있다.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면 같은 민족이 되는 것이다. 어이없는 것이, 후손 증대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외인에의 벽 세우기인가 말이다. 외인들이라도 들어와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민족이 보전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최정철 / 문화 칼럼니스트



※ 동서고금 역사 신화와 함께 하는 한국인의 인문학『면사포를 쓰는 신화 속 한국 여인』만나기

https://smartstore.naver.com/roadnvill/products/6973681341


keyword
이전 02화한국인의 ‘신의 날’에 펼쳐지는 강릉단오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