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생문화는 다른 나라들의 유사 문화와는 매우 다른 패러다임을 갖고 있다. 대개 기생과 매춘을 연결하여 보는 경향이 있으나 성격 자체가 엄연히 다름을 모르는 소치다.
매춘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소포타미아 신전의 어린 여사제들은 참배객들을 상대로 육체적 봉사를 했고 그 대가를 받아 신전 재정에 충당했다. 고대 그리스에는 헤타이라이(Hetairai)라는 고급 매춘녀들이 있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정복왕 알렉산더의 애첩은 당대 최고 헤타이라이 타이스였다. 훗날 마스네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아 오페라 <타이스>를 만들 때 간주곡으로 지은 유명한 곡이 ‘타이스의 명상곡’으로, 오늘날 우리가 자주 듣는 명상음악이 바로 매춘녀 타이스로부터 나온 것이다.
중원의 매춘 역사는 춘추전국 시대의 명재상 관중에게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여려(女閭)라는 기녀 학원을 설립하여 창기를 양성화했다. 가무와 시를 구사했으나 주 종목은 매춘이었고 그 대가로 챙긴 재물을 국가재정에 충당한 것이다. 송나라 이전에 가무악과 시문학을 장착한 청루 기녀가 잠시 존재했으나 송나라 창기들의 극성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에 많은 유곽을 만들어 남자가 넘쳐나는 성비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히데요시 이후 창기 문화는 에도 시대를 거쳐 다이쇼 시대까지 이어지면서 17세기 초반의 오이란(花魁)으로 불린 전문 매춘부로 이어졌고, 가무와 시문학을 가미한 게이샤(藝者)들은 이후에야 겨우 등장했다.
청 오삼계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청루기녀 진원원(陳圓圓). 사진 baidu.com
일본의 오이란. 오늘날 일본에서는 기업총수나 정치가의 첩을 오이란으로 부른다. 사진 나무위키
중원과 일본에서는 매춘문화부터 발효했다면 한반도 땅에는 예능을 앞세운 기생문화가 두드러졌다. 중국 후한서와 수서에, “고려에 유녀(遊女)가 있다.”라고 했다. 고고려(古高麗)가 건국과 함께 국력을 키우고자 다른 부족들을 정벌할 때 피정복 부족의 부녀자들을 유녀로 삼았는데 무용총 벽화에 등장하는 무희들이 바로 그 유녀들이다. 가무악을 전담했던 유녀들은 점차 국가체계 확립에 맞춰 전국의 행정기관에 배치된다. 관기의 시효가 되는 것이다. 신라 진흥왕은 음성서(音聲署)라는 기관을 만들어 예인들을 육성했다. 그들 외에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엘리트로 교육받던 원화의 가무악 실력 역시 대단했다. 유불선의 조화로 접화군생(接化群生)을 깨우치려 했던 이들이기에 선(仙) 분야의 필수과목인 가무악에 능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실력이, 요즘으로 치면 정상급 아이돌의 귀 쌈을 기운차게 올려붙일 정도인지라 궁중에서 잔치가 열리기만 하면 영순위로 불려들어가곤 한 것이다. 그에 비해 백제에서는 부여를 방어하는 군부대 근처에 ‘꽃쟁취’라 부르던 유녀들이 있었다. 군사들의 성욕 해결 기능을 수행했으므로 예기와는 거리가 먼 분명한 매춘녀들이었다. 이 꽃쟁취가 백제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던 왜(倭)에 건너갔을 공산이 크다. 그것이 열도 땅에서 면면히 이어지다가 히데요시의 유곽 창기로 이어졌을 것인데, 연장되는 관점이 있다.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에 앞서 본진을 나가사키에 주둔시키고는 교토의 유곽들을 통째로 나가사키에 옮겨 군사들의 성욕을 해결해 주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 일본군 위안부로 그 맥을 이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요, 그 시원인즉 바로 백제의 꽃쟁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꽃쟁취에야 강제성이 없었으나 태평양전쟁의 위안부에는 강제성이 따른 비인륜적 악행이었기에 국제적으로 비난받는 것이고.
고려 시대에는 교방(敎坊)이라는 교습 기관을 두어서 여악(女樂)을 배출했다. 남녀 연희자들을 양성하던 송나라 교방을 고려가 수용한 것이다. 고려의 교방 여악은 궁중의례 때 의전 음악과 팔관회나 연등회 때 궁중 잔치에서의 연희를 담당했지 매춘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 대신 민간에서는 매춘을 주로 하는 유녀 문화가 따로 있었다. 이 유녀 문화가 아주 심각했던 모양으로 조선이 건국된 직후 당시 유녀로 인한 민간의 풍기문란이 극에 달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어전회의가 열려 유녀를 금하는 얘기가 공식화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런 조선 정부에서 기생을 양성화한 것이 관기 제도다. 관기는 고려 교방 여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가무 기예를 익혀 나라에서 필요할 때 봉사하던 여인으로서의 존재였음이요 매춘을 일삼는 고려의 유녀, 중원 땅의 창기와 일본의 오이란 개념은 절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 사회에서는 실력 뛰어난 관기에게 해어화(解語花)라는 시적 명칭까지 부여하면서 그들의 예술적 경지와 지위를 인정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권번 기생. 사진 yahoo.com
조선의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로 나뉘었다. 일패기생은 임금 앞에서 가무악을 시연할 정도에 시문학에까지 조예가 깊은 당대 최고 예인이었다. 매춘은 일절 하지 않았다. 황진이, 이매창, 일타홍, 채소염, 계월향, 매화, 옥선, 승이교, 홍원의, 홍랑, 만향 등이 조선 일패기생의 대표주자들이었다. 이패기생은 가무악이나 시문학 수준이 일패기생에 비해 조금 떨어졌다. 이들은 나라에 봉사하는 관기와 민간에서 활동하는 민기로 나뉜다. 관기는 당하관급 중앙 관료나 지방관을 상대했고, 민기는 일반인 중 양반들을 상대했다. 이패기생 역시 매춘은 금도였다. 관기 경우 관료에게 수청을 들기도 했으나 그것은 매춘이 아니라 나라를 상대로 시행하는 공무원으로서의 의무였다. 삼패기생은 일반 평민을 상대했다. 이 삼패기생이 바로 고려 유녀의 맥을 이은 존재들이다.
여기서 한국 기생문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일패기생임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춤꾼으로 소리꾼으로 연주자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도 빛을 발하며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존재였던 일패기생들이 바로 한국의 기생문화를 대변하는 존재였고, 중국의 청루 기녀와 일본의 게이샤들과는 비할 바 아닐 정도로 월등히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유한 예인인 것이다. 그런 면 외에 한국 기생에는 청루 기녀와 게이샤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따로 있었다. 바로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는 보호해주는 협(俠) 정신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기생 조갑녀는, “조선의 기생은 기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여협이라고 불리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황진이는 세상을 조롱하며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고 누구도 쉽게 사랑하지 않았다. 진주 기생 논개는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고, 평양기생 계월향은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에 몸을 내주기까지 하면서 성을 정탐하던 연인 김응서 장군에게 성 내부 정보를 전해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하도록 했다. 일제 강점기 때의 기생들은 독립 만세 운동에도 앞장섰고, 가락 반지 뽑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한국의 기생들이 그토록 의협심 강하고 기가 세자 총독부는 권번(券番)이라는 단체를 경성과 평양, 인천, 광주, 군산, 남원, 달성, 경주, 개성, 함흥, 부산 등 큰 도시 위주로 각각 설치해서 지역별로 기생들을 관리하고자 했다. 이 당시 전국의 권번에 기적을 올렸던 기생 수가 9천 8백 명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기생이 있었으나 이 기생들에게는 여전히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바로 가무악만 시연하는 예기와 매춘 하는 창기로 나뉘었고 예기는 창기와는 말도 섞지 않았다고 한다. 그처럼 조선의 일패기생, 즉 예기는 매춘하는 백제 꽃쟁취, 고려의 유녀, 조선판 유녀였던 삼패기생, 중국의 창기, 일본의 오이란과는 전혀 근본이 다른 예인이요 여협으로 한 시대를 당당히 풍미한 특별한 존재였다.
오늘날 일패기생들의 지고한 예술 세계는 훌륭한 국악인들이 잘 전승하고 있어 뿌듯하지만 삼패기생의 추함은 룸살롱 줄리들이 이으면서 하필이면 또 서초동 검사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으니 가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