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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한국프로야구 개막과 현대판 지화자 낭자

세상을 여는 잡학

개화기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이 즐겼던 개인 운동으로는 각종 호신술과 씨름, 제기차기 등이 있을 것이고 단체 운동으로는 격구(擊毬)와 석전(石戰)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격구와 석전을 놓고 보면 한민족이 얼마나 격렬하고 호방한 기질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수천 년 동안 토착 농경민족으로 살아왔다 하여 그저 온순하고 조용한 행동 양식에만 갇혀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한국인에게 개화기 즈음 여러 신(新) 운동이 급물살로 찾아들었다. 정구, 농구, 배구, 축구, 야구, 당구 등 대부분 구기 종목이다. 한국인은 당연히 이것들을 열렬히 즐겼고 그 결과 지금까지 한국인의 구기 운동 실력은 전 세계를 호령해왔다. 그만큼 구기 운동을 좋아하는 한국인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야구에 특별히 열광한다. 한국인의 총애를 받는 그 야구가 며칠 후 프로야구리그 개막으로 다시 우리와 만난다.     

한국프로야구에는 기막힌 응원문화가 있다. 2007년 롯데 자이언츠 야구단 감독으로 부임한 미국 출신의 로이스터 감독은 사직구장에서의 첫 시합 때 부산 관중 응원 떼창에 기겁하고 있다. “이건 거대한 노래방이다.”라며 벌어진 입을 더 벌렸는데 그런 엄청난 응원 열기가 미국 야구에는 없고 한국 야구에는 있다는 것이다.

미국 야구 관중의 70~80%는 노인네들이다. 그래서인지 단체 응원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선수가 훌륭한 활약을 보일 때나 휘파람 내고 환호 지르는 정도다. 그 외는 시합 내내 타자 입장할 때, 스리 볼 투 스트라이크 볼카운트에서 투수가 공 던질 때, 혹은 장쾌한 홈런이 나올 때 정도에 맞춰 장내 효과음악이 울려 퍼지는 정도다.

일본 야구 관중은 그보다는 젊지만 역시 중장년층 위주라 단체 응원을 해도 그다지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 야구에는 브라스 밴드로 꾸린 연주단이 동원된다. 연주하는 것을 보면 한두 소절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곡을 끊임없이 지겹도록 반복 연주해댄다. 신명을 기대하기는 언감생심이다. 연주단과 함께 치어단도 운영되나 치어리더는 없고 그저 춤만 추는 댄스팀으로 보면 된다. 한국 야구에서는 대여섯 명의 치어걸들이 활동하지만, 일본 치어걸들은 30명 정도의 대규모 인원으로 꾸려진다. 이 떼거리 치어걸들은 얌전히 있다가 시합 중반 클리닝 타임 때 운동장으로 뛰어 들어가 군무를 춘다. 춤도 그저 고만고만한 수준이고. 전반적으로 일본 야구의 응원문화는 딱 정해져 있는 틀 안에서 움직이는, 짜 맞추는 듯한 그런 식이다. 대만 야구에는 치어걸만 있고 한국 형태를 따른다. 수준은 아마추어급이랄까 싶다.     

그렇다면 한국 야구 응원문화는 어떤가? 한 마디로 응원단과 관중이 하나가 되어 광적으로 놀아댄다. 치어리더의 강력한 액션과 슈퍼모델 귀 쌈 올려붙일 정도로 늘씬한 치어걸들이 깜찍 발랄 춤을 추어댄다. 치어단의 그런 열정에 신명 오른 관중은 목이야 터지건 말건 떼창을 하며 몸을 던져 응원한다. 2020년 한국 프로야구리그를 중계 시청한 미국인들이 이런 모습에 눈 뒤집히더니 미국 프로야구는 당장 한국프로야구를 배워야 한다고 만구동성(萬口同聲) 했다 한다.     

한국인의 응원문화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약 백 년 전이 되는 1925년 5월, ‘제5회 전조선(全朝鮮) 정구대회’가 당시 조선체육회 주최로 개최된다. 이때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와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간 정구 시합이 치러진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28년과 1929년 이 두 학교가 축구와 농구 종목으로 다시 자웅을 겨룬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이 두 학교 간 운동 시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연보전’이라는 명칭이 그로써 생겨났고 오늘날에는 연고전, 고연전으로 불리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태평양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굴곡을 겪었던 두 학교 간 운동 시합은 1965년부터는 연례적으로 치르는 정식 행사가 되었다. 이즈음까지의 응원 형태를 보면 징이나 꽹과리로 흥을 돋우거나 학교 교가를 부르는 식에만 머물렀으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응원 문화가 전개된다. 이 당시에 치어리더와 치어걸들이 등장한다. 이 치어단의 선도로 관중은 떼창과 격한 응원 동작을 전개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그때 많이 울려 퍼졌던 응원곡 중 하나가 바로 <아리랑 목동>이다. 이것을 시합장이 떠나가도록 부르면서 응원하는 학생들 전원이 어깨동무로 한 덩어리가 되어 좌우로 흔들어대거나 앞뒤로 꺼떡대면서 응원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하고 프로야구리그 출범에 맞춰 직업 치어단이 야구장에 모습을 보인다. 이 치어단은 일단 급한 대로 대학교 응원단 형태를 따른 것이었기에 초기에는 그 수준이 일천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 프로농구가 생기고 미국 프로농구 치어걸들을 빼어박은 듯한 치어걸들이 농구 코트를 누비기 시작했고 이때 즈음부터였는지 프로야구 치어단도 점점 세련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2년 고연전(연고전) 고려대 치어단. 사진 한국대학신문


서울시무형문화재 장안편사놀이. 사진 장안편사놀이보존회


이것이 한국의 현대식 응원문화가 생겨나고 발전해온 대략의 역사라면, 그렇다면 옛날에는 어땠을까? 백 년 전 개화기 때, 장안 기녀들이 ‘지화자 낭자’로 불리면서 각종 편사(便射. 활쏘기) 대회에 동원되어 지화자를 낭랑하게 외치고 춤을 추어 분위기를 돋우었다 한다. 당시 지화자 낭자들의 응원 방식은 다음과 같다. 대개 너 다섯 명 정도로 구성되어 일렬횡대로 서 있다가 궁사가 쏜 활이 과녁에 관중(貫中)하면, “지화자~!”를 외치고는 덩실덩실 춤추며 구슬이 쟁반 위를 구르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일 관중 이 관중 때는 장령산곡조(長靈山曲調)를 부르고 삼 관중 때는 염불곡(念佛曲)을, 사오 관중 때는 타령조(打令調)로 흥을 돋우었다.

이때 유심히 봐야 할 장면이 있다. 지화자 낭자가 춤추고 노래 부를 때 활을 쏜 궁사 역시 지그시 눈 감은 채 어깨춤을 슬쩍슬쩍 추며 관중의 기쁨에 취하는 것. 마치 신선이 노니는 듯한 이 장면은 곧 최치원이 주창한 동이족만이 즐긴다던 풍류도의 일면이다. 지화자 낭자가 풍류도의 일부 기능을 분명히 맡고 있으니만큼 그로써 풍류도로 하루해를 띄우고 지우던 신라 시대까지 우리네 응원문화를 소급해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이 지화자 낭자는 1983년 출범, 1990년대 초까지 잠시 선풍을 일으켰던 프로씨름대회에 등장하여서는 종목별로 장사가 탄생할 때마다 냅다 노래 부르며 춤추어대는 것으로 일반 대중에게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재연해 보이곤 했으나 그나마도 가수 김연자의 <천하장사 만만세> 뽕짝 노래에 밀리는 신세가 되더니 이제는 정통 편사 놀이에서나 어쩌다 볼 수 있다.                                                   

곧 한국 프로야구리그가 올해도 어김없이 시작할 것이고 현대판 지화자 낭자들의 멋진 춤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피로감으로 지친 국민에게 일상의 힘이 되어 주길 바란다.     


20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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