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를 이루는 구성원, 국민은 무엇으로 일체감을 가질까? 고대 국가의 집권자는 자신이 지배하는 백성들 간에 일체감을 드높이고, 백성들 스스로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도록 해줌으로써, 대내적으로는 갈등을 무마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가 간 대립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했다. 집권자는 어떤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했고, 정치적 판단의 수행 수단으로 어떤 문화적 집단 행위를 제시했다.
2024 파리 올림픽 대회. 사진출처=Olympics.com
고대 한민족 국가들의 집단 행위는 범국가적 축제였다. 새해가 되면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를, 봄에는 농번기의 고단함을 달래는 축제를, 가을에는 수확의 기쁨을 즐기는 축제를, 세밑에는 한 해의 묵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축제를 즐겼다.
고대 서양의 대표적 집단 행위로 검투 경기를 들 수 있다. 로마 제국은 점령지마다 콜로세움을 짓고 노예들을 검투사로 양성, 기회만 되면 시민을 모아 놓고 격렬한 검투 경기를 시행했다. 비용 전액을 대며 검투 경기를 자주 개최하는 지도자는 인기를 얻어 권력을 유지했고, 공짜 참관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검투 경기에 열광하면서 자신이 속한 제국의 힘을 만끽하는 것으로, 너나 하나가 되었다. 검투 경기는 제국 로마를 존속시키는 데 지대한 힘이 된 것이다.
22~23 ChampionsLeague 우승. 사진출처=UEFA.com
오늘날 유럽은 축구 대회로 그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국가별 리그를 두어 1년의 절반에 축구 경기를 운영, 자국 도시 간 자존심 건 경쟁 구도로 도시들마다의 단합을 유지한다. 자국 리그가 끝나면 이제 유럽 전역의 도시들이 맞붙는 유로파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라는 양대 축구 대회로 전 유럽을 들끓게 만든다. 동서양 구분이야 두지 않는다 해도 서양권이 더 열기를 띠는 국가 간 축구 대회, 월드컵 대회는 그야말로 국가들의 운명을 가를 정도로 거대한 열탕이 되어 일시 일거에 각 나라의 국민을 하나로 묶어준다.
이제 곧 파리에서 개최될 올림픽 대회도 월드컵 축구 대회 못지않은 준수한 효과를 내는 집단 행위다. 올림픽 대회는 참가에 의미를 둔다는 말, 그저 점잔 빼는 말에 불과하다. 막상 시합이 시작되면, 선수들은 목숨 걸고 달려들고 국민은 목에 핏대 열심히 세우며 열광 응원하면서 철저하게 하나가 된다.
오늘날 한국에는 구성원을 하나로 묶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집단 행위로, 서양에서 생겨난 도시 간 국가 간 축구 대회와 맞먹을 정도의 문화적 집단 행위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먼 고대 때 강력한 세시 문화를 누렸던 한민족은 이제 집단 행위로서의 축제다운 축제를 품고 있지 않다.
대한민국 축제의 가장 큰 숙제는 획일성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사진출처=나무위키
4년 단위로 불타올랐다 스러지는 월드컵 축구 대회나 올림픽보다는, 언제든 간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아니면 계절별로 국민을 위로하고자 할 때, 국민을 하나로 묶는 그런 ‘나라 잔치’가 절실하다. 고대 조상님네들의 천제를 소생시킬 필요 없다.
큰 동굴 찾아가 수신(隧神·고구려에서 숭배되었던 신) 세워놓고 치르는 고구려의 국중대회(國中大會)에 눈길 줄 필요 없다. 국운 번영 기원의 고려 팔관회를 재연하자는 것이 아니다. 명나라 사신도 턱 빠지도록 부러워했던 조선의 대동강 뱃놀이를 구현하자는 것 또한 아니다. 21세기 한국인의 시의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하자는 것이다.
대표적 일탈 유희성 축제인 보령머드축제. 사진출처=보령머드축제
고작 검투 경기를 국가적 집단 행위로 즐긴 유럽 땅에는 이제 나라마다 도시마다 강력한 축제문화가 즐비하다. 그런 것을 보면 지금의 한국이라는 나라는 비참할 정도로 축제 빈곤국이다. 해마다 약 2천 개 정도의 축제가 이 땅에 시행되지만, 무엇 하나 축제다운 축제를 찾아볼 수 없는, 전 축제의 획일화, 붕어빵 축제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제라도 이 땅에 규모감 있고 내용 훌륭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구가할 수 있는, 해외 사람들이 몰려와 신명내며 즐기는, 그런 멋진 ‘나라 잔치’가 있으면 좀 좋을까 싶은데, 위정자나 관료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귓등으로도 얘기 듣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