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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한국인의 성화(聖火) 신불

세상을 여는 잡학

올림픽 하면 열에 열 성화 봉송부터 떠올릴 정도로 이것의 상징성은 대단하다. 그렇지만 성화 봉송은 고대 올림픽 때부터 있어서 그 위상을 얻은 것은 아니다. 성화 봉송은 1933년 수상 자리에 오른 히틀러가 자신이 세운 ‘제3 제국’의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자 개최한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 때 처음 등장한다.          


그리스 올림피아 헤라 신전에서의 성화 채화 의식 중 올림픽 성화를 전달하는 대제사장. 사진 www.olympics.com

                   

고대 도시국가 아테나이(아테네의 원 명칭)는 아테나이인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그리스 반도 서쪽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올림피아라는 도시에서 ‘판아테나익(Panathenaic)’ 운동 대회를 치렀다. 기원전 9세기경부터 시행된 것으로 올림픽 대회의 원형이다. 6세기경 무력으로 집권한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이 대회가 더 활성화될 때 횃불 경주가 있었다고 한다. 신전에 밝혀있는 성화를 나누어 들고 경주하던 방식이었다. 이것을 눈여겨본 자가 바로 베를린 올림픽 당시 조직위원회를 이끌던 사무총장 디엠이었고 그는 이것에 착안, 성화 봉송을 탄생시키고 있다. 디엠은 3천 명의 주자를 선발하여 올림피아 헤라 신전에서 베를린 경기장까지의 3천km 거리를 계주 봉송하도록 함으로써 올림픽 대회보다 더 큰 관심이 성화 봉송에 쏟아지도록 했다. 성화 봉송이 올림픽 대회에서 엄청난 홍보 효과를 올리자 그리스와 소 닭 쳐다보는 사이일 아시안 게임 역시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대회 때부터 성화 봉송을 채택하고 있다. 물론 염치머리 없이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꿔오는 것은 아니고, 개최국마다 각각 의미 있는 지역에서 성화를 채화하도록 하고 있다. 

판아테나익 대회가 추구한 아테네인들의 결속에 횃불 경주가 힘을 실었듯이 현대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에서의 성화 봉송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지역 간 갈등, 인종 간 갈등, 국가 간 갈등, 종교 간 갈등, 이념 간 갈등 등이 없는 사해 동포 정신을 되새기도록 하는 것이다.      


유사한 의미의 성화 봉송이 오래전 한국인에게도 있었다. 물론 민족 결속을 다지는 범국가적 성격의 것은 아니고 특정 조직에 특별한 불이 개입된 것이었다. 그 조직 사람들은 이 불을 신을 모시는 불, 신불이라 했다. 

한국판 길드일 보부상은 삼국시대 때부터 주로 경작물이나 수공물을 팔던 행상인으로 추정된다. 조선 말 고종 때 상인들의 활동을 관리하고자 혜상공국서(惠商公局序)를 설치하고 보부상들에게 나누어 준 완문(完文. 신분증)에 ‘기자조선 때 나라에서 부상(負商)이라는 상인들을 동원하여 느티나무를 심도록 했으니 그것이 보부상의 원조’라고 명기하고 있다. 신화 급으로 꾸민 말일 수 있으나 그 정도로 한반도 보부상의 유래는 깊었던 듯하다. 고려 말 정사 기록에 의하면 공양왕 때 이들에게 소금을 운반시켰다 한 것에서 그 존재가 실제로 확인되고 있고, 조선이 세워질 때 상인들의 두령인 백달원이 상인 팔백 명을 이끌고 군량미를 운반해 준 것에 이성계가 고맙게 여겨 보부청(褓負廳)을 설치, 그들에게 행상 전담권을 주었다는 것에서는 세밀하고 분명한 흔적이 드러난다. 보부상이라는 명칭도 이 보부청이 설치되면서 공식화된 것으로 보인다. 

보부상과 신불의 관계는 백달원이 전국 보부상의 초대 도반수(都班首)에 오르자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역 단위별로 묶어 전국적인 조직으로 정비, 전체 보부상들의 단결을 위한 모종의 장치를 마련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백달원은 전국 보부상 대표들을 일 년에 한 번 모이도록 하여 도당제(都堂祭)를 열었다. 이 도당제 신당에 신불이 밝혀지고 도당제가 끝나면 보부상 대표들이 그 신불을 횃불로 나누어 받아 각 지역으로 돌아갔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판 성화 봉송인 신불 봉송이다. 신불은 그들의 수호신이자 보부상들의 결속을 다지는 매개체 기능을 수행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보부상.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 무당. 사진 contents.history.go.kr

                            

무당들 역시 신불을 모셨다. 황해도 개성 덕물산은 예부터 전국 만신의 조종(祖宗)으로 여겨진 산이다. 해마다 음력 3월 말 즈음이 되면 전국의 만신들이 산 아래 무당골에 집결하여 봄꽃 맞이, 봄잎 맞이 굿을 올렸다. 이들은 덕물산의 신주 최영 장군을 모신 신당에 신불을 밝혀놓고 며칠에 걸쳐 굿을 치렀다. 굿이 끝나면 만신들은 이제 신당 신불을 나누어 받아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저네들의 신당에 그 불을 모심으로써 최영 장군의 영기(靈氣)를 공유하고 무당들 간 일체감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 또한 신불 봉송이다. 공동체 결속 의미를 분명하게 투영시키고 있는 한국인의 신불 봉송은 오늘날 국제 운동 대회 성화 봉송에 앞서는 선구적 지혜였다 할 것이다.     


2020년도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도쿄 올림픽 대회가 국내외 반대로 1년 연기되더니 올해 들어 갖가지 우려와 구설에도 불구하고 끝내 열리는 모양이다. 돈 문제만 생각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정치적 계산을 앞세운 일본 정부가 물밑 투합, 대회 개최 강행함을 지켜보자면 그저 무모하고 위험하다는 생각만 든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로 범벅된 해산물을 올림픽 선수촌에 먹거리로 공급한다고 하지 않나, 일본 국내에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현상이 아직도 통제되지 못하고 있는 판에 변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번 대회를 통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창궐할지 모른다는 우려 등이 그 대표적 불안 요소다. 

일본은 예부터 극동아시아 변방국으로서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태생적 지역적 한계를 갖는 나라다. 그 외진 곳의 나라가 과거 틈만 나면 도발하고 심할 경우 전쟁까지 일으켜 동아시아의 질서와 평화를 극심하게 깨뜨리는 짓을 벌인 이유가 바로 콤플렉스 때문이라 해도 과언 아니다. 근세까지 한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이 20세기 초 한반도를 강점하자마자 한민족 문화를 파괴했다. 콤플렉스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나 로마의 황제들은 점령지의 문화를 존중해주었다. 점령국 민족들에 대해 얼마든지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점령국 민족에게 우수한 문화가 있다면 통 크게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정반대였다.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없다는 것은 약자로서 상대방을 무서워한다는 것이 된다. 무서워하면서도 어떡하든 강자를 이겨보려 할 때 약자는 정면 승부 대신 콤플렉스를 숨긴 채 꼼수를 택한다. 꼼수가 일본의 정체성이 되어 있는 까닭이 그것이다. 저들이 근래 행한 숱한 꼼수 짓들은 차치하고 올림픽 대회와 관련된 꼼수 짓을 얘기하자면, 평창동계올림픽 때는 한반도기(旗)에 독도를 표기하지 못하도록 IOC에 압력 넣어 성사시키더니 이번의 도쿄 올림픽 대회에서는 저네들 지도에 독도를 은근슬쩍 끼워 넣고 있다. 독도 영유권에의 역사적 명분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일본 정부로서는 콤플렉스 극복 차원에서 이런 치졸한 꼼수 짓을 벌이는 것이다. 전 세계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회 개최를 강행하려는 것도 이류국가 증세를 보임에 따르는 콤플렉스 때문 아닐까 싶고.      


이번 도쿄올림픽 대회에는 불길한 징조가 드리워져 있다. 성화 봉송 초기 이틀간 성화 불이 세 번이나 꺼졌음이 그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세계인의 평화와 결속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불을 일본은 봉송할 자격이 없다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확산 시발지가 되지는 않을지, 그 불길한 사태를 신이 먼저 걱정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올림픽 대회를 통해 인류 화합과 문명 발전에 이바지하기는커녕 불길한 징조만 드리우고 있는 도쿄 올림픽 대회의 성화를 떠올리자니 영험 높기만 한 우리의 신불이 거듭 돋보이기만 할 뿐이다. 


202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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