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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공자의 예악과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세상을 여는 잡학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들로 점철되어왔다. 봉건시대를 털고 중원 땅에 공산국가를 세운 마오쩌둥도 권력을 장악하면서 천자 급 위상을 누렸고, 그 뒤를 이은 덩샤오핑도 예외 아니었다. 21세기가 되어서도 새로운 천자가 등장했으니 시진핑이다. 청년 시절 7년 하방(下放)의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재기에 성공한 시진핑은 2012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자리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에 오르더니 마침내 2018년 중국 국가주석 자리에마저 등극,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올랐다. 


그런 그가 공자와 손을 잡았다. 그는 마르크스 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삼으면서도 공자와 유가 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덩샤오핑 시대까지만 해도 중국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던 공자와 유가 사상이었음에도 말이다. 중국에서의 전통문화 탄압 역사는 1917년부터 일어났다. 5·4 신문화운동이 일어났을 무렵, 서구 세력에 무너지고 있는 비참한 중국의 허상에 염증을 느낀 루쉰을 비롯하여 수많은 지식인은 힘없고 병약해진 전통문화를 타파하자고 주장했다. 그런 흐름은 중공 정부 수립에 맞물려 이어졌고, 1966년 마오쩌둥은 자신의 권력 극대화를 위해 홍위병을 앞세워 벌인 잔혹한 문화혁명 운동을 통해 각종 전통문화를 봉건주의 잔재로 지목하여 압살하고 말았다. 개혁파 덩샤오핑 역시 봉건주의 청산의 맥을 유지했으니 그런 와중에 공자와 유가 사상은 숨통이 거의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90년대가 되면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말년의 덩샤오핑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내부 단합을 꾀했다. 이때 쓰인 대표적 카드가 바로 공자였다. 덩샤오핑은 무덤에 묻혀있던 공자를 부활시켜 인민의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우는 한편, 전 세계를 향한 공자 수출 전략도 힘차게 전개했다. 그렇게 생겨난 ‘공자학원’은 2004년 서울에 들어선 것을 포함, 전 세계에 현재까지 120여 나라에 약 5백 개 정도가 된다고 한다. 

시진핑이 권력을 잡을 즈음인 2011년에 묘한 일이 일어난다. 그 해에 베이징 톈안먼 광장 북쪽의 국가박물관 건물 앞에 높이 9.5m 크기의 대형 공자상이 세워졌다가 백일 만에 철거되어 박물관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봉건주의 청산을 진두지휘했던 마오쩌둥의 잔여세력이 여전히 무시 못 할 존재로 남아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다가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잔여세력을 누르고 비로소 국가주석에까지 오르자 다시금 공자를 전면에 부각하고 있다. 그는 외적으로는 공자를 앞세운 민족주의로 ‘중국몽(中國夢. 중화민족의 부흥)’을 주장하면서 내적으로는 21세기 천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다지려는 것이다. 

시진핑이 천자가 되기 위해 공자와 손을 잡은 이유는 공자의 대동 사회 이상에서 찾을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은 유가 사상의 핵심을 인(仁)으로 알고 있다. 인이 아니다. 예(禮)와 악(樂)이다. 인은 인의예지신에 속하는 유가 사상의 실천강령에 머물 뿐이다.      


예는 무엇인가? 서로 겸양의 덕으로 상대방을 공손하게 대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예에는 무서운 장치가 들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에는 ‘상하 구분’, 즉 수직 종속적 인간관계 전제라는 무서운 조건이 들어있다. 전쟁으로 해를 띄우고 지우던 춘추시대, 그 시대를 겪어야 했던 공자는 전쟁 없는 평화 세상을 꿈꾸었고 그 방법론으로서 나라와 나라 간 ‘상하 구분’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약소국은 강대국에게 절대 싸움을 걸지 않는다. 강대국에게 무조건 몸을 낮추어야 나라를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강대국은 약소국에게 무력을 휘두르지 말아야 한다. 나라와 나라 간에 높낮이를 두듯 나라 안에서도 높낮이가 분명해야 했다. 군주가 있고 그 밑에 관료들이 있어 군주를 모신 채 나라를 경영한다. 아래로는 백성들이 경제를 일구어 국부(國富)의 주체가 된다. 이것이 공자가 말한 예이다. 그러나 이 예에는 한계가 있다. 즉, 약자로부터의 반항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이 악이다. 강대국은 약소국으로부터 존중받으며 공물을 받는 대신 약소국을 무력으로 지켜주는 등 배려해 줘야 한다. 군주는 관료들에게 녹봉을 내려 그들의 불만을 다독인다. 관료들은 백성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생산수단과 재물의 공유화로 그들의 불만을 다독인다. 그런 체계에서 군주의 자리는 선양(생전에 왕위를 내주는 것)되어 권력의 해로움을 없애고, 늙은이는 모두의 부모요 젊은이는 모두의 자식이요, 모두가 일할 수 있고, 모두가 가정을 이룰 수 있고, 소외층 사람들은 모두 부양을 받고, 재물은 너나없이 모두 나누어 갖고, 힘은 나보다는 모두를 위해 쓰는 것, 이것이 악이다. 순자는 예악의 실체를 현실 정치에 이렇게 이입했다. “예는 사회 분화를 촉진하고 악은 같도록 합하는 것이다.”라고. 예로써 사회 체계를 분화 정립하고 그에 따른 반발은 악으로 달랜다는 것이다. 악의 대표적 외적 형태가 음악이다. 사람들은 음악으로 즐거움을 느끼며 일상의 번뇌와 고통을 달래고 서로의 감정을 누그러트리기도 한다.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 음악은 필수적으로 개입되고 그로써 일체감이 만들어지기에 옛 성인들은 음악을 중시한 것이다. 


요약하면, 공자의 대동 사회는 ‘상하 구분’ 체계와 ‘약자에의 배려’를 전제하고 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오늘날 시진핑은 자신의 통치이념으로서 공자를 내세우되 상하를 구분하는 예는 강력하게 굳히고, 인민을 배려하는 악은 집요한 통제로 제약을 두고 있다. 공자 이래 중원의 어떤 나라도 진정한 대동 사회를 구현하지는 못했으나 악은 보장함으로써 저네들만의 풍요로운 문화가 존재했건만, 시진핑 시대가 되면서 공자는 악을 잃은 채 변색 왜곡되어 칼춤만 추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권력자는 권력을 개인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것으로 귀착함으로써 핏빛 투쟁을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고, 백성들은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수탈의 대상이며, 국가 간에는 힘의 우위를 앞세운 행보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문화는 사라진 지 오래고 오직 시진핑과 당만을 우선하는 파시스트적 광기만 들끓을 뿐이다.   

   

아프가니스탄을 되찾은 탈레반은 지난 8월 사람들로부터 명망을 얻고 있던 민속 가수 파와드 안다라비를 공개 처형한 후 모든 음악인은 악기를 연주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던 차에 이 지난 10월 말 어느 결혼식장에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에 탈레반 병사들이 현장을 덮쳐 연주하던 하객 3명을 사살했다. 음악에 대한 탈레반의 거부 반응은 이미 있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손에 넣었던 그들은 그때 이미 이슬람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음악을 금지한 바 있다. 음악뿐 아니다. 2001년 미국의 공격에 정권을 내주고 달아나기 전 인류 문화유산으로서 세계 최대 크기로 6세기경에 제작된 _악(樂)의 또 다른 상징적 조형물일_ 바미안의 불상을 서슴지 않고 파괴하기도 했던 그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되찾은 후 먼저 시행한 것이 바로 탄압받는 백성들의 한 줄기 숨통인 음악을 차단하면서 히스테리를 부린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상하 수직 종속 관계를 말했던 예(禮)가 통치술의 한 축으로 변질하였음에도 악(樂)이 나서서 약자의 고통을 달래는 진통제 역할을 했기에 인류의 역사는 불편함 속에서도 이어져 왔고, 천자의 나라로 거듭나고 있는 중국에서조차 비록 통제와 제재를 받으면서 희미하게나마 악(樂)이 존재하고 있건만, 악(樂)의 요소를 원천 차단함으로써 모든 인권을 땅에 묻은 채 오로지 알라신만 떠받드는 신권의 나라로 추락한 것이 오늘의 아프가니스탄인 것이다.       

                                                                

20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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