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고대부터 선신(善神)을 모시되 잡신과 악귀와도 공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어느 민족이나 각자의 벽사진경 문화를 전승하고 있다.
동양의 대표적 벽사진경 의식은 방상씨 탈에서 찾을 수 있다. 방상씨 탈은 중원의 황제 시대 때 등장하였다. 주희가 논어를 집대성하기 천 년 전에 약 20편 1만 2천 글자로 논어 초본을 정리한 동한 사람 정현은, “방상씨는 말로 이룰 수 없이 무서운 외모를 갖는다.”라고 전하고 있고, 주례(周禮) 기록에는, “방상씨는 미친 남자(狂夫) 방상씨로 불린다. 키가 크고 힘이 세다. 장례식에서 역신을 쫓아내고 귀신을 죽인다.”라고 하였다. 방상씨 탈은 네 개의 눈을 갖는다. 두 개는 이승을 살피고 다른 두 개는 저승을 살핀다. 그래서인지 방상씨 탈은 원래 장례 행렬 앞에서 잡신과 악귀를 쫓는 기능을 수행하였던 의장이었다가 주나라 때부터 궁궐에서 시행한 나례 의식 때 벽사의 의미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후한서』 <예의지(禮儀志)>에는 고대 중원의 나례 의식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지부터 세 번째 되는 미일(未日)을 납일(臘日)로 삼고 그 하루 전에 축역(逐疫)하는 큰 나례 행사를 치른다. 환관 집안 자제 중에서 10살에서 12살짜리 어린 진자(侲子) 120명을 선발한다.” 이 어린 진자들이 역신 역을 수행하는 것이고 이들을 내쫓는 연극이 나례 의식이었다.
방상씨 탈(국립중앙박물관 보유 국가민속문화재).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방상씨 탈이 한반도에 전래 된 시점은 정확하지 않다. 1946년 경주 호우총을 발굴할 때 방상씨 탈 조각이 발견되어 5세기 무렵 한반도에 전래 된 최고(最古)의 방상씨 탈로 여겼으나 복원연구 결과 도깨비 얼굴의 화살통으로 판명되어 아쉬움을 남긴 적 있다. 다만 고려 정종 6년, 고려 왕실이 중원의 나례 의식을 수입하였음을 전하고 있으니 방상씨 탈이 최소한 이때부터 한반도 땅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 때의 나례는 중원과 달리 진자 인원수를 조정하여 시행되었다. 『고려사』 <군례조(軍禮條)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 기록에 의하면 연말 납일이 되면 12살 이상 16살 이하 48명의 어린 진자를 선발하여 6명 단위의 24명을 1대로 삼아 총 2대를 꾸려 나례 의식을 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진자는 붉은 가면을 씌우고 붉은 고습(袴褶. 바지 위에 덧입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마복)을 입혔는데,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하회별신굿탈놀음에 등장하는 초라니가 바로 이 진자의 후예다.
고종 장례식 때 쓰인 방상씨 탈. 사진 나무위키
중원의 나례 의식에서는 북송 시대부터 방상씨 탈이 사라지나 한반도의 그것에서는 여전히 나례 의식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다. 조선시대 세종 임금 때 경복궁에서 행한 나례 의식을 살펴보면 규모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의식 전날이 되면 궁인들을 동원하여 궁궐 곳곳을 청소한다. 서운관(書雲觀. 기상 관측하던 기구)에서는 악공 22명을 선발한다. 이들 중 한 명이 방상씨 탈을 쓰고 검정 웃옷과 붉은 치마 차림에 곰 가죽옷을 걸친다. 오른손으로는 창을 쥐고 왼손으로는 방패를 잡는다. 악공 중 한 명은 창수(唱帥)역을 맡는다. 그는 가면을 쓰고 가죽옷 차림에 몽둥이를 든 채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운다. 방상씨 탈과 창수를 뺀 나머지 악공은 붉은 두건과 붉은 옷을 입게 하고 기수(旗手) 4명, 퉁소 4명, 북 12명으로 구성한다. 여기에 붉은 모자를 쓰고 소매 좁은 창옷을 입고 채찍을 든 12신 상징의 집사자(執事者) 12명을 따로 뽑아 방상씨 탈을 따르게 한다. 이들 36명을 총칭하여 나자라고 한다. 서운관은 이들과 함께 48명의 어린 진자들을 선발하여 붉은 두건과 붉은 옷을 입힌다. 의식이 시작되는 새벽이 되면 관상감(觀象監. 천문지리 기후 관련 일을 맡아보던 기구) 관원이 나자를 이끌고 근정문 밖에 이른다. 승지가 임금에게 역신을 쫓기를 임금에게 아뢴다. 임금의 윤허가 내려지면 창수의 주문 선창과 방상씨 탈 외 나자의 복창이 진행된다. “갑작(甲作)은 흉한 것을 잡아먹고, 필위(胇胃)는 호랑이를 잡아먹고, 웅백(熊白)은 귀신을 잡아먹고, 등간(騰簡)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잡아먹고, 남제(欖諸)는 재앙을 잡아먹고, 백기(伯奇)는 꿈을 잡아먹고, 강량(强梁)과 조명(祚明)은 함께 책사와 기생을 잡아먹고, 위수(委隨)는 관을 잡아먹고, 착단(錯斷)은 큰 것을 잡아먹고, 궁기(窮奇)와 등근(騰根)은 함께 뱃속 벌레를 잡아먹는다. 대저 열두 신을 부려 흉악한 악귀들을 내쫓고 너의 몸을 으르고 너의 간과 뼈를 빼앗고 너의 살을 도려내고 너의 폐장을 꺼내게 할 것이니, 네가 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열두 신들의 밥이 되리라!”
이 말을 들은 역신 역의 진자들은 조아려 절 올리며, “잘 알았습니다.” 하면 악공이 크게 연주하고 집사자들은 진자들을 앞장세워 행진한다. 광화문 밖에 이른 이들은 4대로 나뉘어 궁궐 사문(四門)으로 흩어진다. 사문에 이르면 봉상시(奉常寺.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던 기구) 관원인 축사(祝史)가 축문을 외고 봉상시 관원 재랑(齋郞)이 산 닭을 찢고 술을 부은 후 예감(瘞坎. 각 성문 오른 쪽에 임시로 판 구덩이)에 묻는다. 그것으로 나례 의식을 끝낸다. 나례 의식은 궁을 정하게 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던 의식이었기에 민간에서도 그 뜻을 좇아 널리 행하여졌다. 세밑 날이 되면 부엌을 손보는 등 집 안팎을 깨끗이 하고는 자시를 넘겨서는 마당에 불을 피워 폭죽놀이로 집 안에 있을 잡귀를 내쫓았다.
구한 말 새해를 맞이하여 광화문에 금갑장군을 그린 벽사 문배도가 걸려있는 모습. 우측의 금장군 갑장군 문배도는 안동 풍산 류씨 본가 소장품. 사진 문화재청
서양의 대표적 벽사진경 의식이라면 핼러윈일 것이다. 핼러윈의 기원은 기원전 25세기 무렵부터 시작되는 고대 아일랜드 켈트족의 사매인(Samhain)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새해는 11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새해 전날인 10월 31일 밤이 되면 각종 유령과 마귀, 잡신이 찾아와 산자의 몸에 들어가 다음 해에 부활한다고 믿었다. 그 사악한 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동물 가죽을 뒤집어쓰거나 흉측한 가면을 쓰고는 온 마을에 장작더미 불을 피웠다. 사매인 문화에는 죽음의 신에게 인신(人身) 제사를 올리는 풍속도 있었다. 훗날 로마제국이 유럽을 석권하면서 기독교 문화권에 켈트족의 사매인 문화가 역으로 광범위하게 스며들었다. 9세기 중반 무렵 교황 그레고리 4세는 켈트족의 인신 제사 악습을 차단하고자 백 년 전 보니파티우스 4세가 만성절(All Hollows’ Day)로 정한 5월 13일을 켈트족의 새해 첫날인 11월 1일로 바꾸고는 그 전날인 10월 31일을 전야제(All Hallows Evening)로 삼아 가톨릭의 죽은 자 숭배일과 인신 제사를 배제한 사매인 풍속을 통합하였다. 이후 인신 제사 문화는 자취를 잃어갔고 그 대신 핼러윈 문화가 벽사의식 풍속으로 퍼져 오늘날 전 세계인이 즐기는 축제로까지 발전하였다.
핼러윈의 상징 호박귀신 탈. 사진 KBS TV News 화면 갈무리
지난 핼러윈 때 이 땅의 어느 곳에서 젊은 국내외 젊은이들이 축제를 즐기던 중 무려 156명이나 압사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 대통령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마지못해 어느 종교 행사에서 사과하였고, 담당 업무를 소홀히 한 해당 기관들은 서로 책임 전가를 할 뿐이요, 집권당은 생뚱맞게 전 정권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수습보다는 외면과 책임 회피가 우선인 그들을 보면 그들이 이 시대의 역신 잡귀들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한국인은 벽사진경 풍속 대부분을 잊고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의 멸망과 함께 이 땅에서 사라진 나례 의식이 이 땅의 역신 잡귀들을 볼 때마다 굴뚝같이 생각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