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역사를 잊는 민족, 왜곡하는 민족, 포기하는 민족

세상을 여는 잡학

by 최정철 Jong Choi

최근 필리핀에서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새 대통령으로 뽑혔다. 1965년부터 20여 년 동안 독재자로 군림하며 부정 축재를 일삼던 마르코스가 그의 친부요 사치의 여왕으로 이름 날리던 이멜다가 그의 친모다. 오늘날의 필리핀 젊은이들은 마르코스와 이멜다를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의 아들이 누군지도 모른 채 몰표를 준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아니 젊은이들이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필리핀은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악명높은 독재자 마르코스와 사치의 여왕 이멜다의 아들이 필리핀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사진=BBC.png 악명높은 독재자 마르코스와 사치의 여왕 이멜다의 아들이 필리핀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사진=BBC

역(歷)은 현재 시점까지 흘러온 과거의 시간을 추스르는 것이요, 사(史)는 그 과거 시간 속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것을 이른다. ‘史’를 파자하면 ‘中’과 ‘手’가 된다. 중립을 견지하여 기록한다는 뜻이 ‘史’에 들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과거에 어떤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순차적으로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양의 고대 국가들은 역사서 편찬을 국가적 위상 세우는 데 중요한 요건으로 여겼다. 중원에는 최고(最古) 역사서 『서경(書經)』을 비롯하여 『삼국지(三國志)』, 『수서(隋書)』, 『당서(唐書)』, 『진서(陳書)』 등이 있었다면 고고려는 『유기(留記)』와 『신집(新集)』, 백제는 『서기(書記)』, 신라는 『국사(國史)』, 고려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내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을 정도로 역사 기록에 전력투구한 민족이 한민족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을 만큼 기록 내용이 하도 세세하기에 하늘 아래 사는 사람이라면 보고 나서 혀 내두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다. 난폭하였던 연산 임금이었건만 사관을 보면 시뜻해 하며 무서워하였다고 한다. 사관이 기회만 되었다 싶으면 춘추필법이 어떻고 포폄(褒貶)이 어떻고 하며 임금 압박하기를 밥 먹듯 하였기 때문이다. 사관은 또 아주 지겨운 존재이기도 하였다. 임금이 있는 곳이라면 여름날 고목에 매미 붙듯 사관은 어김없이 근처에 붙어 앉아 임금이 무슨 말을 하든지 한 치 오차 없이 일일이 기록하였다. 임금이 잘못 말하고 나서, “방금 그 말은 삭제하라.”라고 하면 삭제는커녕, “임금이 삭제하라고 하더라~”라는 토까지 달았다. 선대 임금의 행적이 궁금해진 후대 임금이 선대 기록물을 열람하겠다고 말을 꺼낸다 싶으면 신료들은 돗자리 깔고 드러누워 절대 불가를 외쳤다. 혹여 거슬리는 내용이 있으면 뜯어고칠까 하여 그런 것이다. 세종 임금이 그런 일을 겪었다. 태종실록을 볼 수 없을까, 말 꺼냈다가 황희에게 면박만 받고는 본전도 뽑지 못하였다. 조선의 선비는 역사는 다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백성의 것이요 나라의 것이라는 준엄한 역사관을 갖고 있던 것이었다.

중국은 화하족(華夏族) 중심의 천하관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기록한다. 고약한 그 버릇은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에서 기인하였다. 공자는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정직한 기록보다는 완곡한 기록을 권장하였다. “존화양이(尊華攘夷), 자국을 높이고 변방국은 깎아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 자국 역사는 상세하게 다루고 외국 역사는 간단히 기술한다. 위국휘치(爲國諱恥), 중화의 체면에 손상 가는 수치스러운 내용은 밝히지 않는다.” 이러하니 역사서가 아니라 한 편의 대하소설이라 하여도 무방하다 할 것이요, 오죽하면 당(唐) 최고 역사가인 유지기가 이를 두고, “인륜의 선악이 공자의 붓끝에 달려있다.”라고 한탄하였을까 싶다.



중국이 깎듯하게 형님으로 모실 역사 왜곡의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의 대표적 역사서는 『일본서기(日本書紀)』다. 오오야마가 텐지왕을 암살한 후 텐지의 후궁 누가타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672년 ‘임신(壬申) 전쟁’으로 텐지의 큰아들 오오토모마저 격파, 마침내 일본 최초의 천왕 텐무왕이 되어 680년 역사서를 간행하게 한 것이 일본서기다. 완성 시점을 놓고 보면 712년 겐메이왕에 의해 간행된 『고사기(古事記)』보다 8년 늦게 세상에 나왔으나 일본 사학계는 일본서기를 더 쳐준다. 어찌 되었든 일본서기는 큰 오류를 품는 것으로 향후 일본인들의 병적인 왜곡역사관의 시발이 되고 있다. 백제 역사서들과 중원 역사서들을 참고하면서 일견 객관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운 것은 오늘날의 일본 사학자들조차 골머리 아파하는 대목이다. 백제 기년과 120년 차이를 보이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왼쪽이 일제가 쌍구가묵본으로 변조한 비문이고 오른쪽은 탁본으로 원형을 찍어낸 비문이다. 사진=thewiki.kr.png 광개토대왕 비문. 왼쪽이 일제가 쌍구가묵본으로 변조한 비문이고 오른쪽은 탁본으로 원형을 찍어낸 비문이다. 사진=thewiki.kr


일본이 19세기 말부터 한국인에게 저지른 악행 중 하나가 한국 역사 훼손이었다. 한국 역사에 나오는 내용 중 일본에 불리한 내용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철저히 감추고 왜곡 변형시킨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광개토왕 비문 사건이다. 1884년 일본육군 참모본부 장교 카케아키가 만주 집안 땅에서 발견한 광개토왕 비석의 비문을 복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때 카케아키는 탁본이 아닌 종이를 비석에 댄 채 글자들을 일일이 먹으로 쓰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으로 비문을 복사하였고, 이것을 가지고 일본 사학자들이 저네들 입맛에 맞게 비문을 조작하였다. 이후 일본육군 참모본부는 광개토왕 비석을 다시 찾아 일부 글자를 석회로 덧씌우거나 쪼아서 없애는 만행으로 비문 조작의 완성점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는 “(호태왕이) 바다를 건너 임나가라(대마도)를 기점으로 규수와 오사카 일대를 정복하였다.”라는 내용을 ‘신묘년(391년) 야마도(당시 오사카 동남쪽 지역에 존재) 왜의 진구 황후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것으로 임나가라의 한반도 존재설을 주장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대 동이 국가들의 강역을 한반도 위주로 축소하고 중국의 지배 영역을 한반도 안에까지 끌어들였다.

그런 일본인지라 태평양 전쟁 패전국 신세로 전락한 이래 지금까지도 한반도 관련 역사에 대해서는 왜곡된 주장만 늘어놓고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저질렀던 한국인 노동자 강제징용, 위안부 강제 동원 등과 같은 역사적 범죄행위도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역사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탁월한 특기를 갖는 어리석은 민족이다.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을 꿈꾸었던 일본 극우의 대명사 아베 신조 전 수상. 자국민의 테러로 숨졌다. 사진=Yahoo.jp.or.png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을 꿈꾸었던 일본 극우의 대명사 아베 신조 전 수상. 자국민의 테러로 숨졌다. 사진=Yahoo.jp.or


서양인은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라 하여 ‘사내들의 이야기’라 하고 이에 발끈한 여성계는 ‘허스토리(Herstroy)’ 명칭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다 우스갯소리다. 히스토리는 ‘연구’라는 뜻을 갖는 그리스말 ‘이스토리아(Istoria)’에서 파생한 말이다. 서양인은 역사를 ‘과거 탐구’라는 개념으로 수용한다. 지나간 일에 대한 ‘되새김’을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독일인은 역사를 ‘과거에 일어났다’라는 뜻의 ‘게시히테(Geschichte)’로 표현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러한 역사관을 갖고 있기에 헤로도토스 이래 서양 문명권에서는 역사 왜곡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강단사학자들의 식민사관으로 설정된 고대 한반도 강역. 부여 고구려 등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요동 낙랑군이 낙랑국 자리에 들어와 있다. 삼한도 중원 지역의 본삼한 강역을 빼고 남한 일대로 제한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png

강단사학자들의 식민사관으로 설정된 고대 한반도 강역. 부여 고구려 등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요동 낙랑군이 낙랑국 자리에 들어와 있다. 삼한도 중원 지역의 본삼한 강역을 빼고 남한 일대로 제한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 한국인은 어떠한가? 일제강점기 당시 이완용의 후광을 얻은 이병도가 전파한 식민사관이 오늘날까지도 ‘강단사학자’들에 의해 그 맥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임나일본부설과 낙랑군 평안도 존재설, 삼한 한반도 이내 존재설 등을 맹신하고, 중국 자료와 천문관측 기록으로 밝혀진 요동, 요서, 하북성, 산둥반도, 절강성 등 한민족의 고대 강역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광복 후 역대 정부들 역시 이런 현상을 수수방관해 왔다. 과거 투철한 역사관을 자랑하였던 한국인은 그런 식으로 100년 넘도록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포기하는 민족이 되어 있는 것이요, 독일 베를린 소녀상을 찾아가 ‘위안부 사기’를 외치는 넋 나간 인간들이 그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엊그제 역사 부정의 선봉장 극우 수뇌 아베 전 수상이 거리 유세 중 자국민의 총탄 세례를 받고 숨졌다. 아베가 죽었다고 그들의 역사 외면과 부정 행태는 바뀔 리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에는 친일 성향의 우파 정권이 들어섰다. 한동안은 더 우리의 역사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최정철 / 문화 칼럼니스트



※ 동서고금 역사 신화와 함께 하는 한국인의 인문학『면사포를 쓰는 신화 속 한국 여인』만나기

https://smartstore.naver.com/roadnvill/products/6973681341


keyword
이전 06화21세기 대한민국의 호접지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