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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Oct 05. 2022

술잔에 담는 당기무(當其無) 정신

세상을 여는 잡학

과거나 입시에 합격하고 선거에 당선된 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주로 꽃이 내려진다. 반면 운동 시합의 우승자에게는 ‘컵(Cup)’ ‘배(盃)’라 하여 실은 즉 술잔이 내려진다. 최종 승리자로서의 환희를 술 부어 마시면서 실컷 즐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다도(茶道)에서의 잔은 차의 빛깔과 어우러지도록 함으로써 차 맛을 더욱 그윽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관점을 중시한다면 술잔은 어떤 의미로 쓰이는가 하는 형이하학적 관점을 취한다.      


유럽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은 귀 모양이라서 이름도 빅 이어(Big Ear)다. 사진 챔피언스리그 홈페이지(uefa.com)


인간은 먼 상고 시대 때 곡식류를 채취하면서부터 술을 마셨다. 갈무리해 둔 곡식이 어쩌다 수분과 만나 썩으면서 수액이 발생하는데 그것을 마셔보니 알딸딸해지면서 뭔가 기분 좋아지는 것이 확연하였다. 그런 현상을 체득하고는 상습적으로 술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술을 마시면 취하고 기분이 좋아진 김에 환성과 몸짓이 뒤따랐다. 이것이 노래가 되고 춤이 되었다. 신을 두려워하던 주술 시대 때는 술 마신 후 춤추는 것을 접신(接神)의 채널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천제를 지낼 때 술을 반드시 가장 중요한 제사음식으로 다룬 것이다. 제사에서는 술로써 신인 합일을 이끌었고 구성원들은 그 술 마심으로써 일심동체가 되었다. 그렇게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술은 인간 풍속의 기저 문화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구한 술 문화가 이어지는 동안 인간은 별별 술잔을 만들었다. 문명이 자리 잡기 전에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동식물의 표피로 술잔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짐승 뿔과 조롱박이다. 문명이 형성되자 흙으로 그릇을 만들면서 비로소 원하는 형태의 술잔 생산도 가능해졌다. 청동기 문명이 시작됨에 맞춰 금속 술잔도 나왔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저 술을 받아 마시는 용도만 생각한 술잔을 뛰어넘어 모양과 문양 등이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어떤 술인지 어느 때인지 어떤 의미인지 등에 맞춘 술잔까지 각각 달리 만들어졌다. 드디어 예술성과 사회성이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의 힘이라 할 것이다.     


대개 술잔의 모양은 와인 잔처럼 긴 대롱이 있는 것과 보통 컵처럼 대롱 없는 것, 그리고 독일식 저그(Jug)와 같이 뚜껑 있는 것과 없는 것 등으로 나뉜다. 대롱이 있는 것은 동양의 향로처럼 조형미를 멋들어지게 낼 수 있다. 그런 장점도 있고 손에서 잔으로 전달되는 체온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 된다. 와인은 낮은 온도로 저장된 상태로 음용되는데 보통 때는 대롱만 쥐고 술을 마시지만 때로는 술 담긴 부분의 밑을 손바닥으로 거머쥐기도 한다. 그러면 낮은 온도에서 보존되어 있던 휘발성 향기 성분이 부드럽게 밖으로 나와 코끝을 자극하게 된다. 투구 형태로 장식된 독일 맥주잔은 대개 도자기로 되어 있다. 맥주 속의 탄산가스와 거품을 보존하기 위하여서이다. 동양의 술잔 역시 도자기 술잔이 주류를 이룬다. 


술잔은 술의 종류나 알코올 도수에 따라서 각각 그 형태를 다르게 한다. 향이 매우 강한 술, 그다지 감미롭지 않은 술 등을 마실 때는 주둥이가 넓은 잔을 쓰고, 향이 약하거나 미묘한 술에는 향이 모여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므로 튤립처럼 주둥이가 오므라든 잔을 써야 한다. 맥주와 막걸리처럼 도수 낮고 양 많은 술에는 큰 잔이 사용된다. 위스키나 코냑, 브랜디처럼 도수 높고 양 적은 술에는 스트레이트 잔이라고 부르는 작은 잔이 사용된다. 때로 물잔 크기의 온더락(On the rock) 잔으로도 마시는 것은 얼음 혹은 비알콜 음료를 섞어 그 양이 많아지기 때문에 큰 잔을 쓰는 것이다.     


우리가 빼갈로 부르는 도수 높은 백주를 즐기는 중국인들은 도토리만 한 잔을 쓴다. 그 작은 잔에 목젖을 태울 만큼 높은 도수의 술을 따라 놓고 혀를 살짝 대었다 떼듯 미량만 마시면서 아주 천천히 잔을 비운다. 한국의 소주잔이 이보다 조금 크고 일본의 청주 잔은 이보다 조금 더 큰 중간 크기이다. 막걸리 잔은 커다란 사발이다. 한국의 전통 소주나 일본의 청주, 중국의 황주 등 쌀을 원료로 만드는 술은 50~60도로 데워서 마시는 것이 좋으므로 도자기 잔이 적격이다. 온도를 오래 머금을 수 있기에 그렇다. 금잔, 은잔은 그 잔들에 술뿐 아니라 명예와 권력도 담을 수 있다. 주석 잔은 맥주의 신선도를 잘 유지해 주는 성질을 갖기도 한다.


백자사기마상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한 때 혹은 특별한 상황에 맞춘 술잔도 있다. 전쟁 수행을 위하여 출정하는 군인이나 변방 국경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마상배(馬上杯)라는 술잔을 애용하였다. 말 위에서 술을 마실 때 쓰는 잔이라는 것일 텐데, 그것은 곧 ‘전쟁을 수행하는 자의 잔’이라는 의미가 된다. 술에 독을 타서 자신을 암살하려는 행위를 막고자 쓰는 술잔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코뿔소 뿔로 만든 서각배(犀角杯)다. 코뿔소 뿔은 찬 성질을 갖기에 해열제의 주요 성분이 되고 우황청심환 약재로도 많이 쓰였다. 여기에 강력한 해독 성분이 있기에 먼 옛날 보호를 받아야 할 고위직 사람들은 서각배를 애용하였다고 한다. 코뿔소 뿔이 귀해지면서 물소 뿔이 대용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그 약효는 십 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 순조 임금 때 궁중정재의 부흥을 일으켰던 효명세자는 진작(進爵)이라는 명칭을 처음 쓰면서 순조와 왕후를 위하여 잔치를 바쳤다. 진작은 술을 담은 술잔 작을 세 번 바치면서 작이 올라갈 때마다 정재를 시연하는 잔치다. 그 이후로 진작은 규모가 작고 의식 절차가 매우 간소화된 궁중 잔치로 자리 잡았다. 궁중 잔치 중 가장 규모가 큰 진풍정(進豊呈) 경우는 작이 아홉 번 올라간다. 아홉 작이 올라가려면 잔치는 거의 하루 절반 정도나 오래 진행된다. 작 한 번 올리고 나면 참석하고 있는 신료들에게도 일일이 새 술이 돌고 여기 안주까지 빠짐없이 제공된다. 그러고 나면 창사와 정재 등이 이어진다. 궁중 잔치의 진행 포인트로서 술잔을 상징적으로 내세운 것은 궁중 잔치를 일종의 정치적 제의로 여김으로써 왕권을 내세우기 위한 것 아닐까 싶다.


규모있는 제사에 쓰이는 술잔으로 종묘제례 때 쓰는 작(爵). 사진 국립전주박물관

      

도교의 성격을 들려주는 것 중에 ‘당기무(當其無)’가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으로 삼는 것은, 그 비어 있는 것으로 그릇을 쓸 수 있게 함이다. (중략) 차 있음 그 자체는 편리하다 하겠으나 비어 있음은 쓰임을 부른다.”의 ‘그 비어 있는 것’이 당기무다. 술잔은 평소에는 당기무 상태로 물러나 조용히 있으나, 때 되어 부름을 받고 앞에 나서 그 쓰임새를 발휘하니 차고 비움을 언뜻언뜻 보여주며 인간과 하나가 된다. 술꾼들이야 당기무를 생각하며 거듭 빈 잔에 술 채우기를 좋아하겠으나, 당기무라는 것이 무한 채움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각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적당히 하는 것, 그것이 도(道)이다.      


아름다운 건배는 술잔에 기쁨을 담는다. 사진 freepik.com


각박한 경쟁 구도와 일상의 스트레스에 쪄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렇듯이 행복보다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더 많은 삶에 그나마 힘을 실어주려고 정신적 안락함을 추구하는 취미 생활 등으로 탈출구를 찾는 것이 좋은 것이나, 때로 술 마시는 것으로 자위하거나 잠시나마라도 끔찍한 현실을 잊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그들의 손에 잡혀있는 것이 곧 빈 술잔이다. 그 당기무의 빈 잔 잡는 시간을 줄이고 일찍 일찍 내려놓아야 한다. 자칫 내려놓을 때를 놓치고 내내 ‘쓰임 부름’을 머리에 인 채 손에서 떠나지 않을 때의 당기무 술잔은 독배가 될 뿐이다. 

술자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술잔. 술잔이 술 마시는데 사용되는 도구로뿐만 아니라 생활에 멋을 더해 주는 장식물로, 또는 서로의 문을 열어 주는 상징물로 여긴다면 술자리는 더욱 푸근해질 것이요 그야말로 진정한 당기무 정신을 아로새기는 술잔이 될 것이다. 그런 때가 아니면 모름지기 술잔은 비어 있을 때가 아름답다.      



최정철 /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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