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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한국인의 이상향(理想鄕)

세상을 여는 잡학

‘산 너머 고개 너머 먼 하늘에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아, 나는 남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 산 너머 고개 너머 더욱더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독일 시인 칼 부세가 쓴 <저 산 너머>라는 시다. 주디 갈런드는 <Over the rainbow>로 무지개 너머에 있을 가고 싶은 나라를 노래했다.

고개 너머 먼 하늘과 가고 싶은 나라는 곧 이상향이다. 서양인들이 예부터 갈망했던 이상향의 원조는 플라톤이 언급한 ‘이상 국가’다. 이 이상 국가는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지중해를 벗어난 미지의 서쪽 바다에 있을 아틀란티스 대륙이 자신이 이르는 이상 국가라고 정확하게 지목하고 있다. 물론 현대 고고학자들이 아틀란티스를 지금의 크레타섬으로 비정하기에 그 환상은 깨지고 말았으나 아틀란티스는 오랜 세월 동안 유럽인의 이상향으로 굳건한 자리를 지켜 내렸다.      


1516년 영국 성직자이자 작가인 토머스 모어가 새로운 이상향으로 ‘유토피아’를 내세웠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 ‘ou(없다) topos(장소)’로 만들어진 단어이니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유토피아라는 새 좌표가 등장하자 1602년 이탈리아 철학자 토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Civitas Solis)』, 1759년 볼테르의 『캉디드(Candide)』에 나오는 ‘엘도라도(El Do rado), 1872년에 발표된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에레혼(Erewhon. *Nowhere를 거꾸로 표기한 것)』’,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주장한 ‘파티소크라시(Partisocracy. 이상적 평등사회)’ 등이 줄줄이 출현했으나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이상향의 대표주자로 쳐주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서는 새로운 이상향이 등장한다. ‘샹그릴라(Shangri-La)’다. 샹그릴라는 1933년 영국 작가 제임스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 소개되고 있다. 힐턴은 샹그릴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콘레이 일행이 북인도로 가던 중 비행기가 불시착하여서는 ‘카리칼라(Karikala. 푸른 달)’라는 계곡의 거대한 설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설산 안에 샹그릴라로 불리는 마을이 있고 그곳 사람들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사는데 대단히 높은 문화를 즐기면서 근심 고통 없이 천천히 늙어 거의 불멸의 삶을 산다. 샹그릴라는 그야말로 행복과 평화만 넘치는 불로장생의 천국인 것이다. 소설이 공전의 인기를 얻으면서 유토피아가 갖고 있던 이상향 지위를 자연스럽게 샹그릴라가 물려받았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파라다이스’는 봐서 사람 살기 좋겠다 싶은 곳이면 마구 갖다 붙이는 이름인지라 그 신비로움이 샹그릴라보다는 덜 하다. 티벳인들은 샹그릴라가 저네들 전설의 도시 ‘샴발라(Shambhala)’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산스크리트어로 ‘고요한 평화의 땅’의 뜻을 갖는 샴발라는 중앙아시아 어디인가에 있을 지하 왕국 아갈타의 수도다. 아갈타 왕국은 거인족 하이프로빈(Hyprobean)이 통치하고 사시사철 세상이 늘 푸르며 심신 고통이 없는 낙원이다. 티벳 불교 확립 전부터 고대 문헌에 등장한 샴발라는 티벳 불교가 확립된 이후에는 불교의 이상 세계인 ‘정토(淨土)’로 승화되었다. 

티벳에는 샴발라 외에도 ‘우타라쿠르(Uttarakuru)’라는 낙원도 있다. 이곳은 불교 초기 경전 『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 언급된 곳으로 티벳 북쪽의 수미산 안에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혼인 풍속이 없는 대신 남자와 여자는 프리섹스를 구가하여 후손을 만든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수명 수천 년의 인생을 살고.


중국에는 티벳 보다 훨씬 많은 이상향이 있다. 『산해경(山海經)』의 ‘옥야(沃野)’, 『시경(詩經)』의 ‘낙토(樂土)’, 도교의 ‘동천복지(洞天福地)’와 ‘봉래국(蓬萊國), 『열자(列子)』의 ‘화서씨(華胥氏)의 나라’, 『도화원기(桃花源記)』의 ‘무릉도원’, 『유명록(幽明錄)』의 ‘천대산(天台山)’, 『요재지이(聊齋志異)』의 ‘안기도(安期島. 조선의 연안 섬)’ 등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중국인들은 이 중 4세기 사람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의 ‘무릉도원’을 저네들의 대표적 이상향으로 친다. 여기에는 중국인 특유의 은일(隱逸) 사상이 개입되기 때문 아닐까 싶다. 세상을 멀리한 채 어떤 속박도 없이 안온하게 살고 싶다는 도교적 관점이 그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대 중국 땅은 전쟁으로 해를 띄우고 지우면서 숱한 나라들의 흥망이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곤 했으니 세상사 시끄럽고 허무하기만 한지라 그저 속세를 떠나 마음 편히 사는 것을 꿈꾸었을 것이다.      


한국인의 이상향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서양인의 이상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티벳인의 이상향은 전설에만 존재하며, 중국인의 이상향은 소설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음에 반해 한국인의 이상향은 현실에 실재한다. 신비로움 같은 것은 있을 리 없다. 

한국인이 품고 있는 이상향은 십승지(十勝地)로 병란과 기근, 역병을 피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곳이다. 이 십승지 명칭은 『정감록(鄭鑑錄)』 <감결(鑑訣)>에 등장하나 이미 많은 풍수 학자들이 한반도 땅 이곳저곳을 지목하며 ‘명당(明堂)’, ‘낙토(樂土)’, ‘길지(吉地)’, ‘복지(福地)’, ‘가거지(可居地)’ 등을 말해왔고, 『운기귀책(運奇龜策)』, 『유산록(遊山錄)』, 『징비록(懲毖錄)』,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祕記)』, 『도선비결(道詵祕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도 십승지 관련 얘기가 두루 보인다. 그런 땅들이 두서없어 보였는지 조선 중기 사람 남사고가 <남사고산수십승보길지지(南師古山水十勝保吉之地)>로 일대 정리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책 표지. 유토피아가 초승달 형태다.


남사고가 정리한 십승지. 그래픽 최정철


산수십승보길지지로 열거된 곳은 다음과 같다. 경북 영주 풍기의 소백산 아래 금계리, 경북 봉화 화산 소령의 태백산 아래 춘양면 석현리, 경북 예천 금당동 북쪽 금당실 마을, 경남 합천 가야산 아래 만수동 일대 이백 리 이내, 충북 보은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 화북면 화남리 일대, 전북 남원 운봉읍 일대, 충남 공주 유구와 마곡 두 물길 사이 백 리 이내, 전북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근처, 전북 부안 호암 아래 변산 동쪽 땅, 강원도 영월 정동 상류 땅 등이다. 남사고의 십승지에는 이런 특징이 있다. 첫째, 십승지가 지목하는 곳이 모두 한반도 허리 아래쪽에만 있다. 둘째, 부안 변산반도 땅을 제외하면 모두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셋째, 큰 길이 있는 대처는 절대적으로 피하고 있다. 

한국인에게 십승지가 형성된 것은 예부터 나라가 전쟁 등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을 때 백성을 살뜰히 보호하지 못했기에 백성들 스스로 각자도생하여 살 방도를 직접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병란은 한반도 땅에서 일어난 내전 성격이었기에 굳이 백성들이 집을 두고 피난할 필요까지는 없었으나, 고려 시대 때는 왜구 거란족 몽골족 등 외부 종족들이 침탈해 오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임진왜란에 병자호란까지 겪고 보니 비로소 십승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확고해진 듯하다. 


서양인은 꿀과 젖이 흐르는 이상향을, 티벳인은 애욕을 즐기고 고통 없이 천년 장수하는 이상향을, 중국인은 황금이 넘쳐나거나 혹은 속세를 떠난 별천지 같은 이상향을 꿈꾸었다면 한국인은 필요 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닌 그저 환란을 피해 목숨 부지만 하면 좋은, 말 그대로 피난처가 되는 소박한 이상향을 원했다.      

치열한 경쟁과 각박한 삶에 지친 현대인의 이상향은 어디에 있을까? 속세를 떠난 먼 곳에서 찾을 것 없이 그저 지친 심신 달랠 수 있는 아늑한 쉼터 하나 주변에 있으면 족하지 않겠나 싶다.          

     

202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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