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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May 18. 2022

60나이 내 인생 내일도 거침없이 Yalla(3)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 프랑스 / 2019년 겨울의 마음여행에세이



11월 29일 바르셀로나~그라나다     


아침 일찍 바르셀로나 공항으로 달려갔습니다. 예약해 놓은 저가항공기 편으로 그라나다(Granada)에 가려는 것입니다. 버스로 이동하려면 너무도 먼 거리인지라 거의 하루를 까먹게 되기에 저가항공기 이용으로 반나절 정도 시간을 벌기로 합니다.

탑승 수속 창구에서 황당한 일이 생깁니다. 내 배낭 무게와 사이즈를 재더니 짐칸으로 따로 부쳐야 하니 40유로를 내랍니다. 허~! 비행기 표 값이 6만 원입니다. 그런데 짐 부치는 값이 또 6만 원? 차분한 목소리로 따졌죠. 내가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너희 같이 이렇게 비싸게 초과 수화물 요금을 물리는 경우는 보다보다 처음 본다······.

젊은 여직원, 전전긍긍합니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이 친구,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4유로만 내셔요.”

또 다시, 허~! 요금이 십분의 일로 줄어들었습니다. 깎아줘 봤자 20유로 정도 부를까 했더니 인심 왕창 쓰네요.

마침 그 친구 옆 자리에는 이른 시간인지라 아무도 없어서 그랬는지 자기 딴에는 내게 큰 인심 써 준 것입니다. 어쨌거나, 처음부터 그렇게 나올 것이지, 무르팍 위에 엎어놓고 엉덩이 맴매해 줄까부다, 쯧. 배낭 맡기고 짐 인식표 끊어 받으며, “쌩큐~” 한 마디 날리며 싱긋 웃어 주고는 검색대로 넘어갔습니다.

 

카탈루냐 지방을 대표하는 바르셀로나에서는 제법 번다하다는 느낌을 받았더랬습니다. 시내 차들은 거리가 한가하다 싶으면 기본 80km 이상 속도를 내며 달립니다. 사람들의 행태도 빠릿빠릿하고 말이죠. 아마도 유대교 영향을 받은 지방이라서 그런지 대체적으로 생활양식에 딱딱 각이 져 보입니다. 이제 스페인 남쪽 지방인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 풍취를 만날 차례. 그라나다에서는 조금은 느긋한, 이슬람교 풍이 느껴집니다.

숙소는 스페인의 산토리니(Santorini Island)로 불리는 사크로몬테(Sacromonte, 동굴을 파서 만든 집시들의 거주지) 지구에 있는 그림처럼 예쁘고 고풍스러운 집으로 정했습니다.

이 마을은 알함브라(Alhambra) 궁전 아래에 붙어 있습니다. 짐 정리한 후 손으로 대충 빨은 옷가지들 내다 걸려고 테라스에 올라가 보니 관망이 너무 좋습니다. 오른쪽에는 알함브라 궁전이 살짝 보이고 왼쪽에는 사크로몬테 지구가 사랑스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냥 여기에 앉아 있어도 그라나다를 절반은 느끼겠다 싶습니다.

그래도 나가 보기는 해야겠죠? 이제 그라나다를 제대로 만나러 나갑니다. 사크로몬테 마을은 언덕배기에 얹혀 있어서 시내로 나가는 길은 내리막길이 됩니다. 대신 이따가 돌아올 때는 헐떡대며 기어올라야 한다는.

마을 아래에 닿으면 누에바(Nueva) 거리가 됩니다. 그 길을 걷다보면 누에바 광장이 나오는데 광장이라고 해 봤자 농구장 크기 정도 공간입니다. 누에바 거리에 붙어 있는 알함브라 궁전 외벽 바깥은 곧바로 낭떠러지가 되고 그 아래에는 도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건천(乾川)이지만 예전에는 충분한 물줄기로 해자(垓子) 역할을 해냈겠죠.     


#사람들에게도 해자가 둘러져 있으니 남의 영역 쉽게 침범하지 마라       


누에바 광장을 지나서 큰 길로 나서면 그곳이 바로 이자벨 광장(Plaza Isabel La Catolica)이 됩니다. 그라나다의 중심 되는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마을버스 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가 알함브라 궁전에 도착.  

잠시,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옛날 얘기 한 토막. 15세기 말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이 이끄는 가톨릭교 세력에 의해 이슬람 세력이 700년을 지배하던 이베리아 반도 땅에서 드디어 쫓겨납니다. 당시 이슬람 왕국의 수도는 내륙 쪽 코르도바(Cordoba)였습니다만, 실질적인 중심지는 바로 이곳 그라나다였습니다. 그런 그라나다에서 쫓겨나던 무슬림들에게는 땅을 잃는 것보다 더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패주의 길을 걸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돌려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과의 작별에 눈물을 뿌렸다고 합니다. 그런 알함브라 궁전을 오늘 만나는 것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겉에서부터 우아하고 예쁩니다. 알함브라 궁전에 입장하기 전 11세기의 여름궁전으로 예쁜 정원을 자랑하는 헤네랄리페(Generalife)와 먼저 인사 나눕니다. 이슬람 문화의 꽃이다 싶을 정도로 대단한 정성이 깃들어 있는 공간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정각과 30분 시각에 맞춰 손님을 받습니다. 헤네랄리페를 둘러본 후 잠시 숨 좀 돌리다가 알함브라 궁전으로 들어갑니다. 내부를 보니 역시 명불허전이라고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나는 1995년도 이후 한 몇 년 동안 조선왕조 궁중문화 재연 관련 이런저런 행사를 연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선왕조의 궁궐을 진하게 대할 수 있었고 조선왕조 궁궐 양식의 우수함에 찬탄을 내곤 했었죠, 물론 우리네 것은 우리네 정서에 맞게 아름다운 것이고 이슬람 것은 그들의 정서에 맞게 아름다운 것이겠죠만, 어느 곳 어느 문화든 정수를 보여 주는 것이라면 어느 시절 어느 누가 봐도 그것은 분명 찬사를 받기 마련입니다.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교에 밀려 이 땅을 떠날 때 뿌렸던 눈물이 애잔하다 싶습니다.

알함브라 궁전 내부를 실컷 구경하다가 출구를 나서니, 어라? 다시 또 헤네랄리페가 나오네요. 아하, 내가 순서를 거꾸로 잡은 것이구나~ 데면스럽게 헤네랄리페와 작별하고 나서 이제는 알함브라 궁전 방어용이었는지 외곽 쪽에 세워져 있는 나사리 궁전(Palacios Nazaries)으로 향합니다. 나사리 궁전은 다른 것은 그냥 패스하고 맞바로 성곽 위에 올라야 끝내주는 풍광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라나다에 석양이 물드는 중에 반대편 멀리 보이는 만년설산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은 특별한 자태로 나그네의 눈길을 끕니다.  

이 정도면 알함브라와 그 형제들과의 수인사 트기는 족한 듯합니다. 이제 다시 작고 예쁜 마을버스를 타고 궁전을 떠납니다. 버스는 좁고 미로 같은 골목을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며 이사벨 광장에 도착합니다.

배가 고파 옵니다. 점심밥도 먹지 않고 쏘다녔습니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이사벨 광장 맞은편에 붙어 있는 알카이세리아 골목 시장(Alcaiceria Bazaar)을 찾아 들어갑니다.

이슬람권이었다면 어느 곳이든 여전히 이슬람 풍 전통시장이 남아있고 그것을 수크(Souq)라고 부릅니다.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런 형태죠. 이곳도 당연히 수크 형태라서 아이쇼핑 재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시장 안쪽에는 작은 광장이 있고 그 광장을 둘러싼 가판 잡화점들이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 만든 전력으로 회전목마 돌리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 광장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인 듯합니다.

카페들마다 광장 쪽을 향해 카페 앞 임시 천막을 차려 놓고는 분주히 손님들을 받습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끝에 한 곳을 정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늦가을 날씨인데 여기는 이 정도도 추운 모양인지라 내부마다 난로가 가동되고 있습니다. 열댓 살 정도로 보이는 앳된 소녀가 밝은 웃음으로 주문을 받습니다. 아르바이트하는 학생 같아 보입니다. 정성껏 차려 주는 음식, 맛도 좋군요.

가난한 나그네 주제에 과하다 싶게 와인과 함께 성찬을 즐기고 나서는 계산하자고 20유로짜리를 내주었더니 곧 소녀가 잔돈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 그라나다의 첫날, 멋지게 보낸 기분이다, 잔돈 중에서 여학생에게 줄 팁 5유로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는(어린 소녀의 정성에 비해 1유로, 2유로는 미안하다 싶어서) 소녀더러 쳐다보라고 테이블을 톡톡 두드려 줍니다. 손으로 건네주어서 직접 받게 하면 받는 입장에서는 주변 사람들 시선 때문에 쪽팔릴 수 있습니다. 아무렴은 감수성 깊을 사춘기 친구이니 만큼 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니 여기다 놓고 갈 테니 네가 슬쩍 잘 챙겨라, 그 사인인 것입니다. 소녀의 귀에 입이 걸립니다. 매너가 좀, 디테일했습니다.

누에바 거리를 설렁설렁 거닐면서 밑에서 올려다보는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을 즐깁니다. 숙소 들어가는 골목 초입에 구멍가게가 있어서 이곳에 머물 동안 밤에 마실 싸구려 와인 한 병과 초콜릿을 샀습니다. 초콜릿 덩치가 제법 큽니다. 두께는 1cm 정도. 크기는 벽돌만 하고. 딱딱하기도 벽돌 급입니다. 이빨로 물어뜯으려니 이가 다 흔들립니다. 수벽치기로 힘껏 내려쳐 부숴 가지고 한 조각 입에 넣었더니 잘 녹지도 않습니다. 우리네 초콜릿처럼 녹녹하지 않고 그저 메마른 촉감이 강해서 다시 한 번 이것은 벽돌이다, 를 되새깁니다. ㅠㅠ

제법 시간이 지나야 조금 녹으면서 맛을 내주는데, 맛은 뭐 괜찮습니다. 그렇게 그라나다 촤컬릿과 씨름하면서 이곳에서의 첫날밤을 보냅니다.


11월 30일 그라나다~코르도바~그라나다    

 

그라나다의 아침 햇살은 먼저 알함브라 궁전을 깨우고 나서 아랫마을로 퍼집니다. 숙소 테라스에 올라 바깥을 내다보니 사크로몬테 마을 일대가 주섬주섬 잠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오늘의 여정은 어찌될까요?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에라, 여정 계획에는 없던 곳, 거기나 다녀오자······. 다시 또 수벽치기로 조각낸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채 일찌감치 길을 나섰습니다. 마을버스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 시간 되는 대로 버스표 끊어 찾아간 곳, 이슬람 왕국의 옛 수도 코르도바(Cordoba).     

코르도바 가는 길 내내 도로 좌우에 넓고 넓은 민둥산과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어디 곳이든 한 종류 나무가 광활하게 심어져 자라고 있습니다.        

무슨 나무인가 한참 궁리했습니다. 뭐지? 오래 전 중국 산동 성에서 봤던 끝도 없이 펼쳐 있던 마늘 밭과 삼나무 밭이 문득 떠오릅니다. 마늘이야 야채로 먹지만 삼나무 용도는 뭘까? 했는데, 알고 보니 이쑤시개와 나무 젓가락 만드는 데에 쓰인다더군요. 버스는 중간 중간 몇 곳을 거치며 승객들을 내리고 받고 합니다. 어느 한적한 마을을 경유할 때 고딩으로 보이는 어린 여학생 둘이 버스에 타더니 내 뒷좌석에 앉자마자 자동발사 식으로 지지배배 수다를 떨어댑니다. 내 주변 좌석에 승객도 없고 해서 혼자 궁금해했던 것을 고놈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저게 무슨 나무냐?”

한 아이가 이빨 서른 개 다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올리브~!” 라고 외칩니다. 아하~! 그렇지, 스페인은 올리브의 나라이지! 중국인들은 요리할 때 돼지기름을 쓰고 한국인과 일본인은 콩기름을 쓰는 것에 반해 유럽인들은 이 올리브기름을 씁니다.


코르도바. 지금은 작은 도시로 무척 조용한 곳입니다. 마음에 딱 듭니다. 버스 터미널에서부터 슬슬 걸어서 메스키타(Mezquita. 이슬람 사원)로 향하는 길은 너무도 예쁩니다. 도로 가운데 길게 이어진 이국적 풍취의 공원. 야자수와 대형소철나무, 샛노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 나무들. 그 오렌지 열매를 누구 하나 따 먹는 사람이 없네요. 공원 중간 즈음에는 대형 천막 풍물시장도 나타납니다. 안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구경 안 할 수 없죠. 그러다가 어느 매장 진열대에 내 눈이 꽂힙니다.

멕시코 죽은 자의 날(Day of The Dead) 축제의 상징인 설탕해골(Sugar Skull)들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오호, 요것 봐라? 멕시코가 옛날에 즈이 식민지였다고 이 이역만리 땅 스페인에서 멕시코 축제 기념품을 내다 팔다니, 이걸 어떻게 봐줘야 하노? 기분이야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축제쟁이가 되어가지고 나 몰라라 할 수만은 없습니다. 아무렴은 내가 언제 또 요놈들 보겠다고 멕시코에까지 가겠습니까?

하나 골라 가지고 가게를 지키고 있는 젊은 친구에게 값을 물었더니 9유로라고 합니다. 암만 봐도 잘 쳐줘야 7유로짜리이고, 있는 그대로 보면 5유로짜리입니다. 해골을 내려놓고 휭 가다가 다시 그 진열대 앞에 가서, “5유로에 내놔.” 했더니, 쥔 녀석, 바람이 일어나도록 머리통을 가로로 흔들어대더니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곳은 정찰제로 운영하는 곳이라서 절대 깎아 줄 수 없어요!”

허~ 요놈 좀 보소? 개긴다 이거지? 오냐 그래······.  

“See you later(너 두구 보자)~”

메스키타 구경 마치고 그라나다행 버스 타러 시외버스 터미널로 돌아갈 때 다시 들러서 요리해 주기로 합니다.       

메스키타 성벽 안쪽은 곧바로 올드 타운이기에 예쁜 집들 가게들이 꼬불꼬불 골목을 따라 이어져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람블라 거리 안쪽 올드 타운도 그랬고 알함브라 궁전 아래 마을도 그랬듯이, 코르도바 메스키타 안쪽 마을도 골목들이 미로처럼 되어 있습니다. 길이 좁은 것이야 옛날 형편에 맞춘 것이지만 왜 이렇게 미로 같이 해 놓았을까요?

아무리 봐도 이것은 침입해 오는 외적을 괴롭히려고 한 것이 분명합니다. 즉 외적 방어용이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스페인 웬만한 도시들의 올드 타운은 핸드폰 구글 지도를 눈알 빠지도록 잘 들여다보며 행선지 잡아서 다녀야 합니다.       


#그대 마음속에도 미로가 있는가      


메스키타 구경하기 전 마침 점심 참 먹을 때인지라 아침도 건너 뛴 허기진 배 좀 채우려고 카페를 찾습니다. 골목 어느 곳을 지나는 중에 아주 예쁜 레스토랑이 보입니다. 그런데 가게 이름이 ‘Choto’입니다. 민망한 발음에 고개 갸우뚱해짐과 동시에 밥맛이 일시불로 떨어집니다. 식당 이름이 ‘조또’. 받아들이기 힘듭니다그려.

헌금 덜 걷힌 목사마냥 구시렁대며 다른 노천카페 잡아 가지고 안달루시아 토속 음식 가스파초(Gazpacho, 빵과 함께 먹는 차가운 스프), 커피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문득 뜨거운 스프가 먹고 싶어집니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스페인 땅의 마른 먹거리에 질렸나 봅니다. 이따가 저녁에 그라나다로 돌아가서는 어디 일식집이라도 있으면 우동이나 먹어 봐야겠다는 생각 마구 듭니다.       

요기 해결했으니 이제 메스키타 구경에 들어갑니다. 내부에는 넓은 정원과 화려한 박물관, 그리고 높은 탑루가 있습니다. 탑루에는 올라가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정원과 박물관만 만나 보고 나서 메스키타를 빠져나옵니다. 종교 건축물 구경보다는 올드 타운 뒷골목들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올드 타운 남쪽으로 로만 다리(Roman Bridge)가 있고 그 건너편에는 칼라오라 탑(Torre de la Calahorra)이 있어서 그곳도 들러봅니다. 탑 내부는 이 마을의 옛 모습을 설명해 주는 전시관이 있습니다. 2층 공간에는 커다란 벽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화려했던 옛 이슬람 왕실 풍경으로 보입니다. 잘 그렸다 싶습니다. 또 층층 계단마다 벽을 파고 만든 자그마한 공간 안에 전시해 놓은 옛 무슬림 양식 악기들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칼라오라 탑. 아주 앙증맞게 작은 크기이지만 꼼꼼하게 잘 정비되어 있는 관광 코스다 싶습니다.

다리를 다시 건너서 메스키타 왼쪽으로 가면 13세기경에 지어졌다는 동방기독교 성(Alcazar de los Reyes Cristianos. 코르도바 성)이 있고, 메스키타 북쪽으로 가면 비아나 궁전(Palacio de Viana)도 있습니다만, 내가 무슨 성이나 궁전 구경에 목을 거는 놈도 아니고 그저 바람 부는 대로 설렁거리며 혼자 자적하는 것을 즐기나니, 고놈들은 미안하지만 패스하고 메스키타 주변 올드 타운 골목에만 집중합니다. 성 궁전 구경이야 이번 여정에서 앞으로도 실컷 할 것이고 말이죠.




그러다가 너무 걷나 싶어서 잠시 노천카페에 들러 의자 끌어당겨 앉습니다. 그리고는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세 시간 넘게 걸어 댄 다리 좀 쉬게 합니다. 일주일 정도 다리품 팔았던 내 육신은 벌써부터 힘이 부치는지 틈만 나면 쉼을 원합니다. 예순 나이 목전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입니다.

2012년, 그러니까 내 나이 쉰 살 됨을 기념하겠다고 이번처럼 배낭 매고 한 달 코스로 동유럽을 뛰었을 때, 그때만 해도 하루 8~10km 걷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장거리를 어렵지 않게 돌아다니는 비결, 30분 걷고 5분 쉬기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껏 5~8km 정도요, 틈나는 대로 쉬어 주는데도 하루하루 지나면서 버겁다 싶습니다. 하지만 이겨내 보렵니다. 악으로 깡으로!


이렇게 걸어서 여행 다니는 것, 앞으로 언제 또 오랴 싶은 마음에 오기가 생깁니다. 오기. 그렇습니다. 이번 여행은 분명 오기가 작동되고 있습니다. 한국을 떠나며 품었던 두 가지 걱정거리를 극복해 보자는 그 오기.

기운 좀 챙겼으니 이제 그라나다로 돌아갈 시간. 가서는 일단 일식집 우동을 저녁 끼니로 삼고 그런 후 숙소에 들어가 샤워 좀 한 후 마을 위쪽에 위치한 알바이신 고지대에 올라가서 야경을 즐길까나 어쩔까나······.     

자, 시외버스 터미널로 돌아가는 도중에 풍물시장에 다시 들릅니다. 문제의 그 매장에 다가가서 아까 봐 두었던 해골을 집어 들었습니다. 쥔 사내놈은 몸을 안쪽으로 돌린 채 통화 중입니다. 팔짱 낀 채 괭이 쥐 노려보듯 하고 있자니 사내놈, 통화 중에 흘깃 고개 돌려 나를 발견합니다.     


나 : 야, 나 또 왔거든? (골라잡은 해골 보여주며 씩 웃어줌) ㅋ~

놈 : (누구시더라? 하다가 알아채고는 움찔) 에?······.      

그렇게 한 5초 정도 포즈가 지난 후, 녀석은 기가 눌림과 동시에 무엇인가를 작정하는 표정이 됩니다. 일단 승기는 잡았습니다.     

놈 : (통화 끊고 호흡 조절한 후) ······그래, 얼마에 사시려고요?

나 : (숨도 안 쉬고) 6유로!     

너의 아까의 5유로에의 절대 안 됨에의 의지는 인정해 주마.     

놈 : (하아~) 노우! (해 놓고는 잠시 뜸) 저······, 8유로, 오케이?

나 : (숨도 안 쉬고) 7유로!

놈 :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그러지 말고······, 8유로로 해요.

나 : (숨도 안 쉬고) 야, 나 이거 사러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거든?

놈 : (미치겠네) 어······, 하, 한국. 예쁜 나라지요.

나 : (숨도 안 쉬고) 스페인은 더 예쁘더라. 그러니까 7유로!     

폭풍 같은 이 몰아침. 얼른 내놔라, 이?     

놈 : (아오~ 애들립에서 밀리네) ······알았어요.

나 : 울지는 말고!

놈 : 킹······.     

결국 예상 가격 7유로에 설탕해골을 손에 넣었습니다. 사실 7유로도 비싼 축인데 봐 준 것입니다.

이놈아, 내가 실은 말이다, 일찍이 중국 장사치들이 몸서리를 쳐대었던 놈으로 뭐든 간에 4분의 1 가격으로 후려쳐서 물건을 사곤 했느니라. 그런 악명을 중원 강호 일대에 떨치던 내게 어디서 개기고 있어······. 투덜투덜 포장해 주는 녀석에게 덕담 한 마디 해 줍니다.     

나 : 너 복 받을 거다, 잉?~ ^^

놈 : (지렁이 이 가는 소리 마셔) 잘 가기나 해요~ ㅠㅠ

나 : ㅋㅋㅋ     


아름다운 구매 행각을 상큼하게 마무리하고는 콧노래 흥얼대며 그라나다로 돌아왔습니다. 그라나다로 돌아오자마자 알카이세리아 시장 근처에서 한국적 뜨끈한 탕국물에의 유혹에 의해 백 번 양보하는 심정으로 한식당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사실 나는 외국여행 중에는 한식을 웬만하면 취하지 않습니다. 가격도 비쌀 뿐 더러 현지에 갔으면 현지 음식을 존중해 주는 것이 여행 의미도 살리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검색 결과, 상당히 먼 곳에 식당 하나 뜹니다. 마침 오늘은 휴업이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동 국물로 가야겠군, 하고 일식당 검색. 마침 시장 입구에 하나 뜹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일식당. 들어가자마자 메뉴를 보니 분명 우동이 있습니다. 라면도 있더군요. 일본 라면, 몇 년 전 오사카에 갔을 때 제법 큰 라면 전문식당에서 사 먹었다가 빈정 상한 적 있습니다. 맛이 없어서. 그런데도 일본 여행 가서는, “라면 하면 일본 라면!~” 이런 어줍지 않은 믿음을 부여잡은 채 검색에 뜨는 식당 앞에 꿀꿀이 죽 기다리는 돼지들마냥 줄 서서 기다렸다 사 먹는 사람들 보면 여러 가지로 안쓰러워 보입니다. 차라리 고수 왕창 풀고 돼지고기 토핑을 얹어 먹는 중국 라미엔(拉糆)이 더 맛있습니다, 나는.

그런 불편한 기억이 떠올라 라면 대신 우동을 주문하고는 계산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10분 후 나온 우동이라는 것이, 국물 없는 볶음우동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볶음우동. 왜 국물이 없느냐, 이것은 내가 원하는 국물 있는 우동이 아니다, 여점원에게 물으니 저네들은 이렇게 만들어 판다, 국물을 원하면 라면을 주문해라, 그럽니다. 망했습니다. 그래도 먹어는 보자고 두어 젓가락 입에 우겨 넣고 보니 목이 메어 옵니다. 이놈들은 식당에서 물도 주지 않습니다. 사 먹어야 하는데 마침 가지고 다니던 물은 코르도바에서 다 마시고 온 상태. 조용히 젓가락 내려놓고 일어섰습니다. 안절부절 못하는 여점원에게는 오마 샤리프의 우아한 미소를 날려 주고는 식당을 떠났습니다. 차라리 얼른 숙소로 돌아가서 와인이나 병째로 나발 불란다······.     

누에바 밤거리를 거닐며 어젯밤처럼 멋진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을 즐기니 기분은 다시 좋아집니다. 오늘 밤 알바이신 야경 감상은 생략해야겠습니다. 좀 피곤하네요. 대신 와인으로 목 축이며 넉넉하게 쉬기로 합니다. 내일 아침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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