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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심수봉과 <백만 송이 장미>

세상을 여는 잡학

1905년 어느 날 프랑스 삼류 공연단을 실은 기차가 흑해 동쪽 나라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도착한다. 이어서 시끌벅적 떠들며 하차하는 단원들. 그중 어느 여배우 한 명이 근처에 있던 청소부 사내에게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넨다. “내 짐 좀 들어주시겠어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사내는 곧 정중한 태도로 짐을 들고 그녀 뒤를 따른다. 여배우는 마르가리타 데 세브르, 청소부 사내는 니코 피로스마니였다. 

니코 피로스마니는 미르자니라는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는 그에게 가축 2마리만 남겨둔 채 일찍 세상을 떠났고 끔찍이 사랑했던 하나뿐인 여동생마저도 콜레라로 죽었다. 그는 자신이 지닌 유일한 그림 그리는 재주를 살리기 위해 고향을 떠나 트빌리시로 상경했다. 도시에서의 삶은 더욱 힘들었다.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면서 가끔 식당 간판이나 술집 테이블보 그림을 그려주거나 기차역에서의 허드렛일로 연명해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마흔 중반 나이가 될 즈음 그에게 불꽃 같은 사랑이 찾아왔으니 그 상대가 바로 여배우 마르가리타였다.

그녀의 공연을 매일 지켜보던 그는 마침 며칠 후가 그녀의 생일인 것을 알고는 자신의 집과 소 한 마리, 그려놓은 그림들을 팔고 피까지 뽑아 돈을 마련했다. 그 돈으로 그는 장미꽃 백만 송이를 샀다. 꽃이 준비되자 그녀가 묵고 있던 호텔 주변 거리에 그 장미꽃들을 깔았다. 그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려 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호텔 방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다보던 마르가리타는 엄청난 장관에 놀랐다. 그런 그녀의 눈에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니코 피로스마니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는 사내의 인생이 걸린 사랑 고백도 뒤로 한 채 공연 일정이 마쳐지자 트빌리시를 떠났고, 니코 피로스마니는 그녀를 싣고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며 슬픔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려야 했다. 그 후 수없이 많은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며 사무친 그리움에 빠져 살던 그는 1918년 어느 날 장미꽃 한 송이를 손에 쥔 채 쓸쓸하게 병사하고 만다.


조지아 화폐에 실린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 사진 위키백과

                                                                                                 

니코 피로스마니가 그린 여배우 마르가리타의 초상화. 사진 infocentereurope.ru


불우한 생을 보낸 그였으나 그는 사후 앙리 루소와 더불어 대표적 원시주의 작가로 인정받았고 이에 조지아인들은 그를 조지아 국민화가로 추앙했다. 1969년 조지아 정부가 파리에서 ‘니코 피로스마니 전’을 열었을 때 그가 그린 마르가리타의 초상화 역시 전시되었다. 어느 날 전시장을 찾아온 한 여인이 있었고, 그녀는 마르가리타 초상화 앞에 멈춰 선 채 회상에 잠겼다. 그녀는 바로 노년의 마르가리타였다.     


1981년 라트비아의 어느 방송국이 개최한 노래 경연대회에서 아이야 쿠쿨레와 리가 크레이츠베르가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을 불러 우승한다. 다음 해인 1982년,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넨스키가 트빌리시의 전설이 되어 있던 니코 피로스마니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접하고는 영감을 얻어 시를 짓는다. 그는 그 시를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 원곡에 새 가사로 얹었다.

‘한 화가가 홀로 살고 있었네. 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 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 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 백만 송이 붉은 장미를 창가에서 그대가 보겠지. 사랑에 빠진 누군가가 그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꽃으로 바꿔놓았다오.’ 들을수록 애달픈 내용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를 러시아 여가수 알라 푸가쵸바가 <백만 송이 장미> 제목으로 불러 러시아인들의 마음을 빼앗더니 곧바로 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다.      

이 노래는 1997년 한국에서도 번안곡으로 불렸고 그 노래를 부른 주인공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요 국내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심수봉이다. 심수봉은 최고 음악가 가문 출신이다. 증조부 심팔록은 가야금과 피리의 명인이었고 조부 심정순은 중고제 판소리 대가에 가야금 명인이었다. 큰고모 심매향은 서울 조선권번과 평양 대정권번에서 이름 날린 예기(藝妓)였고, 작은고모 심화영은 승무 중요무형문화재이자 중고제 판소리 명창이었다. 아버지 심재덕은 민요수집가에 가야금 명인이었고 어머니 장형복 역시 가무에 능했다. 이러한 심수봉 가문의 예술적 전통은 현재 충남 서산에서 ‘심화영류 승무’ 도 지정 무형문화재 보유자이자 심화영의 외손녀요 심수봉에게는 외조카 되는 이애리에 의해 이어지고 있고. 


서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심수봉은 13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를 따라 상경했다가 인천에서 여고를 마친 후 명지대학교에 들어간다. 학창 시절 심수봉은 어릴 적 배워둔 피아노 솜씨를 바탕으로 재즈 음악을 익혔고 록밴드 <논스톱>의 드럼 연주자로 미8군 클럽 무대를 밟기도 했다.      

청년 문화가 기승을 올리던 1970년대 말미 즈음 이 땅에 일대 획기적인 일이 일어난다. 대학생 가요제가 등장한 것이다. 영미권 팝송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당시에 젊은 숨결이 넘쳐나는 신선한 대학생 가요는 돌풍 그 자체였다.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이때 심수봉은 자신이 작사 작곡한 트로트 풍의 애절하고 감미로운 <그때 그 사람>으로 참가하여 ‘대학생이 뽕짝을 부른’ 것으로 큰 화제를 일으켰다. <그때 그 사람>은 본선에서는 비록 입상하지 못했으나 묘한 매력 때문에 대학가요제가 낳은 최고 히트곡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심수봉은 당대 인기 스타 자리에 올랐다. 그 덕에 청와대에 자주 불려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니,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소리가 울려 퍼질 때 함께 불려갔던 여배우 지망생 신재순과 함께 박정희 시해 장면을 목격하는 기구한 일을 겪고는 그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 그런 공백 기간을 거친 후 1984년 복귀하여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로 인기를 되찾았고 이어서 <무궁화(1985년)>, <사람밖엔 난 몰라(1987년)> 등의 연속 히트곡으로 불세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당시 심수봉은 여가수 김수희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며 한때 영미권 팝송과 롹 음악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 트로트 가요의 정수를 꽃피웠다. 그러나 여타 가수들이 부르는 천박한 가사의 저급한 트로트 가요들이 범람하면서 그녀는 점차 뒷전으로 밀리는 처지에 이른다. 그랬던 그녀가 10년 와신상담 끝에 내놓은 노래가 바로 <백만 송이 장미>였고 가사의 애틋함과 심금을 울리는 그녀만의 창법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추석 연휴에 심수봉 특별 공연이 KBS TV에서 제작 방영되었다. <백만 송이 장미>를 비롯하여 자신의 수많은 주옥같은 노래를 부르던 심수봉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몇 년 전부터 방송국들이 앞을 다투어 가요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세대풍 트로트가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나, 그 실상을 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대 영합적 감각 코드이기에 정통 트로트의 맛을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가사가 여전히 천박하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불린 이래 1980년대 심수봉 김수희 조용필까지의 트로트 노래 가사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시였다. 어느 문화에든 정통이 있고 그 부속물로 키치(Kitsch)가 따르기 마련이다. 또 어느 문화든 절정에 이르면 도착 증세에 몸살을 앓기 마련이다. 정통이 우선이요 키치는 한번 쓰고 버리는 배설용으로 여겨야 할 것을, 키치를 우선으로 삼아 길고 긴 도착 증세에 시달리는 지금의 세태 풍경은 볼 때마다 민망하기 그지없다.      

아직도 굳건한 우리 시대의 가객(歌客) 심수봉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가요 문화가 백만 송이 장미처럼 고운 향기, 정통 향기를 뿜게 될 날이 언제쯤 다시 돌아올지 기대해 본다.

                                                                                     

최정철 /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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