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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기(旗)에 담겨있는 신성성(神聖性)

세상을 여는 잡학

북현무기 동청룡기 남주작기 서백호기 중황룡기.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고대인들은 신전과 고분에 벽화로 신성(神聖)을 담은 문양을 새겨 넣었다. 그 문양은 곧 신과 직통하는 애플리케이션이었다. 그러나 벽화 문양은 고정형 신성이기에 공간적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신전 밖 다른 공간에서도 언제든 신과 함께 하고자 이동형 신성을 고안해 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군기(軍旗)다. 어쩌다 이웃 도시와 전쟁이 벌어지면 신성을 담은 군기를 앞세워 전쟁터에 나가는 것으로 승전을 염원하며 군사들을 일심동체로 묶었다. 신성을 품은 군기는 훗날 국가 체계가 확립되면서 통수권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장(儀仗)으로도 활용되었다.      

고대 한국과 중국 역시 신성 문양을 군기에 적용했다. 대표적 군기가 오방기(五方旗)다. 두 나라 오방기 모두 도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내용은 각각 다르다. 한국 오방기를 보면, 선봉군은 북(北) 현무기, 우군은 동(東) 청룡기, 좌군은 서(西) 백호기, 후위군은 남(南) 주작기, 왕이 이끄는 중군은 중(中) 황룡기로 구성된다. 중국 오방기는 저네들 고전 봉신연의(封神演義)에 나오는 것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북 진무조조기(眞武皁雕旗. 진무왕의 독수리 깃발), 동 청연보색기(靑蓮寶色旗. 마법의 청색 깃발), 남 리지염광기(离地焰光旗. 목숨을 지켜주는 불꽃 깃발), 서 소색운계기(素色雲界旗. 여신 서왕모가 보물로 삼은 구름 깃발), 중 무기행황기(戊己杏黄旗. 악을 물리치는 곤륜산 은행 깃발)로 각 방위의 색은 한국의 그것과 같으나 내용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군기가 유지해 내린 신성은 국기(國旗)로까지 이어져 대항해 시대 말미인 18세기 즈음 유럽 국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경쟁적으로 동양과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세울 때나 정복 전쟁 때 소유권과 영역 표시 상징으로서 국기의 정체성이 갖춰진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서양의 국기는 동양의 청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말에 등장하는 청의 국기는 원래 황실 기로 저들이 숭상하는 황색 바탕에 영물 청룡을 담고 있고, 일본 국기에는 흰색 바탕에 우주의 중심인 붉은 해가 그려져 있다. 청과 일본보다는 늦으나 동시대 조선에서도 국기가 만들어지니 태극기의 시조다. 이 태극기 탄생에 이설이 몇 있다.      

1년 전 중국발 동영상이 SNS에 돌아 우리를 어이없게 만든 일이 있다. 2016년 9월 중국 장쑤위성TV의 어느 퀴즈프로그램 장면을 뒤늦게 올린 것으로, “한국의 태극기를 누가 만들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출연자가, “마지엔쫑(마건충).”이라고 대답하면서 최종 우승자가 되고 있다. 이미 세계적 코드가 되어 있는 한국 문화에 대한 시기심으로 ‘무엇이든 중국이 원조’라는 억지 늘어놓기의 또 다른 모습이기에 보기 민망하기만 한 장면이었다. 

마지엔쫑 운운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마지엔쫑은 청말 외교관으로 조선과의 문제에 자주 개입하던 인물이다. 1882년 5월 조선이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할 때 국가 간의 공식 외교 석상에 국기가 필요했고 당시 조선은 태극기를 국기로 내세웠다. 이때의 태극기가 바로 마지엔쫑이 고안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조선 국기 제작에 개입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회담이 이어지던 어느 날, 마지엔쫑이 조선 외교관을 만나 백색 바탕에 발톱이 청의 청룡보다 하나 적은 붉은 용을 그려 넣어 조선의 국기로 삼도록 권한다. 이것은 저네들의 국기 모양인 황색 바탕의 청룡을 본뜨게 한 것으로,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공식화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마지엔쫑의 속 보이는 권유는 청의 간섭과 속박을 거부하던 고종과 조선 신료들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힌다. 여기에 조선과의 수호 통상 조약에 대표로 나섰던 미국 전권대사 로버트 슈펠트 제독마저, “조선이 청의 국기와 비슷한 국기를 내세운다면 조선을 주권 독립국으로 간주할 수 없다.”라며 마지엔쫑의 의견을 묵살하고 있다. 이렇듯 태극기의 탄생은 청에 대한 조선의 당시 정서와 슈펠트의 주장이 맞아떨어지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2004년 발견된 미국 해군부 문건에 의해 공식 확인되기도 했으니 더는 토 달 일 없다.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사용했던 태극기. 역관(易官) 이응준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2004년 발견)


이제 미국 문건에 실린 현존 최초의 태극기를 누가 고안했고 만들었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슈펠트 제독의 국기 제작 제안 의견을 들은 고종은 조약을 코앞에 둔 시점에 조선 국기를 새롭게 도안해 낼 시간적 여유가 없다 보니 2년 전인 1880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던 개항론자 김홍집에게 급하게 명을 주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왕이 행차할 때 의장으로 내세우는 태극 문양과 팔괘가 그려진 조선 국왕 어기(御旗)다. 고종이든 김홍집이든 누가 제안했든 간에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어 국기 도안을 국왕 어기에서 찾아내고 있다. 즉 태극 문양은 반홍반청(半紅半靑)으로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고, 팔괘 대신 하늘·땅·물·불의 조화를 의미하는 건곤감리(乾坤坎離) 사괘로 조율한 태극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고종의 윤허가 떨어지자 김홍집은 발길을 서둘러 협상 장소였던 미국 함정 스와타라 호에 달려가 통역관 이응준에게 급히 그리도록 했으니 마침내 조약 당일인 1882년 5월 12일 태극기와 성조기가 조인식에 나란히 등장할 수 있었다.

여기에 쓴웃음 지을 일화가 따른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내걸린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있고 나서 속 편할 리 없었을 청은 밴댕이 소갈딱지 짓을 한다. 1882년 7월의 임오군란을 진압한 이후 조선에 상주하다가 잠시 귀국, 11개월 만에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직위로 조선에 다시 건너온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대한 청의 권리를 부정했던 미국이 내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신흥 제국 미국에게는 어쩌지 못한 채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태극기를 그린 이응준을 걸고넘어졌으니 그에게 통역관으로 미국 사절단을 수행하던 중 2만 금을 가로챘다는 거짓 죄목을 씌운 것이다. 이 무도한 압박을 받은 고종은 힘없는 나라의 임금인지라 별수 없이 이응준을 수감하고 말았고.

박영효가 1882년 9월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갔을 때 영국인 제임스로부터 자문받아 태극기를 만들어 숙소에 내걸었다는 설도 있으나 조미수호통상조약 때보다 그의 도일 시기도 늦고 미국 문건이 조약 당시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기에 김홍집 이응준 제작설을 유력한 것으로 봐야 한다.      


남북통일 시대를 대비하자는 취지로 국기를 다시 만들자는 의견이 근래 있었다. 시의를 보면 추진할 만하다. 또 최근 들어 태극기에 대한 염증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극렬 우익 노년 단체가 걸핏하면 모여서 눈 궁둥이 시리기나 할 한심한 집단행동으로 국민 혈압을 높일 뿐 아니라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에까지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앞세우는 것이 바로 태극기라는 것이다. 국기에는 대다수 국민의 뜻이 담겨야 국기로서의 진정한 위엄이 세워진다. 일부가 모여 선동을 위해 흔드는 태극기에는 혐오감만 새겨지니 그것은 국기 모독죄에 해당한다.      


평창동계올림픽 때 독도를 한국 지도에 쓰지 말라고 생떼 부렸던 일본이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 홈페이지에는 독도를 저네들 영토로 표기하는 졸렬한 꼼수를 쓰고 있다. 한국의 어느 패션업체 대표가 한국 땅 독도를 세계인에게 알리는 QR 코드 새겨진 선수단 의상 제작을 제안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한 가지 추가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 1989년 남북체육회담에서 만들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독도가 새겨진 한반도기를 개막식 때 선수단이 들고 입장하는 것. 기에 담긴 신성성(神聖性)으로 대한민국의 강건함을 세계만방에 보여주자는 것이다. 올림픽을 보이콧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일본보다 한 수 위임을 보이는 길이다.


20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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