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일대기
점심은 바쁜 영업팀이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지 않는 이상, 항상 같이 나가 먹었다.
인원은 적었지만 마음이 편한 사람은 선배 밖에 없었다. 회계의 또래 여자아이나 대리님, 영업팀 등등 모두 내가 대하기엔 활발했고 관심사가 달랐다. 그래서 점심도 가능하면 선배 옆에 붙어먹었고, 선한 마음의 선배 역시 적응할 수 있도록 잘 챙겨주었다.
입사 첫날 점심에서 사람들에게 나는 '생각보다 많이 먹는 아이'로 각인되었다. 마른 체형이라 밥을 남길 줄 알았지만, 실상은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먹어버린 것이 그 이유였다. 많은 회사가 체형 대비 많이 먹는 모습을 좋아했고, 실제로도 체구보다 많이 먹는 편이라 오히려 더 잘 먹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느 날 전체 회식이 잡혔다. 일이 많기 때문에 점심 회식을 하게 됐다.
당시 점심 회식 개념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나는 굉장히 깜짝 놀라는 동시에 좋아했다. 회식은 한식 뷔페로 가게 되었고, 무엇보다 나의 이미지 보존(?)과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무언가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배가 터지도록 몇 접시를 먹었고, 대표님으로부터 '이야 너는 정말 대단하다!' 하는 웃음이 섞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웃기게도 터질 것 같은 배만큼이나 뿌듯함을 느꼈다.
영업팀 부장님은 40대 초 여성이었지만, 카리스마가 굉장한 분이셨다.
목소리도 또랑또랑하고 눈빛도 빛났다. 똑 부러지고 확실함이 장점이었다. 대표님의 늦은 출근이 가능한 것도 부장님이 내부 관리를 하기 때문으로 보였다.
어쩌다 하게 된 야근 날, 영업팀 분들이 대표님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애 같다는 것과 판단력 미스가 많다는 내용이었다. 대표님을 볼 때면 조용하지만 무언가 단단한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나로서는 놀랄 이야기였다. 영업팀 부장님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대표님 대신 처리하고 있었던 게 많았다. 그래서 더욱 대단한 분이라고 느꼈다.
야근을 하고 있을 때 거래처 사장님이 방문했다. 용역 업체 사장님이 떠오르는 느낌의 분이셨다. 오래 알고 지냈는지 영업팀 부장님과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눴다.
"*부장은 결혼 안 해?"
대화 도중 거래처 사장님이 대뜸 부장님께 물었다. 부장님은 미혼이었다.
소개해 준다는 말에 부장님은 상대의 나이를 물었고, 자신보다 앞자리가 더 높은 것에 괜찮다며 거절을 했다. 거래처 사장님은 다른 점을 어필했지만 부장님은 극구 사양했고, 사장님은 많이 아쉬워했다.
며칠 후, 방문했던 거래처 사장님과 다른 사장님들까지 함께하는 회식이 잡혔다.
아쉽게도 이번엔 저녁 회식이었다. 걱정이 앞선 나는 선배에서 보통 회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었다. 밥을 먹고 2차로 노래방을 갈 때가 많다고 했다. 용역 업체 회식에서 노래방 회식을 겪은 뒤로 기피하게 된 나는 회식날까지 불안한 마음을 지녀야 했다.
그리고 회식 날,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언가 맛있는 걸 먹었다. 거래처 분들은 영업팀 부장님과 대표님과 주로 이야기를 했고, 나머지 직원들은 따로 앉았다. 나는 선배 옆에 앉아 따라가기 힘든 대화를 이해한다는 듯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들었다.
식사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노래방 이야기가 나왔다.
그 사이에서 부장님의 혼사에 대한 거래처 사장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다른 사람을 추진하고 있는 듯했지만 영업팀 부장님은 또 한 번 거절을 했다. 결국 해내지 못한(?) 거래처 사장님은 대표님과 함께 노래방으로 사라졌다.
대체로 모두가 노래방을 갔던 것 같지만, 영업팀은 일이 많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리 안 내켜하여 가고 싶은 사람들만 가게 되었다. 회식날 전까지 걱정하던 나는 그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영업팀 부장님은 은근히 나를 챙겨주셨다.
가끔 먼 거리로 점심을 먹으러 갈 때가 있었는데, 선배가 다른 직원분과 이야기 하게 되면 나는 항상 말없이 혼자 걸었다. 그 모습을 봤는지 언젠가 영업팀 부장님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긴 거리를 부장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었다. 부장님은 나에게 꽤 여러 질문도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도 말해주셨다. 인생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 자신이 살아온 선택과 행동들은 덤덤히 말해주셨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영업팀 부장님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40대 초 미혼의 여성이었지만 히스테리 같은 것도 없었고, 항상 직원들이 어려움은 없는지 살펴보고 보호해 주셨다. 자신의 팀이 아니더라도 전반적으로 신경을 써 주셨기에 모든 직원들이 부장님을 좋아했다. 그런 부장님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 것은 일잘러인 것과, 신축 자가 아파트를 대출 없이 구매했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당시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랐지만) 회사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은 대부분 영업팀 부장님이었다. 회사 생활도 오래 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오셨음에도(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악착같이 돈을 모으며 결국 자가를 장만한 것이었다. 자기 관리도 철저한 듯 피부가 굉장히 희고 깨끗했다. 흔히, 일에 너무 집중해서 혼사를 놓친 것 같지만 마음이 급하지도 않고 자신의 신념을 잘 지키는 분이셨다.
(주변에서는 집, 차도 있는데 일잘러에다 사회생활도 할 줄 아는 여성이다 보니 왕왕 소개를 시켜주려는 것 같다.)
야근도 없고 사람들하고는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퇴사를 결정하게 된다.
이유는 텍스타일 보다 패턴을 더 좋아하고,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패턴을 그만뒀지만 미련은 여전했다 마음 한쪽 구석이 계속 불편했기에 스스로 텍스타일도 좋다고 입 밖으로 말하면서 암묵적으로 외면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 마 어느 계기로 인해 나는 패턴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전에도 패턴을 했다가 텍스타일로 다시 온 건데, 다시 텍스타일로 오는 거 아니야?"
1:1 퇴사 면담에서 대표님의 말에 나는 텍스타일로 다시 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고 매우 뚜렷하게 말했다. 사장님은 호탕하게 웃다가 회유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판단했는지 퇴사 수순으로 진행했다.
선배와 부장님은 아쉬워했고, 영업팀 사람들은 싸늘했다. 그도 그럴 게, 바로 전 날 영업팀 대리님은 본격적으로 일을 배워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며 무언가 나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안함 보다는 눈치가 보였다.
학원에 퇴사 의사를 말하자 원장님은 더 다니지 아깝다는 말을 했다.
텍스타일에서 정말 좋은 회사인 것은 맞았다. 업무 강도가 높지 않으면서 실력을 올리기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패턴으로 가라고 말했다. 나의 결정을 말하니 원장님은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다.
막 시작하려고 할 때 포기한 것 같아 미련이 컸다. 용업 업체 사장님이 하는 말 하나로 너무 쉽게 포기한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패턴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지만, 최소 평균 근로 조건의 맛을 느낀 나는 용역 업체에서 일했던 환경으로는 다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패턴 학원을 다니려고 했다. 텍스타일 학원의 취업 연계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패턴 할 줄 아는 친구가 필요하다는데.."
퇴사를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원장님이 아시는 분이 패션 회사를 차렸고, 패턴을 할 줄 아는 막내가 필요하다며 나에게 말했다. 정확하게는 샘플실로, 패턴 일 뿐만 아니라 보조 잡무도 같이 해야 했다. 마침 위치도 의정부였다. 회사를 위해 1년 계약을 했던 자취방이 다시 쓸모가 있게 되었다. 하루 정도 고민했던 나는 수락했다.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게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 원장님은 떨떠름했다고 한다.)
그렇게 의정부의 샘플실 근무가 다음 횡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