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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해치(獬豸)의 출현을 기다리는 대한민국

세상을 여는 잡학

살면서 불안함을 극복하고자 할 때나 어떤 행운을 바랄 때 인간이 취하는 행동 양식은 자고이래 동서 막론하고 신을 찾거나 점을 치는 것이다.

고대의 한국인은 자연재해와 전쟁으로부터의 목숨 보전을 바랄 때, 풍요를 바랄 때는 어김 없이 제단 차려 의식을 행했다. 현대에 와서는 대학교 입시 철마다 아들내미 딸내미 무사 입학을 빌고자 교회 절간 점집들 문턱을 열심히 닳아 없애고 있다. 인간의 본능이기에 비난할 바 아니다. 서양인들 역시 그러하다.

그렇듯 지구촌 인간들은 먼 옛날부터 신과 점을 만들어 그것에 복속하며 살아왔다. 인간의 창의력은 신과 점에만 머물지 않았으니 바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짐승들을 숱하게 만들어내고는 각각 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굳건히 신봉했음도 들여다볼 대목이다.     

전 세계 대륙에서 활동해온 대표적 상상 짐승들은 대략 4백여 종으로 추산된다.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의 상상 짐승 대표주자들로는 동방 수호신 청룡, 남방 수호신 주작, 서방 수호신 백호, 북방 수호신 현무를 비롯한 성군의 덕치를 상징하는 봉황, 태양 속에 살면서 삼신(三神) 일체를 의미하는 삼족오, 천하절색 달의 여신인 항아, 항아와 함께 달에 살면서 약 방아 찧어대는 월궁 토끼, 월궁 토끼의 단짝으로 재복(財福)을 가져다주는 삼족 두꺼비, 부부 사이 금실 좋아지게 하는 비익조(比翼鳥), 희소식을 물어다 주는 파랑새, 신선들과 노니는 선학(仙鶴), 쇠를 먹고 사는 불가사리(不可殺伊), 귀신 잡는 삽살개 천구(天狗), 세 개의 부리로 삼재를 쪼아 없애 주는 매인 삼두일족응(三頭一足鷹), 극락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인면조신(人面鳥身)의 가릉빈가(迦陵頻伽), 머리 둘 달린 새로 동쪽과 봄을 상징하는 청양(靑陽), 용처럼 생기고 꼬리와 머리가 여덟 개씩 달린 야마타노오로치 등을 들 수 있겠다.     

서양과 중동 아프리카의 대표 상상 짐승들로는 사람 골탕 먹이기가 취미인 님프, 이마에 외뿔 박힌 독각수(獨角獸) 유니콘,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람 현혹하여 사고 일으키게 하는 세이렌, 사자 머리로 봄을, 염소 몸통으로 여름을, 뱀 꼬리로 가을과 겨울을 상징하는 키메라, 빛나는 눈으로 자기를 보는 모든 존재를 돌로 만드는 메두사, 비열함과 탐욕의 화신인 귀가 긴 모습의 고블린, 몸무게가 1천 톤에 달하는 거인족 트롤, 7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해룡 리바이어던, 강의 요정 루살카, 좀비 등이 있다.     


해치 민화. 그림 가회민화박물관


동아시아 상상 짐승 중에는 해치(獬豸)가 있다. 해태로도 불리는 해치의 장기는 곡직선악(曲直善惡) 판단이다. 몸 전체가 푸른 비늘로 덮여 있고 겨드랑이에는 날개인 듯 깃털이 솟아 있으며 양의 발톱을 갖고 있다. 머리는 기린의 그것인데 서양의 유니콘과 같이 이마에 외뿔이 박혀있다. 성군이 생기면 봉황이나 용이 나타나지만, 해치는 법이 공정하게 처리되지 않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고 한다. 해치를 사법의 상징으로 여겼던 중국 초나라의 왕이나 사법 관리들은 반드시 해치 모양을 한 관(冠)을 썼다. 조선의 사헌부에서는 해치를 법수(法獸)로 삼았고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은 자신의 관복 흉배에 해치를 새겨넣었다. 1970년대 말까지 존재했던 법관들의 법모(法帽)도 해치 모양을 내고 있고 법복 가슴 쪽에는 노랗게 해치 모양을 수놓기도 했다.

중국 후한 시대부터는 궁궐이나 관아 입구에 해치 석상을 세워두고 출입하는 관리들더러 해치의 꼬리를 만지게 함으로써 관리들의 정신상태를 다잡고자 했다. 조선도 이를 따라 덕수궁 맞은편 지금의 웨스틴조선 호텔 자리에 있던 남별궁 입구에 해치 석상을 세워 그 의미를 좇았다. 해치는 도성뿐 아니라 지방 관청에도 필수로 세워졌던 듯하다. 충청도 홍주목(지금의 홍성군)의 동헌 입구에 해치 석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 증빙이다.

오늘날 국회의사당과 대검찰청 앞에 이 해치 석상이 세워져 있음은 사심 버리고 정의의 편에 서서 법을 만들고 집행하라는 표시일 것이겠으나 국회의원들은 저급한 정쟁 혈투에만 영혼을 바치고 있고 검찰은 기득권 세력과 야합하기만 하니 데면스레 서 있는 해치 석상에 부끄럽기만 할 뿐이다.

                                                

해치가 불과 관련된다는 얘기는 흥선대원군 때 생겨났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1864년) 다음 해부터 경복궁 중수를 개시하면서 올바른 치세를 다짐하는 용도로 광화문 앞에 두 쌍의 해치 석상을 세우도록 했다. 2년에 걸쳐 7,225칸 규모로 완공된 경복궁은 중수 공사 중에 잦은 화재가 발생했다. 당연히 민심은 흉흉해졌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묘수를 냈다. 한양 남쪽의 관악산이 경복궁 뒤를 감싸는 북악산보다 더 크고 높아 도성에 화기(火氣)를 드리울 수 있다는 그럴듯한 풍수적 해석과 함께 장차 해치가 관악산 화기를 덮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했다. 그로써 민심은 수습되었고 이후 해치가 불을 잡는다는 민속신앙이 생겨난 것이다.


구한말 경복궁 앞 해치 석상. 사진나무위키

                  

최근 LH공사 직원들이 신도시 개발 정보로 부동산 투기에 광분한 것이 시민단체의 고발로 만천하에 밝혀졌고, 그 때문에 공직자 대상 부동산 관련 전수 조사를 벌이고 보니 별의별 불법 투기 추행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음에 좁은 땅덩어리에 살면서 송곳 하나 뚫을 한 뼘 땅뙈기도 없이 사는 대다수 국민의 혈압 평균 치수가 한껏 오르고 있다.

그뿐 아니다. 지금 서울시가 치르고 있는 시장 보궐선거를 보면 이런 아수라장이 어디에 또 있으랴 싶다. 부산시의 시장 보궐선거 역시 막상막하요, 두 도시의 선거판에는 정책보다는 뻔뻔한 거짓말과 각종 음해가 활개를 치고 있다. 어느 청와대 주요 직 인사는 부동산 관련 위선 행각을 보이는 것으로 집권 말기의 정부를 그로기 상태에 떨어트려 놓기까지 했다. 이런 것들을 일일이 지켜보고 있자면 그저 곡직선악을 판결해 줄 해치의 출현만이 절실할 뿐이다.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선왕(宣王)이 애자(艾子)에게 해치에 관해 묻자 애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해치는 요순시대부터 있어 온 신령스러운 짐승입니다. 대개 신하들 가운데 사악한 행위를 하거나 사특한 마음을 먹는 자가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지금 세상에 그 짐승이 있다면 따로 먹이를 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당시 제나라 조정이 얼마나 부실하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인데, 아무렴 선왕이 해치를 몰라서 애자에게 물었을 것인가? 좌우에 둘러서서 듣고 있을 못난 신료들에게 경고하고자 했을 것이요, 현자였던 애자 역시 그 마음 충분히 읽었기에 피 토하는 심정으로 답을 올렸을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선악 기준을 상실했다.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고, 거짓과 악행도 열심히 우기기만 하면 진실이 되는 세상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곡직선악을 판단해 줄 해치가 나타나야 한다. 나타나도 한두 마리로는 결판나지 않을 것이다. 소모적 정쟁으로 국민 지치게 하는 함량 미달 국회의원들 집결지인 국회가 그 우선이라면, 검찰청, 법원, 전국 지자체 관공서, LH공사, 친일 극우 언론사 등이 2등 자리를 차지하고자 앞을 다툴 것인지라, 찾아다닐 해치들의 발걸음이 무척 바쁠 것이다. 해치가 군단으로 나타나도 수십 년은 배를 곯지 않을 곳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20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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