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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지간(左右之間) 길 잃고 헤매는 오늘의 한국인

세상을 여는 잡학

by 최정철 Jong Choi

약 2천 년 전 중국 최초의 자전(字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원래 ‘左’ ‘右’ 글자에는 각각 ‘工’과 ‘口’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손을 뜻하는 ‘又’만 있어서 그것이 오른쪽을 가리키는지 왼쪽을 가리키는지로 좌우를 나타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工’ ‘口’가 들어가게 되어, “左는 손으로 서로 돕는 것이다. 왼쪽과 工의 뜻을 따른다. 右는 손과 입이 서로 돕는 것이다. 오른쪽과 口의 뜻을 따른다.”라는 해석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좌우는 ‘서로를 돕는 관계’가 된다. 설문해자는 또, “工과 口은 각각 제사 지낼 때의 음악(工)과 제물을 담은 그릇(ㅂ 형태)이다.”라는 설명도 붙이고 있다. 협력 체계를 한 번 더 부연하는 말이다.


고대 중원 국가들이나 동이 국가들은 중요한 벼슬에 좌우 명칭을 붙였다. 천자와 정책을 의논하는 좌보(左輔)와 간언을 올리는 우필(右弼)은 천자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전의(前疑. 경호 의전 담당), 후승(後丞. 왕명 출납 담당)과 함께 사좌(四佐)에 들어가는 높은 관직이었다. 중원의 명리학이나 풍수에도 좌우가 언급된다. 자미성(紫微星)이 좌보 우필을 반겨 상좌(相佐. 서로 돕는 존재)로 삼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초기의 고고려와 백제는 각각 좌보 우보를 두어 병마를 책임지게 하였고, 조선은 좌의정과 우의정, 좌찬성 우찬성 등 좌우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이렇듯이 동양의 좌우는 ‘상호 협력하는 생산적 존재’였다.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는 예수와 그 우편의 디스마스. 사진=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Thyssen-Bornemisza) 미술관.png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는 예수와 그 우편의 디스마스. 사진=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Thyssen-Bornemisza) 미술관


서양의 좌우 개념은 아시아에서 발현한 그리스도교에서 그 기원이 나온다. 예수가 골고다 고원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좌우에 각각 한 명씩의 죄인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왼쪽의 죄수는 그대가 메시아라면 나를 살려달라고 악을 썼으나 오른쪽의 죄수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예수에게 회개하고 구원받았다. 골고다에서 숨을 거둔 예수는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 그의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예수 이야기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서양인에게 있어서 ‘左는 악(惡)의 자리요 右는 선(善)의 자리’가 되었다. 여기에 개평으로 오른쪽 죄인 디스마스는 그리스도교 내에서 성인급 대접을 받고 있고.


프랑스 혁명 당시 좌익과 우익으로 불린 국민의회와 왕당파. 사진=위키피디아.png 프랑스 혁명 당시 좌익과 우익으로 불린 국민의회와 왕당파. 사진=위키피디아


좌익과 우익(Left-Right Spectrum)이라는 명칭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 때 생겨났다. 당시 사회적 평등과 개혁을 주장하는 국민 의회는 회의실 왼쪽에 앉았고, 기존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왕당파는 오른쪽에 앉았기에 이들을 약칭하여 좌익과 우익으로 부른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 정도 흐른 후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발표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은 멀게는 토머스 모어, 스피노자를 비롯하여 동시대의 포이어바흐, 엥겔스, 생시몽, 로버트 오언 등과 같은 사상가들을 사회주의자로 묶어 재조명하게 하는 등 시대적 총아로 주목받았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프랑스 혁명에 이어 계속하여 위기감 느끼게 된 기존의 지배계층은 선의 대명사인 우(右)를 저네들의 보호막으로 삼아 사회주의자들을 좌익으로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좌익 운동에 ‘무산자들의 한풀이식 반항’이라는 악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우익이 좌익을 예수의 왼쪽에 있던 고약한 죄인으로 내몰면서 ‘우리는 옳고 너희는 그르다’라는 정반(正反) 논리로 탄압함에 좌익으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익의 보금자리인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자고 낫과 망치를 들어 맞대응에 나섰다. 그렇게 하여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마침내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카를 마르크스. 사진=위키백과.png 카를 마르크스. 사진=위키백과


좌익 우익 개념이 근대 때 홀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사시대 때, 수렵 이동 생활을 하던 인류의 조상들은 현재의 위치에 조금 더 머물며 현재 취하고 있는 먹거리를 계속 챙기느냐, 아니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이동하느냐, 혹은 포획하기 쉬우나 그 얻는 양은 적기만 한 물고기를 사냥하느냐, 아니면 단 한 번으로 몇 달 치 고기를 얻을 수 있는 매머드를 목숨 걸고 사냥하느냐, 혹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으나 손쉽게 먹거리를 얻을 수 있는 수렵 생활을 이어갈 것이냐, 고된 노동이 뒤따르지만 해마다 안정적으로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농경 정착 생활을 할 것이냐, 하는 식의 고민을 했을 것이고 이러한 고민과 의견 충돌은 좌우익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상 유지와 안전, 그것이 아니면 진전과 도전으로 말이다.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당을 놓고 말할 때 좌파냐 우파냐로 그들의 근본과 지향점을 따진다.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사회적 평등 개념을 강화하는 정책이 크게 시행되고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현상 유지를 토대로 하는 정책을 구사한다. 자본주의자들은 우파 정권을 지지하고 소시민들은 좌파 정권을 원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따라 좌파 정권과 우파 정권이 들락날락한다. 자연스러운 섭리다. 일찍이 헤겔도 동양적 좌우 철학을 반영하여 정반의 가치를 ‘합(合)을 생산해 냄’으로 정의하였듯이, 인간은 시행착오라는 정반 과정으로 합을 일구어내며 발전한다. 머물러 안주를 취할 완벽한 정 혹은 반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태극 원리와 같다. 서로 물고 물리며 순환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30년 전 좌우 동서 냉전이 사라졌나 싶었으나 그 잔불이 일어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을 촉발하고 말았다. 영국과 미국 등 일부 강경 우익 국가들은 러시아를 이번 기회에 어떡하든지 붕괴시키려 하고, 좌익 진영을 대표하는 러시아는 이에 굴함 없이 단기필마로 맞서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자 연합전선을 강화하고 있고 중국 역시 결기를 돋우고 있다. 이런 세계적 좌우 대립 시대가 엄중하게 전개되는 중에 한국 땅에서는 희한한 좌우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좌우익 정신은 사라지고 권력 투쟁과 보복만 넘쳐나는 대한민국 국회. 사진=Thewiki.kr.png 좌우익 정신은 사라지고 권력 투쟁과 보복만 넘쳐나는 대한민국 국회. 사진=Thewiki.kr


한국인의 좌우 대립은 광복 이전인 독립 투쟁 시기부터 있었고 광복과 함께 좌파 정권과 우파 정권으로 한반도가 남북으로 양분되더니 기어이 동족 간 대규모 전쟁까지 일어났다. 정전 후에는 남북 모두 좌우 이념 점검으로 숱한 사람을 희생시켰다. 여기까지는 좌우 대립 양상에 그나마 각각의 정체성이 선연하였으나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좌우 대립을 보면 이런 이전투구도 없다 싶다. 우익은 좌익을 빨갱이라 몰아대고, 좌익은 우익을 수구꼴통으로 부르며 비웃는다. 좌익 중진이 어느 날 우익의 연단에 올라서고 우익의 기수는 진영을 바꿔 좌익의 바람을 나부낀다. 정체성 없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이다. 양 진영을 대표하는 정당들은 정권 잃으면 달을 보고 복수 다짐하고, 정권을 되찾으면 반드시 보복을 가하며 환희의 축배를 든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를 죽이는 것부터 생각한다. 조작, 기만, 허위사실 과장 배포, 상대방 뒷조사로 하루 해를 띄우고 지운다. 선거 때 되면 실력 발휘로 정책은 내지 못하고 오직 상대방의 구린내만 들춰 국민을 낙담시키고 지치게 만든다.


더 큰 문제는 대한민국에 좌익 우익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땅의 좌익 우익은 진즉부터 고인 물이 되어 있다. 보수를 내세우는 우익 정당은 부패와 이권에 미쳐 썩는 냄새만 풍기는 괴물이 되어 있고, 진보를 말하는 좌익 정당은 당내 경쟁자를 죽이는 내부 분쟁으로 용장과 전사들은 사라지고 오합지졸들만 설치고 있다. 좌우고 뭐고 너나없이 그저 국기 어지럽히는 밥그릇 싸움질에만 일로매진하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좌익 우익의 탈을 뒤집어쓴 자들의 행각이다.


그렇듯이 한국인은 지금 좌우 돛을 잃은 채 일엽편주로 격랑에 시달리고 있으니 이 땅에 우울증 환자가 어찌 늘어나지 않겠는가. 종이 한 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면서 이제라도 정신 차려 좌우 협력이라는 아름다운 옛 철학과 생산적 정반합 정신을 되살리기를 바랄 뿐이다.


최정철 /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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