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여는 잡학
주말에 서리 내리는 상강(霜降) 날이 든다. 상강 즈음해서 완연한 가을이 되는지라 단풍은 절정을 이룰 것이니 탁 트인 푸른 하늘 바라보며 산행하는 등산객들의 행복감은 최고조를 이룰 것이다. 반면에 예전 같으면 농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때였다. 요즘이야 수만 평 가을걷이도 콤바인으로 일거에 훑으면 하루 반나절도 되지 않아 해결되나 옛날에는 낫으로 일일이 거두었기에 이미 벼는 익어 들판을 무겁게 하건만 10월 말이 다가와도 손길은 늦어 달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여인네들이 칠석과 처서를 거치면서 길쌈에 손길 바빠진다면 남정네들은 음력 10월이 다 되도록 들판에서 허리를 펴지 못하곤 한 것이다. 남도 지방이야 날이 습하고 덥기에 음력 8월이면 수확을 끝낼 수 있으나 중부 이북 지역은 가을이 깊어야 수확을 끝낼 수 있었다. 상강이 다가오면 농촌에서는 내년 봄에 뿌릴 각종 종자 곡물들을 챙긴다. 상강에만 즐길 수 있는 먹거리로는 고구마와 땅콩, 은행, 토란이 제철 맛이요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국화꽃으로 담그는 국화주에 꽃을 얹어 부쳐 먹는 국화전이 별미라 했다.
상강은 농부들이 일손을 재촉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나라에는 엄중한 제사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때에는 1년 중 봄 경칩과 가을 상강에 맞춰 병조판서 주도로 뚝제(纛祭)라는 군대 제사를 치렀다. 고종 임금 때 1년 치 월급을 받지 못한 채 훈련도감에서 쫓겨난 구식군대 군인들이 들고일어났다가 청군과 최후의 접전을 벌이며 쓰러져간 곳이 왕십리다. 조선 시대 왕십리에는 대대로 군인들이 몰려 살았다. 그 이유는 왕십리 지척에 있는 중랑천을 건너면 중랑천과 한강 사이에 빈 섬이 있었고, 그곳을 저네들의 연무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제 형제들을 죽이고 임금이 된 아들내미 방원이 못내 미워 함흥에 틀어박혀 앉아 찾아오는 차사들만 애꿎게 생목숨 끊던 이성계가 마침내 오랜 벗인 무학대사의 권유에 못 이겨 한양으로 돌아올 때, 아비를 맞이하겠다고 방원이 기다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 이른 이성계는 꼴도 보기 싫은 방원이 눈에 띄자 다시 불같은 분기가 치밀어 올라 화살을 쏘아 날렸고, 방원이 잽싸게 차일 기둥 뒤로 몸을 피함에 화살은 기둥에나 박히고 말았다. 그래서 ‘살이 꽂힌 들’, 살곶이벌(箭串坪)로 불린 이곳을 조선 군사들이 저네들의 연무장으로 썼던 것인데, 그 연무장에서 군대 제사인 뚝제가 치러지곤 한 것이요 뚝제를 치르는 곳이라 하여 이름도 아예 뚝섬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이다. 봄가을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것 외에도 변방에 군대를 출동시킬 때면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는 파병 뚝제도 이곳에서 치렀다. 조선의 임금들은 뚝섬에 사냥을 자주 나왔다. 임금이 이곳에 오면 먼저 뚝기부터 땅에 꽂고 사냥에 나섰다. 이래저래 뚝섬은 뚝의 본향이 되는 셈이다.
지역 이름에 뚝이 들어간 곳이 서울 뚝섬 외에 또 있다. 주요 군대 주둔지 중 한 곳인 통영에 ‘뚝지먼당’으로 불리는 곳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이곳에 세운 사당에서 수군을 거느리고 뚝을 모시는 제사를 세 번이나 치렀고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뚝제가 있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먼당’은 통영 지역 말로 작은 언덕을 뜻하니 뚝을 모신 사당이 언덕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뚝은 원래 발음이 ‘독’인 것을 조선 시대 궁중어 발음에 맞춰 ‘둑’으로 불린 것으로 긴 장대 위에 짐승 머리를 매달아 만든 군기(軍旗)다. 군대 지휘권을 상징하는 뚝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치우에까지 닿는다. 치우는 중원 땅의 동이족을 이끈 군신(軍神)이었고 이에 맞서 항거한 한족의 수장은 황제였다. 둘은 지금의 북경 서북쪽의 탁록(涿鹿) 땅에서 맞붙어 아홉 번을 싸웠고 번번이 치우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황제는 인면조(人面鳥) 여신인 현녀(玄女)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열 번째 전투에서 가까스로 치우를 무릎 꿇렸다. 최후의 승리를 거둔 황제는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고자 치우 머리를 베어 깃대에 매달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뚝의 기원인 것이다. 이 뚝은 군신의 표상으로서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에게도 전파되었다. 그들은 치우의 머리 형상을 대용하는 야크 머리를 매달아 동이족 최고 군신의 가호를 기원했다. 몽골 장군들은 이 뚝을 토르라 불렀고 정복 출정 때마다 뚝을 앞세우곤 했다. 동유럽 군사들은 뿌연 먼지를 뚫고 진격해 오는 몽골 기마병 앞에 뚝이 보이기만 하면 오금을 저렸으니 유럽인들의 ‘타르타르의 공포’가 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몽골 원나라의 사위 국이 되면서부터 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긴 삼지창 끝에 보기 흉악한 짐승 머리 대신 소털을 수북하게 붙여 달아 썼다. 뚝제 때에는 군사 전원이 갑옷에 투구를 썼다고 한다. 투구는 순우리말로 중국인들이 전투모를 ‘투쿠이(頭盔)’라 한 것을 음차한 것이다. 일설로는 뚝의 발음도 투구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뚝기와 유사하게 생긴 투구를 쓴 것을 새겨본다면 뚝과 투구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싶다.
임금이나 관찰사가 행차할 때도 반드시 이 뚝을 행렬에 포함해서 군대 지휘권을 상징함과 동시에 행차 주인공의 권위를 드러내곤 했다. 행차할 때에는 말을 탄 장교가 뚝을 잡아 세워나가고 서너 명의 군사들이 그를 따르며 뚝기 위를 묶은 줄을 잡아당겨 쓰러지지 않도록 했다. 뚝은 일본에도 건너갔음이니 지금도 저네들의 천왕 즉위식이나 추수 감사제 성격인 대상제(大嘗祭)에서 귀한 의물(儀物)로 쓰이고 있다.
1908년 대한제국 정부는 북청 물장수에 주로 의존하던 경성의 상수 공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곳에 한반도 최초의 정수장을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이르러 뚝섬 일대가 수영장까지 갖춘 유원지로 개발되었고 궤도차까지 들어가게 되니 당시 경기도 고양군 소재 땅이었던 이곳이 경성과 지척인 연유로 경성 사람들의 최고 인기 놀이터가 되었다. 광복 후 1954년에는 경마장이 들어섰고 박정희에 의해 골프장까지 들어섰으며 현재는 서울시 수도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뚝섬의 옛 정기는 20세기 문명에 의해 밀려 사라져 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원하는 곳이 있다면 전 세계 곳곳에 파병하는 군사 강국이 되어 있다. 그동안 파병된 곳을 보면 소말리아, 서사하라, 남수단, 필리핀, 동티모르, 레바논, 아랍에미레이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이 있고, 가는 곳마다 해상 호송지원, 재건지원, 의료지원, 재해복구, 평화유지에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현지인들의 찬사를 받으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또 오늘날 정부는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여 도심에서의 군대 행진 쇼를 보여준다. 이런 것을 보자면 무엇인가 허전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바로 옛 뚝제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아 봄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갑옷에 투구 차림으로 임하는 사당 제사를 치르자는 것 아니라 현대식으로 재구성하면서 내용과 의미만큼은 살리자는 것이다. 10월 1일 국군의 날에 행하는 군대 행진 쇼도 좋으나 각 군대에서 정기적으로 뚝제를 치름으로써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애국 수호심을 북돋우고, 해외 파병할 때에는 공항과 항구에서 행진곡 연주에 맞춰 잘 다녀오라 손 흔들어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뚝제의 본향 뚝섬에서 동이족 원조 군신 치우천왕의 보살핌과 승전을 기원하는 현대판 뚝제를 치르는 것,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특별의식이요 귀한 볼거리가 될 것이니 상상만 해도 멋지다.
2021.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