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쿠르드족 눈물에 비친 한국인의 오늘

세상을 여는 잡학

by 최정철 Jong Choi

최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시내에서 이슬람교도의 무차별 총기 난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용의자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경찰 당국은 이번 소행이 IS와 연계되어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동안 잠잠하였던 극단 이슬람주의자들의 비열한 테러가 다시 고개 든 것으로, 전 세계로부터 비난받으면서도 IS는 끊임없이 서방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림으로써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한다. 이들의 테러는 오로지 타 종교를 일체 부정하는 폐쇄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심의 발로일 뿐으로, 종교도 과하면 문명 패퇴와 인류 파멸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IS와 탈레반이다. 그런 종교적 정치적 현상을 배경으로 일어난 오슬로 테러인데 용의자가 쿠르드족으로 밝혀졌다. 쿠르드족은 튀르키예(구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이슬람 국가에 편입되어 살면서 각각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차별을 받는 민족이다. 그 쿠르드족 일원인 40대 남자가 이슬람 광신도가 되어 서방 국가에서 테러를 일으켰다.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 단일민족으로 나라 없이 떠돌던 민족이 유대족과 쿠르드족이었다. 유대족은 2천 년 가까이 세계 곳곳에서 배척을 받았고 20세기 들어 히틀러의 제3 제국에 의해 6백만 명이 집단 학살당하는 참상까지 겪는 고난의 행군 끝에 가까스로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아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쿠르드족은 주변 나라와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로부터 이용당하고 배신당해 오는 식으로 유대족 못지않게 험난한 길을 걸어오면서 여전히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인접 지역인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과 이란 북동부 호라산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은 아르메니아, 레바논에 사는 일부까지 포함하면 대략 3천만 명을 웃도는 인구수를 가지면서도 현재 단일민족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해 있는 것이다.


쿠르드족 분포도(자료출처 BBC). 그래픽 최정철


쿠르드라는 이름의 유래는 7세기 무렵 이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사 이전 시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있지 않은 채 1,300년 전부터 현재의 거주지역에 살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천 년에 세워진 메소포타미아 제국 초기의 기록들에는 쿠르드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산악부족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기원전 401년 지금의 튀르키예 국경 바로 남쪽 이라크 자후 근처에서 침략 전투를 벌이곤 했던 카르두초이족을 지금의 쿠르드족으로 보고 있다. 쿠르드족은 사산왕조 페르시아(226년~651년)의 백성이 되었다가 아랍의 첫 번째 이슬람 국가인 우마이야 왕조(661년~750년)에 편입되면서 이때부터 이슬람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일부가 수피교라 하는 신비주의 지향의 이단 종파를 따르기도 하나 대부분 이슬람 수니파를 따른다. 쿠르드족은 메소포타미아 평원과 튀르키예와 이란의 고지대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 생활을 해왔다. 그 전통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진다. 각 나라의 국경 강화 조치가 실행되면서 철마다 가축들을 이끌고 풀이 돋는 초원을 찾아 돌아다녔던 그들의 이동로가 차단당한 것이다. 그로 인해 대부분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포기하고 부락 단위로 정착 농경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일부는 도시로 이주하여 직업을 갖고 사는 문명권 생활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머리에 푸시를 두르고 민탄과 샬바르를 입은 전통 쿠르드인의 모습. 사진 나무위키


쿠르드족의 전투력은 대단했던 모양으로 일찍이 여러 나라에서 용병으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특히 십자군 전쟁 당시 전사 살라딘은 쿠르드족의 용맹함을 상징하면서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전투력을 자랑했으니만큼 이들도 한때는 제국을 형성한 적이 있다. 이란 북동부와 아프가니스탄, 인도 북부지역까지 아우른 가즈나 제국(975년~1187년)이 유일무이한 쿠르드족의 나라였다. 그러나 이들은 흑해 북동부에서 남하한 셀주크투르크족 군대에 멸망하여 셀주크투르크 제국에 편입되었다가 셀주크투르크 제국에 이어 일어난 오스만투르크 제국(1299년~1922년)에 재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쿠르드 전사 살라딘. 사진 위키백과


쿠르드족이 독립해서 민족국가를 이룰 기회는 두 번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920년 세브르 조약을 맺고 쿠르디스탄 쿠르드족에게 자치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파샤의 주도로 새로 구성된 터키 국민 정부가 1923년 연합국과 맺은 로잔 조약으로 자치권을 박탈하고 말았다. 1946년 이란 땅의 쿠르드족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마하바드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서방의 지원을 받은 이란군의 공격과 소련의 외면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으로 쪼개져 편입되어 있던 쿠르드족은 각각 속해있는 나라에서 여러 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그때마다 철저히 진압되었고, 그 결과 각각의 나라들로부터 더 심한 민족 차별을 받아야 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1천 5백만 명 쿠르드족의 언어를 불법화하였고, 주요 도시에서 쿠르드족 고유의상을 입는 것조차 금지하는 식으로 쿠르드족의 민족의식을 철저히 말살하고 있다. 이란은 7백만 명의 쿠르드족을 이란 문화로 동화시키는 강압 정책을 펴고 있다. 수니파를 좇는 쿠르드족이기에 이란의 다수파인 시아파 교도들은 이들에게 종교적 박해를 가하고 있기도 하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4백만 명의 쿠르드족을 1980년대 치른 이란과의 전쟁에 용병으로 썼다가 전쟁 후 화학무기를 이용한 집단 학살로 투르크족의 독립 의지를 꺾었다. 이때 미국은 사전에 이 계획을 알았으나 방치하였다. 시리아 역시 1백3십만 명의 쿠르드족을 용병으로 활용하였다. 인민수비대라는 민병대가 쿠르드족으로 편성된 군대로, 이들은 시리아 내전 동안 시리아 민주군 일원으로 IS에 대항하여 싸웠다. 미국은 2017년부터 이 쿠르드족 민병대에 전쟁물자를 지원하여 IS 군대를 물리쳐 끝내 락카 지역을 해방하였다. 이때 쿠르드족은 이것을 기점으로 민족주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이려 하였으나 2019년 미국이 돌연 시리아에서 발을 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쿠르드족의 독립을 반대하던 튀르키예가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족을 대상으로 전격 군사 작전을 펼침으로써 쿠르드족의 희망을 꺾고 만 것이다. 그렇게 이라크 시리아의 쿠르드족은 용병으로 이용당하고, 전쟁 후 각각 이라크에 배신당하고 튀르키예의 일격으로 무너짐에 쿠르드족 사람들은 수천 년 흘렸던 눈물을 땅을 치며 계속 흘려야 했다.


이란계 쿠르드족으로 30여 년 전 가족을 따라 노르웨이로 이주하여 살아왔던 쿠르드족 남자 자니아르 마타푸르가 오슬로 땅에서 벌인 테러 행위는 천인공노할 짓임은 분명하나, 쿠르드족의 애절한 역사가 여기에 겹쳐지기에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면서 종교 희생양이 되어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가족마저 허망하게 포기한 그의 비운에 세계 10대 강국의 5천만 백성으로 사는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1970년대까지 보릿고개를 겪었던 가난한 나라에서 기적같이 생존 성장 발전하면서 월등한 민주주의의 꽃까지 피우는 등 세계적인 국민 지성과 힘을 보유하게 된 한국과 한국인. 그러나 최근의 대선 지선 전후 강대국들의 야욕이 넘실대고 있는 이 좁디좁은 반도 남쪽 땅에서 동서로 남북으로 찢어지고 갈라진 채 케케묵은 흑백 이념 논리라는 미몽에 빠져 우리 편 아니면 다 죽이고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갖는, 그런 우물 안 악다구니 짓거리에 미쳐 돌아가는 한국이요 한국인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는 정치판 난동은 남들 보기 창피한 후진국이 되는 것에 가속을 붙이고 있다. 한국인은 경제 부국 군사 강국 백성이라는 배부른 자부심 따위는 내려놓고 쿠르드족 사람들의 눈물에 진실로 부끄러워하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최정철 / 문화칼럼니스트



※ 동서고금 역사 신화와 함께 하는 한국인의 인문학『면사포를 쓰는 신화 속 한국 여인』만나기

https://smartstore.naver.com/roadnvill/products/6973681341


keyword
이전 04화한국인의 눈물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