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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주파호의 공무원 9급 거천(擧薦)

세상을 여는 잡학

by 최정철 Jong Choi

세상은 능력 있는 인재들의 주도로 경영되기 마련이다. 동서 막론하고 고대부터 현대까지 그 어떤 집단, 사회, 국가에서도 지도자를 비롯하여 인재들이 존재하였기에 체제가 존속할 수 있었다. 21세기 벽두에 삼성 회장 이건희는 미래는 인재 1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중국이 아무리 넓고 인구가 15억 명을 헤아릴 정도여도 인재 5천 명만 있으면 충분히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철학이다. 첨단 현대사회에서는 체계화된 구조의 역할이 크다고 하겠으나 그 역시 컨트롤러는 인재다.

고대 한국인은 씨족 단위의 세력 집단이 지역을 다스렸고 주변의 다른 씨족들이 동조하면 나라의 지도자도 배출할 수 있었다. 추모를 도와 고고려를 세운 오이, 마리, 협보는 추모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음으로 알려져 있으나 각자 자신의 씨족을 등에 업고 있었을 것이다. 단 세 명이 추모를 도와 나라를 세우고 정사를 펼쳤을 리는 만무다. 신라 지도자는 혈연관계에 천착하였다. 선덕여왕은 외조카 김춘추와 사돈 김유신과 손잡고 왕권을 거머쥐었다. 진성여왕은 숙부인 각간 위홍을 남편으로 삼아 권력을 유지하였다. 백제 지배 세력은 사(沙), 협(協), 연(燕), 해(解), 국(國), 목(木), 묘(苗) 혹은 백(苩), 진(眞) 혹은 정(貞)씨 성을 갖는 대성팔족(大姓八族)이었다. 이해관계가 맞는 여덟 개 집단이 임금을 보필하면서 나라를 경영한 것이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정략혼인으로 지역 호족들을 품어 정권 기반을 다졌다. 그렇듯이 고대 국가들은 인재를 가까운 혈연 지연 관계에서 찾은 것이다.

국가 기반이 다져지면서부터는 음서제(蔭敍制)라는 인재 추천 제도가 생겨났다. 문벌 등 세력가나 공신, 5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자 등의 자손에게 관직을 주던 제도로 신라 때에는 그 시행 빈도수가 미미하였으나 고려 때는 지나칠 정도로 빈번하게 시행되었다. 사람들은 벼슬자리를 청탁하고자 세력가를 찾아가 뇌물을 바쳤고 그것을 ‘분경(奔競)’이라 하였다. 뇌물을 받은 세력가는 청탁자를 혈족으로 가장하여 벼슬을 얻도록 해 주었다. 그런 식으로 재물을 늘린 세력가들이 훗날의 부패한 권신 귀족이요 고려 말 사대부들의 역성혁명에 결정적 명분이 이들로부터 나왔다.

조선은 태조 때부터 공신이나 세력가 집 앞에 서리들을 배치하여 아무나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식으로 분경을 차단하였다. 또한 음서제의 폐단을 최소화하고자 승진을 하더라도 정3품 당상관 이하까지만 허락하였고 그나마도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기회를 현저히 줄여 인재 발굴에 나름 공정성을 기하였다.


세종은 관노 출신 장영실에게 정4품 호군(護軍)직을 내리면서 총애하였다. 사진=TV드라마 '천문' 스틸 컷


고려의 개혁 군주 광종 때부터 인재 등용의 폭을 넓히고자 실시되었던 과거제도는 조선에 이르러 일대 혁신을 맞는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양천(良賤) 제도를 펼쳐 귀족 양반 평민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로써 평민들도 얼마든지 과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때로는 천민 출신도 재능이 있다면 과거 응시 과정 없이 특채로 요직에 앉혀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였다. 태종과 세종은 중원 항저우 출신 귀화인과 동래현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관노 장영실이 재주가 비상하게 특출함에 가까이 두면서 몹시 아꼈다. 조선 중기부터는 사농공상 체제로 사회 구조가 변화하면서 중인과 평민 출신의 관직 진출 폭이 더 넓어졌다. 이순신은 훈련원 별시 무과에 28위로 턱걸이 급제한 말단 무인 나대용을 전격 발탁, 그에게 조선 해군의 핵심이었던 거북선 제작이라는 중책을 맡기기도 하였다. 조선 5백 년 동안 문과 과거에 급제한 사람 수가 1년 평균 29명으로 총수를 헤아리면 대략 1만 4천 명 정도라고 한다. 이들 중 중인과 평민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혈연관계와 세습으로 관습화되었던 고대의 관료 체제가 조선 사회에서 일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지방 인재 거천(擧薦)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은 음서제와는 다른 방식의 인재 추천 제도도 병행하였다. 중앙 관료들은 재덕 있는 자를 추천하여 관직에 들이거나 승진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공의(公議)라 하였다. 지방 수령은 부임 직후 지역의 어질고 재능있는 자를 찾아 향승(鄕丞)이라는 직급으로 자신을 보좌하도록 하였는데, 향승의 역할 중 하나가 지역 인재를 찾아 수령에게 추천하는 일이었다. 때로 국가에 필요한 인재라고 여겨지면 수령은 조정에 상주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거천(擧薦)이라 하였다. 이익은 좋은 인재는 과거보다도 추천 방식으로 얻는 것이 더 효율적임을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적극적으로 설파하였다. 과거는 응시자의 실력만 파악할 수 있으나 추천은 그 사람의 인성과 집안 환경 등 복합적인 요소까지 들여다볼 수 있기에 제대로 된 인재를 뽑는 방법으로 여긴 것이다. 조선 시대 때 거천으로 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운 대표적 인물이 오리 정승으로 유명한 이원익이다. 황해 감사로 재직 중이던 이이는 이원익의 타고난 재능과 인품을 알아보고 지방 한직에 머물러 있던 그를 조정에 거천하였다. 이후 이원익은 사간원과 홍문관을 거쳐 마침내 정3품 승지 자리에 오르더니 임진왜란 후에는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 노령을 핑계로 사직하여 낙향하였을 때도 조정의 공의로 광해군과 인조가 매번 그를 다시 불러 영의정으로 재직하게 하였다.


제나라가 관중의 탁월한 능력으로 패권국가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포숙아. 사진=baidu.com


중원에서 대표적으로 성공한 거천 사례는 포숙아와 관중에서 찾을 수 있다. 춘추시대 때 제나라를 부국으로 만들고자 애를 쓴 포숙아는 환공(桓公)에게 관중을 자기보다 높은 지위인 재상으로 추천하였다. 관중은 포숙아의 믿음에 부응하여 제나라를 패권국가로 일구었다. 환공은 성공 사례를 남겼으나 그 아들 위왕(威王)은 실패 사례를 전하고 있다. 즉묵(卽墨)이라는 지역을 다스리던 대부가 있었다. 그는 민심을 잘 화합시키고 농사의 소출도 충분하게 하는 등 성실한 관리의 길을 걸었다. 그에 반해 아(阿) 지역을 다스리던 대부는 민심의 반발만 받는 고약한 관리였다. 그런 두 사람의 공과는 위왕에게 언제나 반대로 보고되곤 하였다. 당시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자가 주파호로 그는 훌륭한 인재들을 조정에서 내쫓고 오직 자신에게 아첨하고 상납하는 자들만 가까이 두었다. 아대부도 주파호에게 뇌물을 바쳤고 이에 주파호의 추천으로 대부가 된 것이다. 보다 못한 재상 추기가 나서서 위왕에게 즉묵현과 아현의 암행 조사를 주청하였다. 조사 후 위왕에게 진실이 보고됨에 위왕은 즉묵대부와 아대부를 조정에 불러들였다. 위왕은 즉묵대부에게 1만 호의 땅을 식읍으로 내렸고 아대부는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였다. 주파호도 국정 농단과 부정 인재 추천 죄로 자신을 따르던 간신들과 함께 끓는 가마솥을 피하지 못하였다. 이렇듯이 포숙아와 관중, 주파호와 아대부 사례는 인재 천거에 있어서 사심과 욕심을 멀리할 것을 경계하게 하고 있음이다.


강원랜드 인사 개입 관련 해명하고 있는 권성동 의원. 사진=SBS TV 뉴스 화면 갈무리


한국은 선거 때면 많은 사람이 후보 곁에 모여 그를 돕는다. 그러나 그 행위에는 선거 승리 후 논공행상 덕을 보려는 계산이 들어있음이요 당선자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능력과 전문성은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이런저런 일자리를 흩뿌리듯 나눠 준다. 고질병이 된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한국 선거판의 일그러진 작태다. 수년 전 강원랜드 인사 개입의 의혹을 받기도 한 새 정부의 실세 권성동 의원이 강원도 선거관리위원의 아들을 대통령실 직원으로 ‘거천’한 것에 거센 국민적 비난이 일고 있다. 조선 시대도 아닌 21세기에, 모든 이가 공정한 기회 하에서 저마다의 갈고닦은 실력으로 치열하게 경쟁하여 직업을 얻는 시대에, 수많은 취준생이 분노를 터뜨리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추천한 것이 왜 잘못이냐고 되물으며 7급 정도를 기대하였는데 9급 자리라 당사자에게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까지 덧붙이는 뻔뻔함이 가히 주파호 급이다. 이 정도면 끓는 가마솥 구경을 시켜줄 만하다.



최정철 /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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