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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남원 광한루원의 신선 세계

세상을 여는 잡학

전라북도 남원에는 유명한 것이 있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한민족 전통 정원인 광한루원(廣寒樓苑)이 그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남원 하면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광한루만 떠올리겠으나 광한루는 광한루원의 부속 건축물이지 주인공은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종 원년인 1418년 황희가 이 남원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유배를 보낸 임금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이었다. 태종이 세자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새로 삼으려 할 때 황희는 장자 계승을 주장하며 끝까지 반대했다. 이에 화가 뻗친 태종이 황희를 유배 보낸 것이다. 그렇게 남원으로 유배 떠난 황희는 그곳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한 정자를 찾아 산책하기를 즐겼다. 황희는 그 정자를 광통루(廣通樓)라 이름 지어가며 좋아했다. 황희가 광통루를 즐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상왕으로 물러나던 태종의 조언으로 세종이 황희를 불러올려 영의정으로 삼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지난 세종 26년인 1444년 정인지가 남원에 전라 관찰사로 부임한다. 정인지 역시 풍류께나 즐기다 보니 광통루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광통루를 개명까지 하는데 달에 사는 중국 신화 속의 미녀 항아를 빗대어 광한루라고 짓는다. 달에 있는 궁을 광한전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름 지어진 광한루가 지금까지 6백 년 동안 이어지는 것이고. 광한루가 그런 식으로 내력이 바뀌었다면 광한루원 전체가 진정한 면모를 갖추는 일이 일어난다.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고자 어렸을 적 동무 사이였던 선조에게 지문을 닳아 없앤 아부꾼이었고, 문장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세계적 가사 문학의 꽃을 피웠던 천재 글쟁이이기도 했던 정철. 임진왜란 직전인 1589년 건국 이래 최대 역모 사건으로 부쳐진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자 선조는 낙향해 있던 정철을 한양으로 불러올려 역모 사건 조사의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이에 정철은 무려 천 명이나 되는 선비들을 참수하고 만다. 이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망나니 정철이었건만 그에게는 글재주뿐 아니라 대단한 풍류 끼가 있었다.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8년 전 1581년 전라 관찰사로 남원에 부임한 정철은 곧바로 광한루원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그렇게 하여 광한루원은 정철의 풍류적 정수가 올곧이 반영된 새로운 정원으로 거듭나게 된다. 

정철은 먼저 광한루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는 그 은하수를 가로지르는 오작교를 만들었다. 이것부터 기가 막힌 발상인데 한술 더 뜬 것이 바로 이 연못 안에 세 명의 신선이 각각 따로 사는 세 개의 섬 삼신도(三神島)를 만든 것이다. 삼신도는 산동 반도와 발해만 동쪽 해상에 있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로 각각 불리는 섬들로 도교 신선 사상의 소산물이다.             


일찍이 중원 땅에 서복이라는 방술사가 있었다. 그는 봉래 방장 영주 삼신도에 신선들이 불로초를 먹으며 살고 있다는 말을 진시황 영정에게 이른다. 귀가 솔깃해진 영정은 서복에게 막대한 자금을 내주며 반드시 불로초를 구해오라 한다. 그러나 서복은 삼신도 대신 제주도 서귀포나 일본 땅을 넘나들며 잘 먹고 잘살다 죽는다. 훗날 영정이 분서갱유로 근 오백 명이나 되는 방술사들을 공연히 죽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복 이야기가 생겨날 정도로 삼신도는 도교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이라 할 것이고 그런 삼신도를 광한루원에 재연함으로써 광한루원을 명실공히 최고의 정원이 되게끔 한 정철의 도가적 풍류를 누가 따르랴 싶다. 삼신도를 구현한 정원은 이미 오래전 있었다. 한나라 무제 때 황궁 정원인 상림원(上林苑) 태액지(太液池)에 최초로 삼신도가 들어섰다. 그 조경문화가 약 7백 년 정도 지나 한반도에 수입되어 한반도 최초의 삼신도 정원이 생기고 있으니 바로 634년 백제 무왕이 부여에다 지은 망해루원(望海樓苑)이 그것이다. 망해루원은 오늘날 궁남지로도 불린다. 망해루원 다음으로 신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기념한다며 674년에 완공한 경주 안압지가 뒤를 잇는다. 조선의 남원 광한루원이 그 세 번째가 되는 것이고. 물론 망해루원이니 안압지니 광한루원이니 하는 것들만 삼신도를 구현한 정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곳곳에 있었을 삼신도 정원들을 대표하여 만들어진 것이 정철의 남원 광한루원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땅에 삼신도를 갖춘 정원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음이 그 증거가 된다.


한나라 상림원 태액지. 사진 baidu.com


그에 반해 삼신도 정원 문화의 본향이었던 중원 땅에서는 이제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정부가 정한 중국 4대 정원이 있다. 강소성 소주의 졸정원(掘庭園)과 유원(留園), 북경 이화원(頤和園),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다. 이 4대 정원에는 삼신도가 보이지 않는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나 연못 가운데에 전각 혹은 정자들이 있을 뿐이다. 어쩌다 기암괴석이 들어선 정원도 있는데 기암괴석도 도교 문화에 속하긴 한다. 그러나 다리든 전각 정자든 같은 도교 문화 인자인 기암괴석이든 삼신도와는 거리가 멀다. 중국에서 생겨난 삼신도 조경문화가 한반도로 이주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현상은 삼신도 구현의 중요성보다는 그 멋스러움을 일상화하며 즐기는 한국인의 풍류를 더 생각하게 한다.      


광한루원의 방장도와 봉래도(윗쪽 사진), 영주도(아랫쪽 사진). 사진 최정철



삼신도 얘기를 떠나 광한루라는 명칭에는 한국인만의 정서가 담겨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의 조경문화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바로 월궁조원(月宮造園)이다. 한국인의 조경문화에는 달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비록 중국 미녀 항아가 세 들어 사는 달이지만 그런 달을 우리네 정원이 전유물로 삼고 있음이다. 월궁 광한전을 딴 광한루 명칭도 그렇고 광한루원 정문인 청허부(淸虛府)는 달에 있는 월궁 광한전에 들어서는 문인 청허부 이름 그대로이다. 달에 있는 계수나무를 빗대어서 광한루 현판을 계관(桂觀)이라고 부르고 지금은 마모되어 없어졌으나 토끼와 함께 달에 사는 두꺼비 모양을 낸 두꺼비 석상을 은하수에 걸린 오작교에 두기도 했다. 달과 노닌다는 이름의 완월루(玩月樓) 또한 달과 직결된다. 삼신도와 월궁의 조화는 신선 사상을 앞세운 도교 문화를 수용한 한국인의 뛰어난 창의력과 강한 문화 주체 정신을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월궁 조원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 정원 조성 기법 중에 차경(借景)이라는 것도 있다. 집 바깥의 멋진 주변 경관을 내 집 안으로 들이는 방식인데 바깥의 경관을 인위적으로 집안으로 들인다는 것이 아니다. 내 집의 정원 경관과 담장 바깥의 경관을 조화시키는 방식을 말한다. 한국인은 자연과의 비 인위적 접화(接化)를 추구한다. 그래서 자연을 즐기려면 자연을 찾아간다. 그러나 하고한 날 멀고 먼 길 나서 자연을 찾아갈 수만은 없으니 차경이라는 방식으로 자연을 찾아 나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는 것이다. 눈만 돌리면 산이요 강이 있는 곳이 한반도 땅이다 보니 차경 방식의 조경문화가 자연스럽게 발전했을 것이다.     

삼신도를 연못에 만드는 것은 분명 인위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삼신도를 둠으로써 그것에서 피어나는 신선 세계를 즐기려는 한국인의 고단위 풍류를 놓고 본다면 연못에 신선도를 두는 것쯤이야 인위적이다 아니다를 따질 게재 아니다. 신선 세계를 만나려면 시간 내어 광한루원을 찾아가 보길 권한다.


202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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