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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한민국의 호접지몽

세상을 여는 잡학

by 최정철 Jong Choi

장자는, “장주가 나비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가 장주 꿈을 꾸는 것인가?(不知周之夢為蝴蝶與 蝴蝶之夢為周與)”라는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 세상 만물에는 구분이 없으며, 있다 한들 덧없음을 설파하였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지적 존재라 하여도 도(道)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가소롭다는 뜻이다. 프로이트는 내재해 있는 욕망 때문에 인간은 꿈을 꾼다고 말하였고, 그의 제자 융은 인간의 꿈에는 짐승들이 꾸는 꿈과는 다른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도 하였다.


장자의 호접지몽. 사진=baidu.com


조선 시대 때부터 등장하는 꿈 소재 소설을 흔히 몽유류(夢遊類) 혹은 몽자류(夢字類) 소설로 부른다. 문학의 한 축에 당당히 꿈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성종 때 심의가 쓴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은 중원 천자 두보와 조선 천자 최치원이 다스리는 이계(異界)에 들어간 주인공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이 쓴 『안빙몽유록(安憑夢遊錄)』은 꽃의 세계를 탐닉하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고, 조선 후기 선조 때 임제가 쓴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은 수양대군의 찬탈을 말하고 있으며, 역시 선조 때의 윤계선은 탄금대에서 자결한 신립 장군이 등장하는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을 전하고 있다. 작자 미상 작품으로 전해지는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죽은 열다섯 여인이 작자의 꿈에 나타나 호란 당시 무능하였던 권신들을 질타하고 있다. 이렇게 꿈 소설들이 유장하게 맥을 잇고 있으나 이것들은 숙종 때 한글로 쓰인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에 비하면 문학성이 크게 뒤떨어진다.

중 수련을 하고 있던 성진이 스승인 육관 대사의 명으로 용궁을 방문, 용왕을 만나 술 한 잔 좋게 얻어 마신 후 돌아가던 중에 팔선녀를 만나 희롱하는데 절에 돌아가서도 팔선녀 생각을 떨칠 수 없어 하자, 보다 못한 육관 대사가 그를 양소유로 환생시켜 세상에 내보낸다. 양소유는 입신출세하여 2처 6첩과 함께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말년에 이르러 문득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 중에 꿈에서 깨인다. 부귀영화라는 것이 결국 자신의 속세 이름이었던 ‘소유(少遊)’, 즉 ‘잠깐 노니는 것’임을 깨우친 성진은 헛된 생각 버리고 정진하니 2처 6첩으로 환생하였던 팔선녀도 성진의 제자가 되어 아홉 사람 모두 극락세계로 간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몽유류 소설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도 이어진다. 작자를 밝히지 않은 『지구성미래몽』이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한 달간 연재되면서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고, 박은식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1911년)』는 멸망한 신라의 후예로 만주 땅에서 대국을 일으킨 아골타로부터 민족 독립 이야기를 듣고 있으며, 신채호의 『꿈 하늘(1915년)』, 『용과 용의 대격전(1928년)』은 나라를 구한 민족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춘원 이광수의 '꿈'을 원작으로 삼아 제작한 신상옥 감독, 최은희(왼쪽) 황남(오른쪽) 주연의 영화 '꿈(1955년)'. 사진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광복 직후에는 『구운몽』 못지않은 몽유류 소설의 걸작이 등장한다. 춘원 이광수가 1947년 『꿈』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신라 때 젊은 중 조신이 주인공이다. 그는 태수가 절을 방문할 때 동행해온 태수의 딸 달례의 미모에 반한다. 중이라는 신분도 잊은 채 달례에게 꽃을 바치자 달례 역시 조신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둘은 사람들을 피해 멀리 도망가 아들딸 낳아가며 행복하게 사는데 속세에서의 악연이 불행을 앞세워 그들을 찾아든다. 조신은 얼결에 살인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숨기지만 들통나 붙잡힌다. 결국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칼을 받는 순간 놀라서 꿈에서 깨어난다. 모든 것이 일장춘몽임을 깨달은 조신은 이후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다. 이광수의 『꿈』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짧은 설화로 소개된 <조신의 꿈>을 새롭게 살을 붙여 소설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렇듯 문학 작품들을 통해 본 한국인의 꿈은 부귀영화에의 욕망을, 치욕과 불의에 대한 질타를, 인생무상에의 깨우침을 말하고 있다.

인쇄문화 시대를 지나 영상문화 시대가 되자 영화나 드라마가 꿈을 다루는 매체로 자리 잡았다. 등장인물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여기거나 내용 전체를 현실로 착각하는 등 다각적으로 가상세계를 탐하면서 ‘일상의 나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첨단 문명의 대두로 새로운 매체가 생겨났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개인용 컴퓨터가 확산하면서 자기만의 세상을 누릴 수 있는 홈페이지가 새로운 꿈 장치로 현신한 것이다. 여기에 희한한 존재가 등장하니 그것이 바로 아바타다. 아바타는 힌두교에서 신들의 분신을 칭하는 용어이다. 그런 아바타로 크게 성공한 홈페이지가 ‘싸이월드’다. 싸이월드가 2005년 즈음에 회원 수 8백만 명을 기록하였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아바타의 역할이 강력하게 작용한 까닭이다. 오죽하면 싸이월드에 존재하는 아바타들을 흉내 내어 코스튬플레이로 즐기는 현상까지 일어났을까. 그렇게 세상을 강타하던 아바타는 영화에까지 진출하였다. 2009년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아바타>는 지구에서 부족해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을 점령하려는 미래 인류와 행성 원주민 나비족 간의 전쟁과 사랑 이야기를 대서사시로 풀어내고 있다. 여기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존재가 아바타다. 주인공 인간들이 전환 장치를 거쳐 나비족 신체 구조의 아바타를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활약하는 것이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공상 영화 아바타(2009년)의 한 장면. 사진=영화 스틸컷


아바타의 인기와 생명력은 아직도 유효하다. 2021년 인류는 코로나바이러스 시대를 겪으며 ‘비대면’과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생소한 환경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고자 색다른 아바타 세계를 창출하였다. VR 기기를 갖춘 메타버스(Metabus)가 그것이다. 싸이월드가 2차원 가상세계에 머물렀다면 메타버스는 3차원 가상세계를 구현한다. 이곳에서 생명력을 갖는 존재는 오직 아바타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원하는 아바타로 변신, 메타버스라는 플랫폼에서 VR을 통해 원하는 대로 활동하며 타인과의 접촉을 즐기기도 하고, 그 안에서 각종 정보와 문화를 즐긴다. 메타버스는 곧 인간과 인간 간, 혹은 인간과 문명 간에 존재하는 중간계라 할 수 있음이니 실로 인류는 문명의 대도약을 체험하고 있다 할 것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10년 안에 메타버스 이용자가 10억명에 달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사진=페이스북메타코리아


문화나 문명의 발전에는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이다. 최근 페이스북이 개발한 메타버스 애플리케이션인 ‘호라이즌 월드’에서 한 여성이 아바타로부터 성폭행당한 사례가 보고되었다고 한다. 여성 아바타를 노린 남성이 역시 아바타로 접근하여 성폭행을 가한 것인데,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으면 아바타가 다른 아바타를 강압적으로 자신의 공간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지, 그 공간 안에서 원하는 대로 성적 행위를 가할 수 있는지 참으로 기괴하고 분노스럽기만 하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혹여 메타버스에서 성폭행당하는 것 못지않은 끔찍한 가상세계 상황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탄식만 나온다. 공정 정의를 앞세워 정권을 취한 세력이 오히려 공정 정의와 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 지도자의 격 낮은 언행과 그 부인되는 여인의 불미스러운 행적에 국민적 조롱이 일어나고 있다. 대통령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부정 여론이 긍정 여론을 압도하고 있을 정도다. 정권을 잡은 집단이나 정권을 잃은 집단이나 나라 걱정 해결할 생각보다는 저네들 자리 걱정만 하고 있다. 이런저런 한심한 모습들을 보면서도 언론은 과거와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기만 한다. 극렬한 이념 분쟁과 지역 갈등은 여전하기만 하다. 무역 적자에 나라 살림 휘청거리고 고물가 행진에 서민은 허리띠를 졸라맨다. 부디 이 어이없는 모습이 나비가 꾸는 꿈속의 세상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최정철 /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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