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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강원도 차이나타운과 고고려(古高麗)

세상을 여는 잡학

고구려 명칭은 해부루 아들인 해추모(BC 37년 오녀산성에서 왕 즉위 후 성을 高로 개칭)의 뒤를 이은 유리가 압록강 상류 지역에 있던 초기 현도 군의 고구려 현을 정복한 이후부터 기록에 보인다. 이때가 대략 BC 107년경이다. 고구려는 무슨 뜻의 국호일까? 이두 표기일 고구려는 글자를 나누어 풀어야 한다. 고(高)는 높다, ‘위대하다’라는 한자 뜻을 취한다. 구려(句麗)는 골(고을)의 어원이라 할 구루 구리의 한자 음차 표기다. 구루나 구리는 고구려말로 성(成)이다. 옛날의 골은 성으로 발달했기에 고을과 성은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크고 위대한 성(大成), 즉 크고 위대한 나라(大國)의 뜻을 갖는다.    

 

730년경 돌궐 지도자 이스타미의 장례식에 동쪽에서 배크리 조문단이 왔다는 내용이 저네들 비문(碑文)에 전해지고 있다. 배크리는 맥구리, 즉 고구려 중심 종족인 맥족의 구리다. 프랑스 사학자 폴 펠리오가 파악해 낸 고대 둔황 문서에는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가우리(Keuli)로 부른다는 내용이 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조선족과 한국인을 비하할 때 가우리 빵즈(고려 몽둥이)를 입에 담는다. 당 군사들이 안시성에서 참패당하고 패퇴할 때 악착같이 추적하던 가우리 군사들의 박달 몽둥이에 의해 끔찍한 환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런 전설이 담긴 이 말에 가우리 발음이 살아있다. 구려가 구루 구리의 한자 음차라면 역으로 가우리 발음에 맞는 한자를 챙기면 고려(高麗)가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고구려의 ‘구’가 묵음으로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리’를 표기하는 한자 려(麗)는 나라를 뜻하기에 ‘구’가 없어도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한편, 옛 이두는 대부분 복수의 의미를 취한다. 크고 위대한 나라인 고려는 ‘세상의 중심 나라’ 뜻도 포함한다. 가우리를 다른 각도로 풀면 가우(중심) 리(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는 세상의 중심 나라가 되고 이 뜻을 한자로 표기하면 중국(中國)이다. 일본 건국 신화에도 중국 명칭이 등장한다. 따라서 일본도 한때는 저네들이 세상의 중심 나라이기를 바랐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역시 19세기 응웬(茹阮) 왕조 때 중국 명칭을 내세웠다. 그런 만큼 세상의 모든 나라는 자존감의 표현으로 저네들이 ‘중국’임을 강조한 것이다. 


중원 땅에서의 중국 명칭은 1948년 마오쩌둥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비로소 등장하고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3백여 개 나라 중 어느 나라도 중국 명칭을 정식 국호로 쓴 나라는 없으나 개념적으로는 먼 옛날부터 저네들이 중국이었다. 기원전 11세기경 주(周) 나라에 국호가 아닌 중국이라는 표기가 등장했고,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에도 중국이라는 표기가 있음을 보면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 베트남 쪽이야 훗날 얘기지만 어쨌든 중국인들은 당시 저네들과 패권을 다투던 가우리를 중국으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우리를 뜻글자 ‘중국’ 대신 소리글자 ‘고려’로 부르고 표기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심히 가는 것이다.     

이제 백제와 신라 국호들과 비교해 보자. 백제 원 명칭은 십제(十濟)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열 개의 집단이 왕을 모시고 세운 나라’로 해석했다. 이런 황당한 해석의 출처는 『수서(隋書)』다. “많은 무리가 건너가서(百家濟海) 나라를 세웠으니 백제(百濟)라 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억지에 김부식의 무식함이 더해진 것이다. 십제는 백제식 이두 표기다. 열 십(十) 건널 제(濟), ‘열린 나라’, ‘나라를 열다’라는 뜻이다. 열은 또 아리(크다)와도 연관되기에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위례라는 이두 표기도 열, 아리와 직결한다. 동이족이 대개 나라를 칭할 때 ‘리’를 썼음에도 왜 백제인들은 ‘건너다’를 나라의 뜻으로 삼았을까? 강을 건너야 교류할 수 있다. 즉 인적 물적 교류의 채널인 강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동서 막론, 웬만한 나라들은 강을 끼고 발전했다. 백제인들이 강을 건너는 제(濟)를 나라 뜻으로 취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훗날의 백제 명칭에서 ‘백’은 ‘밝고 큰’의 백제식 이두 표기이기에 나라 명칭 뜻이 개국 이후 진일보한 것인데, 백제인들이 그런 뜻으로 백제라 내세운 것을 백제식 이두를 모르는 중국인들이 수서에 가소로운 해석을 얹은 것이다. 

신라 역시 신라식 이두 표기다. 일찍이 신채호는 ‘신(新)’은 동이의 고어로서 ‘가장 높은’ 뜻이라고 했다. 진한의 진(辰)도 신의 또 다른 한자 음차 표기다. ‘라’는 신라식으로 나라다. 따라서 신라는 ‘가장 높은 나라’ 뜻인 것을 중국인들은 그저 겉으로 드러난 한자 뜻만 좇아 ‘새로운 나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중국인들은 백제와 신라 표기는 원래 뜻을 모르다 보니 단순한 한자 뜻으로 받아들였으나 가우리만큼은 그 속뜻인 ‘중국’을 피하고자 발음으로만 받아들여 ‘고려’라 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땅은 넓어도 심성은 밴댕이 소갈딱지다. 저네들의 어쩌지 못하는 체면 문화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 체면 문화의 발원에는 공자가 중원 땅의 역사 기록법으로 정착시킨 춘추필법(春秋筆法)도 크게 한몫한다. 첫째, 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는 낮게 다룬다. 둘째, 상내약외(詳內略外). 중국의 일은 자세히, 외국은 간략히 쓴다. 셋째, 위국휘치(爲國諱恥). 자기 나라를 위하여 수치스러운 일은 숨긴다. 이 춘추필법에 탄력받은 중국인들은 그 빗나간 체면 문화에 빠져서는 주변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 국호가 조금이라도 심기에 거슬리면 무조건 깎아내리거나 빼앗아 소유하려 드는 것이다.

                                                                      

장수태왕비에 새겨진 ‘고려태왕’ 각자.. 사진 충주고구려비 전시관


5세기 말 장수왕은 고려를 공식 국호로 삼았다. 한반도 남진 정책을 완료한 장수왕은 충주 땅에 세운 비석에 자신을 분명하게 ‘고려태왕(高麗太王)’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왕건 고려와의 명칭 중복을 피하려고 옛 고려를 고구려로 삼국사기에 표기하고 말았다. 차제에 이 고구려 명칭을 재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장수왕이 국호를 고려로 정했으니 추모 때의 고구려는 고려로 소급해야 일통(一統)으로 맞게 된다. 영문 표기 ‘Korea’도 고려에서 나왔으니 고려 명칭이 대표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면 김부식의 염려와 같이 중복의 불편함이 따른다. 그렇다면 이성계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 조선을 고조선(古朝鮮)으로 부르듯이 추모의 고려는 고고려(古高麗)로 부르면 된다. 곁들여 광개토대왕비처럼 충주고구려비를 장수태왕비로 명칭 변경하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한때 고고려 땅이었던 강원도에 차이나타운이 들어설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해 국민 60만 명이 거세게 반대하며 도지사 탄핵을 주장하고 나섰다. 도지사가 되어 도내에 차이나타운 세우는 것으로 가뜩이나 중국의 한민족 역사문화 탈취 행각에 분노하고 있는 국민감정에 기름을 붓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뿐 아니다. 평창동계올림픽 때 시설 개선 명목으로 개최지역 일대 모든 식당 내부를 좌식 구조로 획일 시켜 수많은 해외 관광객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한국 문화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지 않나, 춘천의 선사유적지인 중도(中島)를 허물고 레고 랜드를 세우도록 하고 있기도 하다. 관백(官伯)이 되어서 향방(鄕房)은커녕 방자(房子)도 하지 않을 짓들만 분주히 골라 하고 있으니 분명 나라의 병부(病夫)다.

                               

202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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