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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프랑스의 디네앙블랑과 한국의 반보기

세상을 여는 잡학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프랑스에서 기발한 축제가 생겨났다. 이름하여 ‘디네앙블랑(Dine en Blanc. 순백의 만찬)’이다. 이 축제의 개념은 오로지 ‘흰색’이다. 흰색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디네앙블랑은 1988년 프랑스와 파스퀴에라는 사내가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야외에서 저녁 식사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그 발상인즉 파리 서쪽에 있는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규칙까지 만들었으니 친구들에게 모두 흰색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흰색 옷을 입고 화이트 와인에 흰색 먹거리, 흰색 꽃에 야외테이블 크로스도 흰색으로 준비할 것 등등. 친구들은 환호를 지르며 그의 말을 따라 전원 흰색을 앞세워 불로뉴 숲으로 모여들었고 그로써 디네앙블랑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2018년 파리 앵발리드 광장에서 개최된 디네앙블랑. 사진 thegoodlifefrance.com


흰색으로 치장함은 단순히 외양 갖추기만 생각한 것이 아니다. 참가자 모두 흰색으로 통일한 것으로 서로 간 동지적 유대감을 누릴 수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재미 요소를 장착했다. 행사 시작 몇 시간 전까지 모이는 장소를 비밀에 부쳐 절대 공표하지 않는데, 그것으로 디네앙블랑에 참가하고 싶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 즉 흰색 옷에 흰색 소품들을 준비하지 않는 뜨내기들을 불청객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원천차단하는 것이다. 행사 시작 두어 시간 전에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지 못하도록 참가자들에게만 SNS 네트워크로 공지를 띄워 번갯불에 오징어 구워 먹듯 후다닥 모여 저네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근사한 파티를 즐기는 것이다. 이런 팝업 플래시몹 방식의 축제이니 참가자들의 재미는 배가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성공을 거둔 이 축제는 초기에는 파리에서만 시행되었다. 예술의 다리 퐁데자르, 에펠 탑, 방돔 광장, 베르사유 궁전, 노틀 담 광장, 에투알 개선문 광장, 샹젤리제, 콩코드 광장, 루브르 박물관, 트로카데로 산책로, 팔레 루아얄 정원 등에서 치러진 것을 볼 때 이 공간들은 곧 파리의 주요 랜드마크임을 알 수 있다. 이후 뉴욕, 워싱턴, 몬트리올, 싱가폴, 시드니, 멜버른, 도쿄, 밴쿠버, 요하네스버그, 서울, 부산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 순회 개최되면서 그동안 전 세계적으로 80개 이상의 도시가 디네앙블랑을 즐겼다고 한다. 디네앙블랑 탄생 30주년이 되던 2018년에는 파리의 앵발리드 광장에서 무려 만칠천 명이나 참석하여 성황리에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최근 들어 한국 땅에서 각종 회사 모임이나 마케팅용으로 디네앙블랑을 흉내 내는 유사 행사들이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착잡한 생각이 든다. 재미있고 의미 있으면 외국 것이라도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는 있으나, 실상을 보면 흉내 위주의 저급한 이벤트 수준이기에 처량한 기분이 앞서곤 하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디네앙블랑과 유사한 것이 오래 전부터 이미 한국인의 세시 프로그램으로 가동되었음을 우리는 잊고 있다. ‘반보기’라는 것이 있었다. 반보기를 한자로 쓰면 중로상봉(中路相逢)이라고 하니 서로 ‘반(半)’ 정도씩 다가가서 중간 지점에서 만나 ‘본다’라는 것이다.      

조선 초 유교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양가 부녀자들은 함부로 외출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시집간 딸들은 여간하여서는 친정 나들이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사회적 환경을 극복하여 친정엄마를 만나 회포 푸는 방법으로 이 반보기를 가동했다. 즉 추석이 끝나고 하루 이틀 정도 지나면 며느리는 시어머니 허락을 받아 추석 음식 남은 것 챙겨서 친정댁과 시댁 사이 중간 즈음 되는 곳으로 득달같이 달려간다. 약속장소에는 역시 추석 음식을 준비해 온 친정엄마가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고. 그렇게 만난 모녀는 서로 얼싸 부둥켜안고 눈물 한 보시기 정도 흘리고 나서 외손주도 보이고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먹여주고 먹어가며 정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 정경이 구전민요로 전해지기도 하는데 가사를 보면 이렇다. ‘친정 길을 반만 간다고 하여 반보기, 다른 가족들은 볼 수 없어 반보기, 눈물이 앞을 가려 엄마 얼굴이 반만 보여 반보기’. 애틋한 만남이 눈에 선하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것은 만남 후 해 저물기 전 귀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병든 친정 어미와 청상과부 된 딸이 ‘만날 고개’에서 눈물의 상봉을 했다는 고려 말 창원 지역의 전설로 발아된 반보기 풍속은 외박 불허의 시대에 만들어진 빛나는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조선 시대의 반보기. 그림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지 19호

    

이 반보기는 점차 적용 범위를 넓혔고 서로 알고 지내는 나이 든 부녀자들끼리 무슨 소식 주고받을 일 있을 때면 서식 주고받는 것 대신 반보기로 직접 상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나니 더 세세한 소식을 나눌 수 있음이요 역시 이때도 음식이 준비되는 만큼 일종의 소풍 겸 외식을 즐기는 셈이 되는지라 반보기는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었고 점차 개인과 개인뿐 아니라 단체와 단체 간의 회합용으로도 활용되어 갔다. 전남 강진에서는 해마다 추석이 되면 이 마을 저 마을 부녀자들이 큰 방죽 가에 모여 회식한 후 강강술래를 하면서 하루를 즐겼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사내들도 조용히 있을 수 없기에 동년배들 간 모임에, 혹은 지역 간 공동체 교류에 활용함으로써 반보기를 일상의 생활문화로 정착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반보기가 개인 간 인화(人和)뿐 아니라 지역 간 화합 결속의 의미까지 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또 어쩌면 반보기가 디네앙블랑의 원조라 해도 무방할 것이, 반보기에도 ‘흰색’ 개념이 개입되고 있다. 원체 흰옷 입고 살던 민족인지라 ‘흰색 옷’은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요, 반보기에도 음식이 수반되기에 ‘근사한 외식’ 개념도 상통하고 있다. 디네앙블랑이 고작 먹고 마시고 나서 일순간에 흩어지는 것이라면, 반보기는 한국인의 다정다감 심성에서 발로된 가장 한국적인 풍속이었다. 반보기 발원지 창원에서는 해마다 만날 고개의 모녀 상봉 전설을 축제 화하여 옛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에 박수 보낼 일이다.   

  

사회가 다중화(多衆和) 다개화(多個化) 되면서 서로 외면한 채 사는 오늘의 우리다. 며칠 후가 추석이요 흩어졌던 부모 자식들이 만나 묵은 회포를 풀 것이나 그마저도 연휴 끝나기 전 서둘러 헤어져 복닥거리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추석 같은 명절 때만 떨어져 있던 가족이 힘들여 만나는 것보다는 반보기 방식으로 평소 짧은 만남을 편하게 자주 시행하면 가족애는 분명 더 훈훈해질 것이다. 또 옛날에 그랬듯이 가족끼리만 할 것 아니라 이웃 간 우애 다지기, 친구 간 우정 쌓기, 지역 간 소통 화합하기에도 반보기를 활용할 수 있다. 한때나마 서양인처럼 흰색 슈트 차림에 흰색 드레스 차려입고 우아하게 화이트 와인 마셔가면서 허영을 누려보는 것도 좋지만, 잠깐이나마 일탈적 여흥으로 흉내 내보는 것도 좋지만, 우리 식의 전통을 살리고 우리 식의 훌륭한 의미를 얹음으로써 한번 해 보고 버리는 소모적 행사가 아닌,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축제로 개발해보기, 멋진 조상을 둔 우리 후손들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 


요즘은 또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당마다 후보들이 난립하여서는 각자의 정책 비전은 별반 내보이지 않은 채 그저 네거티브 싸움판만 열심히 벌여 벌집 쑤시듯 요란하고 시끄러울 뿐인지라 목불인견이다. 대통령 선거 끝내고 나면 그 뒤끝 작렬을 어찌들 감당할지 걱정이다. 선거 끝나면 서로 앙금 머금은 사람들 간에 맺힌 것 풀어 하나 된 국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틈만 나면 갈등 일으키는 노사 간이라던가 무리한 쟁의를 앞세우는 이익단체들도 언제까지 불화에만 빠져 있을 수 없다. 서로 마음의 반을 양보하고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심정(心情) 반보기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202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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