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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May 18. 2022

60나이 내 인생 내일도 거침없이 Yalla(2)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 프랑스 / 2019년 겨울의 마음여행에세이


11월 26일 인천~바르셀로나(출국)     


바르셀로나(Barcelona)행 아침 비행기는 중간 경유지로 파리에 들릅니다. 경유 조건은 좋았습니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 터미널 2에서 대기 시간 없이 곧바로 환승하기.  

나는 여행 때 캐리어 대신 배낭을 씁니다. 캐리어를 쓰면 비행기 개리지에 실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경유지에서 환승할 때 이것이 분실되지 않고 제대로 목적지에서 환수할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됩니다. 실제로 경유 중에 캐리어 짐을 분실한 다른 사람들의 사례도 왕왕 들었습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부피가 덜 나가는 배낭을 쓰면 개리지로 가지 않을 확률이 높고 그로써 직접 메고 탑승할 수 있기 때문에, 즉 언제든 내 몸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경유지 환승을 골백번 해도 직접 메고 내리고 타고 하면서 분실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에서 바로 짊어지고 일착으로 입국심사대에 도착, 일찌감치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리지에 실린 캐리어는 수화물 토해내는 곳 찾아가서 이제나 저제나 나오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본 20~30분은 기다려야 받을 수 있습니다. 배낭은 시간 상큼절약, 캐리어는 시간 환장낭비입니다. 현지에서 이동할 때도 캐리어를 쓰면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바퀴가 달렸기에 평지를 이동할 때는 편하겠다 싶겠지만 그것이 편한 것만은 아닙니다. 바퀴 굴러가며 내는 드르륵 소음이 보통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럽의 주요 도시 올드 타운에서는 길 표면이 울퉁불퉁 마름돌 마감으로 되어 있기에 소음이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소음도 소음이지만 캐리어 바퀴가 똑바로 굴러가기 힘듭니다. 자칫 바퀴가 빠져 나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 지하철역에서나 거리에서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그 무거운 캐리어를 잡아 끌어올리고 내리고 하면서 오만 고생 다 해야 합니다. 배낭을 메고 다니면 그런 끔찍한 일 겪지 않아도 됩니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환승할 때 탑승 직전 승무원이 내 배낭을 정지시키고는 내려놓으랍니다. 개리지로 실어야 한답니다.  

“인천 공항에서 출발할 때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왜?”

한 쪽 눈꼬리 올리면서 따졌더니 부피가 좀 나간대나 어떻대나 하는 이유를 댑니다. 환승 때는 비행기가 바뀌기에 비행기마다의 규정이 조금씩은 다른 것입니다. 기분은 불편했지만, 중간에 다른 경유지 없이 이제는 목적지인 바르셀로나로 직행하니 중간에 분실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도착해서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헌금 덜 걷힌 목사마냥 구시렁대며 기다려야 하지만 말입니다.      


#내 인생 노선에도 환승이 있을까?


바르셀로나는 석양빛 머금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미토리 숙소는 늘 그렇듯이 무척 불편합니다. 짐 풀고 정리하고 숙소 규칙 파악하는 데에만 족히 한 시간 걸립니다. 샤워에 빨래까지 마치고 나니 훌쩍 밤 9시 30분. 숙소를 나서서 주변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개선문이라는 것을 만납니다. 유럽 땅에서는 개선문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왕이나 장군을 환영해 주기 위한 상징적 건축물. 우리 조상들은 전장에서 돌아와 살고 있는 도시에 문짝을 지어 세우는 대신 점령지에다 커다란 비석을 세웠더랬죠. 동네 입구에 세운 개선문 통과하면서 으쓱대고 촐랑대는 것보다는 광개토대왕처럼 점령지에 비석 하나 큼지막한 것 콱 박아 놓고, “한 번만 더 까불었단 봐라~” 하고 매서운 눈길 한 번 주고 돌아서는 것이 더 폼 나겠다 싶습니다.      


#내 마음에 개선문을 세울까 그대 마음에 비석을 세울까       


인근 동네 뒷골목을 마저 훑습니다. 소매치기 놈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뭐, 이 시간 이런 곳에서 그놈들이 설칠 리는 거의 없어 보이지만 스페인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필히 조심해야 한다는 말 하도 들어가지고 첫날밤부터 대비태세 연습을 해 봅니다.    

‘어떤 놈이든 나와 봐라~’

눈에 힘 넣고 싸돌아다녔건만, 놈들은 내 기대에 부응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지형지물을 익힌 후 숙소로 돌아와서는 숙소 입구 옆에 붙어있는 카페에서 주인이 권하는 하몬(‘하몽’이 아니고 ‘하몬’ 발음이 맞음) 샌드위치 대신 닭고기 샌드위치와 달달한 생맥주 두 잔으로 하루를 축입니다. 바르셀로나의 첫날, 요 정도로 간만 보고 넘어갑니다.      


11월 27일 바르셀로나     

아침 일찍 숙소 주변(어젯밤에 돌아다녔던 반대 쪽)을 산책하면서 바르셀로나의 아침 군상과 인사 나눕니다.

서양 사람들, 발코니를 참 좋아하죠? 이곳도 아파트 집집마다 새장 같은 발코니가 빠짐없이 붙어 있습니다. 발코니. 참 로맨틱하죠. 로미오와 줄리엣의 영화 같은 키스를 떠오르게 하는 공간 발코니.      

   

바르셀로나는 가우디(Antoni Placid Gaudi)를 빼면 얘기가 되지 않는 듯 어딜 가도 가우디의 족적이 툭툭 나타납니다.

아침 시간을 이용해서 가우디 일생작이요 생전 마지막 작품인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 일명 가우디 성당을 만나자고 숙소를 나섭니다. 유명 관광지는 아침 시간 지나면 단체관광객들에게 치이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게 관광지를 구경하는 것인지 관광객들을 구경하는 것인지 모르게 되죠. 그래서 이렇게 이른 아침을 도와 달려가는 것입니다.     

가는 도중에 지금은 쉬고 있는 모누멘탈(La Monumental) 투우장을 지나칩니다.

투우장의 투우사와 투우. 투우장의 투우는 세 명의 투우사로부터 단계적 공격을 받습니다. 먼저 말 탄 피카도르(Picador)의 창에 찔려 육신의 균형을 잃습니다. 이어서 반데리예로(Banderillero)의 작살을 맞아 힘을 잃습니다. 이제 투우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채 자신만의 공간 퀘렌시아(Querencia)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을 꼬나 쥔 마타도르(Matador)가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합니다. 마타도르는 퀘렌시아 공간을 침범하거나 희롱하지 않고 거친 숨을 내뿜고 있는 투우를 기다려 줍니다. 이윽고 가련한 투우는 마지막 혼신의 힘을 짜내어 마타도르를 향해 달려듭니다. 그리고는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죠.

투우가 죽기 전 마지막 호흡을 다듬는 곳 퀘렌시아. 여행을 앞두고 걱정거리를 배낭에 담아야 했던 나의 심정은 어쩌면 창과 작살 공격을 받고 죽음에의 공포심을 품은 채 퀘렌시아에 들어섰던 투우의 심정과 같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모누멘탈 투우장을 바라보자니 그 퀘렌시아에 서 있는 투우의 마지막 거친 입김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가슴 한쪽이 시려오기까지 하는군요. 퀘렌시아의 투우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아침 일찍 서둘렀더니 역시 효과가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사전에 예매를 하지 않으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입장표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처 예매하지 않았던지라 걱정을 했습니다만, 웬걸,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표 사서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성당은 현재까지 130년이 넘도록 공사 중입니다. 이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무엇을 만들어도 참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성격이 있는 듯합니다. 백년을 들여 짓는다는 것, 곧 정성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정성, 백 번 존경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빨리빨리 문화에 빠져 있는지라 무엇을 지어내더라도 이런 식으로는 하지 않죠. 아니, 못합니다. 인건비 때문에. 아무리 공법이 발전했고 우리네 기술이 좋으니 빨리 짓는 것 가지고 걱정할 필요 없다 하더라도 아무렴은 오래 깃들인 정성에 비하겠습니까?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의 중요한 덕목은 바로 정성이다     


가우디다운 외양도 멋지지만 실내도 아름답습니다. 실내의 기둥들은 마치 인체 구조에서 따온 듯 어느 것은 근육이요 어느 것은 뼈다, 그런 식으로 지었다는군요. 여행 가이드가 열심히 떠들며 설명하고 있는 단체 관광 팀에 묻혀 가지고 도둑경청으로 주워들은 내용입니다. 돈 들이지 않고 즐기는 얌체 가이드 관광. ㅎㅎ  

     

내가 원체 교회 문화를 좋아하지 않다 보니 건축미에만 눈도장 찍어 주고 곧바로 성당을 떠납니다. 성당 후문 근처에 있는 기념품 가판 상점들 구경 좀 하고 나서 이제 다음 코스, 가우디의 처녀작이요 자신의 생가(生家) 카사 비센스(Casa Vicens)로 향합니다. 이곳에서부터 제법 먼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지라 노선버스도 없고 어쩌나 싶던 차에 어디서 빈 택시 하나가 나타납니다. 에라~ 시간 절약상 택시 타고 말자, 돈 아깝지만 이 방법이 좋겠다 싶습니다.      

자신의 생가 역시 직접 설계하고 지었던 만큼 독특한 외관이 단번에 눈길을 끕니다. 내부에 들어가기 전 핸드폰에 저장시켜 놓은 예약증을 보여 줬더니 입장표를 끊어 주고 나서는 입장은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하니 조금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먼저 정원 구석에 있는 카페에 가서 간식과 커피를 즐기고 있어라, 하는군요. 간식과 커피, 요놈들은 표 값에 묻어 있는지라 공짜입니다.

그렇게 잠시 쉬었다가 시간 맞춰 실내로 입장합니다. 건물은 작고 내부 공간도 오밀조밀하지만 공간 구성을 보니 역시 대가(大家)로서의 기운이 느껴질 만큼 탁월한 감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느낌인 즉, ‘아, 이 양반은 자신의 집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꾸몄구나.’ 싶습니다. 예쁘고 아담한 침실, 정갈한 화장실, 넉넉하고 로맨틱한 발코니, 화려하지 않은 응접실, 3층까지 오르내리는 감각적인 나선형 계단, 살뜰한 마을 정경을 감상할 수 있는 옥상 공간 등등.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이곳은 기념품 판매장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가우디를 상징하는 카멜레온과 비슷하게 생긴 예쁜 도마뱀이 눈에 띕니다. 도자기로 구워낸 것이라 값이 좀 나갑니다. 그래도 하나 사야죠. 가우디가 설계한 또 다른 명품 공간이 바로 귀에이 공원(Parc Guell)인데, 그곳에 있는 연못에 이 도마뱀이 큰 조형물로 만들어져서 놓여 있다고 합니다. 즉 도마뱀은 가우디를 연상하게 하는 상징물이 됩니다.        

이제 귀에이 공원으로 향합니다. 이곳에서부터 공원까지는 대략 1km 정도 거리. 30분 정도 요량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귀에이 공원 역시 가우디의 손길이 심하게 닿았던 공간. 공원 입구를 지나 들어가는 중에 근처로부터 따다닥 구두 굽 치는 소리와 기타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플라멩코 버스킹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서 지켜 보자니 이 친구들 급이 좀 떨어진다 싶은 것이, 확 빨려드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래도 노래 1절 분량은 지켜봐 준 후 공원 구경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공원을 많이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예쁜 공원은 보다보다 처음 봅니다. 공간 공간이 마치 만화답고 천진난만합니다. 가우디의 성품이 바로 이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런 공간이 구상되었을 것인가, 그런 저런 생각으로 공원에 있는 동안 내내 즐거웠습니다.      

실컷 구경 후 이제 시내로 돌아가야 합니다. 귀에이 공원에서부터 시내까지 도저히 걸어 나올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마침 노선버스가 공원 입구에 서 있습니다. 한국에 비해 두 배 정도 비싼 2유로 20센트(3천 원)짜리 버스 타고 카탈루냐 광장(Placa de Catalunya)에 도착합니다. 바르셀로나라고 와 가지고 예의상 가우디 성당이니 귀에이 공원이니 하는 곳 정도는 둘러봐 줬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시간을 즐길 것입니다.

일단 카탈루냐 광장에 붙어 있는 람블라(La Ramblas) 거리를 걸어 내리며 온갖 잡종 인간들 구경 실컷 합니다. 그러다가 람블라 거리를 벗어나 올드 타운으로 들어가서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수인사 좀 틉니다.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돌아다니는 중에 배에서 소식이 옵니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보케리아(La Boqueria) 재래시장을 찾아가니 가우디를 만난 것보다 훨씬 재미진 시간을 맞게 됩니다.

시장 해산물 코너에 커다란 가리비 껍데기가 넉넉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리비 조개는 서유럽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는 해산물입니다. 순례를 떠난 순례자들이 이 가리비 조개껍데기를 저네들의 상징 표식으로 씁니다.         


#내 인생 상징의 조개껍데기는 무엇일까      


현지에서는 산 호셉(Saint Josep)으로도 불리는 이 시장에는 일단 먹거리가 풍요롭기도 하지만 근사한 오픈 빠들이 많습니다. 여기저기 신나게 시장 구경 좀 돌다가 그중 오픈 빠 한 곳을 정해서 자리 잡고 앉아 달달한 맥주와 삶은 새우, 비프스테이크를 주문합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고 새우요리부터해서 비프스테이크가 순서대로 나옵니다. 새우나 소고기에 굵은 소금을 군데군데 툭툭 뿌려 놓았는데 육질과 함께 씹히면서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을 돋웁니다. 눈 지긋이 감고 그 맛을 깊이 느껴 봅니다. ······단언컨대, 선녀 주둥이 빠는 맛입니다. 음식 맛도 좋지만 좌우 옆에 붙어 앉은 국제 나그네들과 동무되어 얘기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나는 강남 스타일은 절대 아니고 분명코 재래시장 스타일입니다. 빠 주인인 영감이 다른 주문들 받으랴 바쁜 중에도 연신 나를 들여다보며 이런 저런 말을 걸어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끝내주는 맛 칼럼니스트를 내가 좀 아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이 집 맛을 자랑해 주겠노라, 광 좀 파니까 아버지 모시고 일하는 아들내미 세 명이 그 말 듣고는 와락 달라붙어 한국 최고~!를 울부짖습니다. 맛 칼럼니스트 한 명 더 안다고 했다가는 아예 한국을 등에 업고 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입니다. 보케리아 시장 피노쏘 빠(Pinotxo Bar)의 귀여운 친구들. 후식은 1유로 60센트짜리 카푸치노. 커피 값 참 쌉니다.      



11월 28일 바르셀로나~몬세라트~싯체스~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의 첫날 여정을 알차게 보내고 이제 이틀째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외곽의 자연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버스로 북쪽 내륙 방향 두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몬세라트(Montserrat). 해발 약 1,300m의 돌산이 있고 그 돌산 꼭대기에 유서 깊은 수도원 하나가 있습니다. 몬세라트 수도원(Monestir de Montserrat). 물론 자연을 보러 가는 것이지 수도원 보러 가는 것은 아니고요.      

이곳 또한 아침 일찍 와서 그런지 관광객이 들끓지 않아 좋습니다. 사람들과 떨어져 한적한 산길을 홀로 걷습니다. 산세 구경도 좋지만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 마을도 보기 좋습니다. 그런 중에 수도원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젖어 눈을 감습니다. 코끝을 지나치는 산바람, 귓가에 맴도는 여음의 종소리, 머리 위로는 낭랑한 산새소리······. 아! 세상이 멀어지고 내 마음 속 찌꺼기들도 따라 멀어집니다.     


#그대 마음속 산새소리 종소리에 눈을 감아 보라

#인간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옥 됴타     


미사 전 수도원을 대표하는 바실리카(Basilica) 대성당 건물에 들어갑니다. 이 성당 안에는 검은 성모상(Black Madonna)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줄을 지어 입장해서 바실리카 성당 2층으로 올라갑니다. 앞 사람 따라 비좁은 통로를 꺾고 오르고 하다보면 1층 미사 집전하는 곳 정중앙 바로 위쪽에 작은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 성모상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성모상은 보호 차원에서 설치한 둥근 유리 통 안에서 어린 예수를 무릎 위에 앉혀놓은 채 좌상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한 사람씩 한 20~30초 정도만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수도사 한 분이 길게 뽑아든 셀프카메라 봉뿐 아니라 요란한 촬영을 자제시킵니다. 나야 가톨릭 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토리를 품고 있는 성모 만나기, 마다할 일 아니죠.     

자료사진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스토리가 있다고 합니다. 무려 천 년 역사를 이어 오던 수도원에 시련이 찾아듭니다. 1811년 나폴레옹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고는 수도원 대부분 시설을 파괴하고 만 것입니다. 그때 항거하는 수도사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말이죠. 이후 나폴레옹 군대가 물러나자 다른 지역의 수도사들이 모여들어 수도원을 재건합니다. 그러던 중에 이번에는 무슬림 군대가 카탈루냐 지방까지 쳐들어옵니다. 당시 검은 성모상을 성인으로 모시던 카탈루냐 사람들은 무슬림 군대를 피해 그것을 산세가 험한 이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숨겨 놓아서 오늘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몬세라트 수도원은 검은 성모상과 함께 또 다른 유명한 존재가 있습니다. 13세기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소년 성가대가 아직도 그 맥을 잇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손꼽히는 에스콜라니아(Escolania)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지금은 베네딕트(Benedict) 수도회가 관리하고 있는 이 수도원. 수도원을 감싸고 있는 주변 산세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경치가 일품인지라 가우디도 이곳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우디의 웬만한 건축물과 공원들은 몬세라트의 울퉁불퉁한 형태를 중심 개념으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미사가 시작됩니다. 나도 한쪽에 앉아 엄숙한 미사 의식을 지켜봅니다. 내게는 언제 어디에서의 어떤 의식이든 눈여겨보는 습성이 있습니다. 습성이 아니라 직업병이죠. 종교는 각종 의식을 생산해 내는 발산지이고 또 그런 의식의 형태를 활용하는 축제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축제 인생을 살고 있는 놈이다 보니 당연히 이런 의식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미사 중에 드디어 에스콜라니아 합창단을 만납니다. 합창으로 빚어내는 화음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머릿속이 청량해지는 그런 기분.

그렇게 내 마음 온 데를 적셔 준 몬세라트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이제는 작고 조용한 휴양지 싯체스(Sitges) 해변 마을을 찾아갑니다. 바르셀로나에서 기차30분 정도 걸리는 곳입니다.  


이 마을에는 술과 관련된 스토리가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유럽 전역의 포도나무들이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기생충에 의해 전염병에 걸려 거의 괴사하고 맙니다. 그러자 주류생산업자들은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로 건너가서 바카디(Barcadi)라는 럼(Rum)술을 만듭니다. 그렇게 호시절을 보내던 중 호시탐탐 쿠바를 노리고 있던 미국의 시비로 미국 스페인 간 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스페인이 실컷 얻어터진 끝에 항복, 개 값도 받지 못한 채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게 됩니다. 그로 인해 그동안 럼주를 만들어 내며 큰돈을 벌던 주류생산업자들은 쿠바를 떠나 귀국해야 했고 돌아와서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싯체스입니다. 그들은 싯체스에서 여러 가지 기가 막힌 술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중에서도 이네딧(Inedit)이라는 맥주가 걸출하기로 유명합니다.       

바닷가 골목 안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예쁜 카페들. 한 곳을 정해서 사람들로 시끄러운 실내를 피해 바깥의 술통 모양 테이블에 앉아 주문합니다. 하몬을 샐러드에 곁들여서 이네딧 맥주를 즐깁니다.

그렇게 폼 잡고 있는데 핑크색 옷차림의 한 사내가 살랑거리는 걸음걸이로 내 곁을 지나가며 윙크를 보냅니다. 게이입니다. 나는 엄연히 이성애자입니다만 동성애자들의 ‘성(性) 소수자로서의 길을 선택한 인간적 의지’에는 마땅히 응원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내가 맥주를 즐기는 동안 내 곁을 지나며 살랑대던 게이가 모두 세 명이나 되었을 정도로 이곳 싯체스는 게이들이 많이 모여들어 사는 곳입니다.

이네딧 맥주와 헤어진 후 바닷가 산책을 합니다. 석양 질 시간, 어느새 서녘 바다가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멀리 방파제에서 한 사내가 거센 바람을 타고 달려드는 지중해 파도의 리듬에 맞추기라도 하듯 양 팔을 휘두르며 춤을 춥니다. 딱 보니 예술을 하는 친구 같고, 보기에 참 아름답습니다. 저 친구는 과연 무슨 감흥을 얻어서 남들이 보든 말든 저렇게 춤을 추고 있을까요? 쫓아가서 같이 춤을 추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감흥이 깨질 수 있겠죠. 참았습니다. 저런 장면은 지켜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멋진 예술 퍼포먼스이니까요.

그렇게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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