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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역사 속의 여전사들과 대한민국 여군

세상을 여는 잡학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흑해 근처에 활쏘기와 기마에 뛰어난 용맹한 여인 군단이 있음을 기록으로 남겼고, 기원전 1세기의 그리스 지리학자요 역사가인 스트라보는 이 여인 군단에 대해 부연하기를, “활을 쏠 때 오른쪽 유방이 방해되니 아예 베어냈다.”라고 했다. 여인 군단이 존재했던 여인국 위치는 지금의 터키 흑해 연안 도시 삼순에 해당한다. 삼순에 가보면 바닷가에 방패와 창을 들고 있는 커다란 여전사 상이 있고 자세히 보면 과연 갑옷 속 오른쪽 가슴이 현저히 꺼져있으니 활 쏘던 여전사임이 분명하다.

한반도 동쪽 바다에도 여전사들의 나라 여인국이 있었다. 석탈해의 어미가 다파나국 임금에게 시집간 동해 여인국 공주였음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려있고, 조선 시대 사람들도 이 여인국 얘기를 회자하고 있다. “동해에 여인국이 있다. 여인들은 욕정이 나면 하체로 남풍을 받아들여 아이를 배는데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면 죽이고 계집아이면 길렀다. 동해에서 실종된 어부들은 이 여인국에 접근했다가 여인국 여전사들에게 공격받아 죽어간 것이라고 한다.”라는 얘기를 17세기 네덜란드 선원으로 하멜과 함께 조선에 표류했다가 13년만인 1666년 탈출하여 귀국해 간 에이보켄이 자신의 견문기에 남기고 있다.     

터키 삼순 여인국과 한국 동해 여인국의 여전사들만 용맹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사들은 인류 역사를 거쳐 전 세계 곳곳에서 출현했다. 기원전 12세기 트로이를 쳐들어간 그리스 군단 중 여군들로 구성된 손도끼 부대의 대장 여전사 카미라, 기원전 10세기 3백 5십만 군사를 이끌고 인도 원정에 나섰던 앗시리아의 세미라미스, 1세기 브리튼 땅에는 자신의 두 딸이 로마 군사들에게 윤간당하자 군대를 모집하여 로마군단 7만 명을 몰살시킨 보아디케아, 3세기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고 시리아 땅에서 팔미라 제국을 일궈냈던 제노비아 여왕, 15세기 백년전쟁의 영웅 프랑스의 잔 다르크 등이 서양의 대표적 여전사들이라 할 수 있겠다.


터키 삼순의 여인국 여전사 상(像). 여전사의 오른쪽 가슴 부위가 현저히 꺼져있다. 사진 최정철

                                                                     

동양의 여전사들도 뒤질 리 없다. 우선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적으로 가장 언니 격 되는 여전사가 있으니 그 주인공은 기원전 13세기의 동이족 여인 부호다. 부호는 동이족이 기원전 17세기 초 한족의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상(商)나라의 여장군이었다. 1976년 중원 땅 은허 지역에서 우연히 발견된 묘터를 중국사회과학원이 발굴했더니 상나라를 크게 중흥한 무정(재위 기원전 1250~1192)의 왕비 부호가 묘 주인으로 밝혀졌다. 출토된 갑골문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 임금이 부호에게 명을 하여 토방(土方. 북방 민족)을 정벌하는데 신의 보호가 있을까요?” 그녀는 1만 3천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외적을 무찌르며 남편 무정 임금을 도와 상나라를 부흥시킨 여전사였다.                    

   

부호(婦好)의 묘에서 발굴된 삼련언(세 개의 시루를 이어 만든 청동기)에 새겨진 상형문자 ‘부호’. 사진 중국국가박물관


한반도에서는 신라 화랑들을 이끌던 대장 원화(源花)가 바로 여전사였다. 신라의 문화를 스키타이 문화와 비교 연구한 세계 동아시아 고고학회 회장인 미국의 사라 넬슨은 신라 원화의 현상을 짚어 홍산 문화와 깊은 연계성을 갖는 동북 문화에서 볼 수 있다고 일찍이 주장했다. 그녀는 신라 지배계층은 훈족(퉁구스족)으로부터 분파되어 중앙아시아 땅에서 중원의 동북 땅 만주를 거쳐 한반도 한강 하류,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 정착한 종족으로 홍산 문화를 이어받고 있다며, 몽골에서 발견된 제사장 제단에서 발견된 금관과 금 벨트가 신라 여왕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증거로 들고 있다. 먼 고대의 제사장들은 모두 여성이었음이요 제사장이 곧 지도자였다. 그런 체제가 훈족의 한 갈래인 신라 지배계층에도 전승되었기에 신라에서 여성들이 사내가 없어서 임금 자리에 올랐거나 근거 없이 전사들을 이끈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래전 김해 대성동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 여성용 투구와 철기 미늘 장식이 있어 세상을 놀라게 한 적 있다. 특히 철기 미늘 장식은 기원전 6세기에서 2세기까지 중앙아시아에 존재했던 스키타이족의 나라 알타이 파지리크에서 출토된 일명 ‘얼음공주’의 관에 붙어있던 것과 똑같아 놀라움은 더 컸다고 한다. 파지리크의 공주가 미늘 장식을 썼고 가야에서도 미늘 장식이 쓰였으며 고분에서 여성용 투구까지 출토되었음은 곧 고대 가야에 여전사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고려(古高麗) 때는 놀랍게도 해군 여장군이 등장한다. 연개소문의 여동생 연수영(淵秀英)이 그 주인공으로 그녀는 평양성으로 쳐들어오던 7만 5천 군사와 군선 약 8백 척의 당군을 맞아 장산 군도라는 곳에서 격파하고 있다. 그로써 당 태종은 안시성 패퇴에 이어 해전에서의 참패까지 겪으니 결국 피눈물 나는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때에는 거란의 1차 침입을 맞아 거란군을 패퇴시킨 천추태후와 거란 3차 침입 때 강감찬 장군 휘하에 들어가 백마 타고 언월도 휘두르며 거란군을 물리친 이설죽화가 대표적 여전사로 이름을 전하고 있다. 조선으로 들어서면 임진왜란 당시 남원 전투에서 왜군의 저승사자였던 여군 홍도가 있었고, 병자호란 때 청 사령관 잉굴타이를 무릎 꿇리는 박씨 부인은 소설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호란 당시 무명으로 활약한 ‘여장군 박씨’가 있었음이다. 가까운 20세기에는 광복군을 이끌며 하얼빈 일대를 호령하던 마산 출신 김명시 여장군도 있었고. 


이웃 나라의 여전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헤이안 시대를 연 12세기 일본 땅에 당시 반란과 도적들이 들끓자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교토 천황가는 무인들을 모집했다. 이때 도모에 고젠이라는 여전사가 대단한 활약을 펼치며 반란군과 도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한다. 중원 땅에서는 17세기 쓰촨성 출신의 묘족 여인 친량위가 유명하다. 그녀는 강력한 사병을 양성하여 쓰촨 땅의 반란을 진압했고,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연이은 침공을 맞아 랴오둥과 베이징에서 물리친 대단한 여전사였다.      


먼 고대 때에는 여성이 공동체의 지도자였으나 공동체가 중앙집권형 국가체계로 발전하면서 남성이 지도자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여성은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런 시대가 오래 이어지는 동안 어쩌다 여성 영웅이 나와도 특이한 상황으로만 여겨지곤 했다. 현대에 와서는 여군 체계가 정착되어 남군과 함께 정규군으로 전면에 나서는 큰 변화가 있었으나 어느 나라이든 남군 대비 여군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다. 남녀 간의 역할이 다르다는 관성적 사회 통념에 의해 그럴 것이다.      


지난 주말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었다. 문화력 경제력뿐 아니라 이제는 강력한 군사력까지 보유한 대한민국 위상에 뿌듯한 자부심을 가질 것이나, 그런 나라의 군대에서 안타까운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바로 여군에 대한 성폭력 행위다. 어느 여군은 자신을 가해한 남군에게 엄한 처벌이 내려지지 않자 원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고 있다. 미국은 군대 내에서의 성폭력 행위를 방지하고자 성폭력 대응 전문가를 3만 7천 명이나 가동하고 있으나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이 숫자가 2백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군대는 남자들만의 세상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요 남녀양성평등에 한치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모두가 공분하는 시대임에, 옛 여전사들의 후예일 오늘의 여군들이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1948년 국군 창설 후 1956년 10월 1일을 삼군 통합하여 국군의 날로 정한 이래 66년째가 되는 해에, “적은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었다!”라는 여군들의 절규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제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국방력을 자랑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여군들의 안위부터 ‘아군’들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 되었다.                                                                                      

20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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