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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유식 소통 조화의 공간 한국 서원의 누정(樓亭)

세상을 여는 잡학

오늘날 현대 사회 구조에서의 유교 문화는 점차 일상에서 소외되고 있을 정도로 세인의 관심과 애정이 예전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조선의 국교로서 오백 년 넘도록 한민족 정서에 뿌리를 내린 유교 문화는 오늘에 이르러 아무리 한국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 해도 여전히 우리의 정신문화를 특징짓는 대표적 요소라는 것에는 이견이 따르지 못한다. 중원 땅에서 발현된 문화요 성균관에서 춘추 석전대제로 모시는 겨레의 스승으로서 설총과 최치원을 비롯한 동국 18현 외에 중원의 5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송조 4현(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를 배향하는 것을 가지고, “어찌 중원 문화에 중국인까지 받드는가?” 곱지 않게 생각할 수 있으나, 유교가 기천 년 동안 이 땅에 정착 전승되었으니 분명 우리 문화인 것이요, 고대부터 그 중원 현자들의 지혜를 따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만큼 그들 또한 동국 18현과 더불어 당연히 우리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에까지 쇼비니즘을 얹어 중원산(産) 운운하며 배척하는 것은 속 좁은 짓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네스코 유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2021년 현재 문화유산이 모두 13건, 자연유산이 1건, 무형문화가 20건, 기록유산이 16건 등이다. 이 중에 한국의 서원이 온 인류에 영원히 조명될 문화유산에 당당히 포함되어있다.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젠 바쿠에서의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9곳’을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했으니 내일로 등재 2년째를 맞게 된다. 등재된 9곳 서원은 다음과 같다.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경북 경주의 옥산서원,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으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자산이 아닐 수 없다.  

    

과거 교육기관은 크게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구분된다. 고고려(古高麗)의 태학, 백제의 5경(五經. 시전, 서전, 주역, 예기, 춘추) 박사,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5부 학당, 향교, 조선의 성균관, 4부 학당, 향교 등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대표적 관학 기관이라면 고고려(古高麗)의 경당, 고려의 구재(九齋)학당, 사학 12도, 조선의 서원, 서당, 서재 등이 대표적 사학기관이었다. 그중에서 조선의 서원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기존의 유불선(儒佛仙) 3교 구도에서 16세기 이후 조선의 유교 중심체제 구도로의 전환에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전국적으로 무려 1천 개나 달하는 서원이 존재하면서 유교 문화를 편재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 서원도 조선 말에 이르러 수난을 겪게 된다. 

어린 아들을 임금 자리에 앉힌 지 7년이 지날 즈음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사액서원 47곳을 제외한 전국의 서원을 일거에 철폐하고 만다. 이때가 1871년으로, 당시 서원은 붕당 간 정반합을 도출해내는 순기능보다 소모적 정쟁만 생산해내는 근거지가 되어 있었고, 심지어 왕권까지 흔들어대는 세도정치의 배경이 되고 있음에 천하의 이하응으로서는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원래 서원은 그 뿌리를 고려말 향교를 일으킨 충절의 대명사 정몽주나 길재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조선 건국 후 정계에 나아가지 않은 채 오로지 제자들을 양성하고 성리학적 탐구와 수양을 강조했으나 점차 서원이 늘어나면서 현실 참여 수단으로 변하다 보니 끝내 정도를 벗어나고 만 것이다.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특징짓고 있는 유교 문화의 요람일 서원은 말 그대로 학문을 익히는 공간으로만 보면 절대 유네스코 문화가 될 리 없다. 유네스코 유산을 선정하는 데에는 6가지 필수 기준이 적용된다. ①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②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③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④인류 역사상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⑤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定住地)나 육지 혹은 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 ⑥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등이다. 이 여섯 가지 기준이 두루 갖추어져 있을 때 비로소 유네스코 유산으로 선정되는 것이기에 한국의 서원 또한 단순하게 강학을 통한 인재 양성의 공간으로만 볼 것 아니라, 서원이 품고 있는 다양하고 깊은 의미가 여섯 가지 기준에 들어맞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서원의 대표적 누정인 병산서원의 만대루. 사진 한국의서원통합관리단


모든 서원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기본으로 삼아 자연과의 조화를 좇는다. 주변의 산 계곡 강과 일체가 됨으로써 군자의 요산요수(樂山樂水) 정신을 갖추는 것이다. 서원에는 반드시 사당이 지어져 선현을 모심으로써 후학으로서의 몸가짐을 다잡는다. 성균관이나 중국 일본의 유교 집단은 공자와 같은 성인들을 모시는 것에 반해 한국의 서원은 해당 지역의 현자를 모시는 것으로 지역 정서와 문화를 전승한다. 무엇보다도 서원이 필수적으로 갖추는 특별한 공간을 주목해야 한다. 바로 유식(遊息)과 소통, 조화의 공간으로, 주로 서원 출입 기능을 맡는 문루 형태를 띠는 누정(樓亭)이다. 유식은 ‘한가하게 노닐며 함양하는 것’과 ‘쉬며 함양하는 것’의 장수유식(藏修遊息)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장(藏)은 항상 학문에 관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요, 수(修)는 스스로 게을리 말고 늘 익히는 것이다. 곧 물러나 쉼에도 배움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서원 인근의 유림이 이 누정을 찾아와 서로 교유하는 것도 의미 있는 대목이다. 소통을 통한 인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짐과 함께 지역 여론을 형성하는 활발한 기능이 가동되는 것이다. 누정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조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누정을 통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는 인위적인 방식이 취해지지 않는다. 주변 자연경관을 그 모습 그대로 서원 공간 안에 끌어들이니 이것을 차경(借景)이라 한다. 서원 공간 안에서 누정을 통해 바깥을 바라볼 때 바깥과 조화되는 형상, 예를 들어 연당(蓮塘)을 만들거나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등을 심는다. 그러면 누정을 통해 흘러들어온 바깥 경관과 서원 내부에서 맞이하는 경관이 맞물려 그 풍취가 배가된다. 누정은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공간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장치가 되고 있다. 또 어떤 누정에는 창이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그 창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정물화(靜物畵)를 감상하는 것과 같다. 기막힌 자연 감상 장치까지 갖추고 있음이다. 이렇듯 누정은 선비로서의 호연지기와 절개, 인내, 풍류, 나아가 천인합일(天人合一) 정신까지 두루 아우르게 하는 한국인만이 갖는 특별한 공간이다.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된 지 2년째 되는 날이 목전인지라 고루한 말이겠지만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이 떠오른다. 옛것에서 찾아내는 지혜는 천년을 가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다. 인정 없고 매몰차도록 각박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 살다 보니 누정이라는 공간이 갖는 철학과 기능을 돌아보게 된다. 쉼으로써 스스로 정제하고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여 조화를 일구어내는 그런 누정을 마음속에 각각 품고 사는 것은 어떨지.               


20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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