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일대기
학원 선생님의 추천으로 합격한 곳은 용산에 있었다. 그때 한국에 옛 동네가 아직도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오래된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에 있었고, 회사 건물도 그러했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작은 규모였지만, 건물 한 층을 다 사용하고 곳이었다.
디자인 팀은 실장님, 과장님, 20대 사수 언니와 30대 사수언니, 그리고 나로 총 5명이었다. 시장과 브랜드 파트로 나뉘었고 나는 브랜드를 맡고 있는 과장님 직속으로 일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자리 바로 뒤에 있는 DTP에서 샘플 원단의 컬러를 맞추고 출력하는 것, 샘플 디자인 디자인, 시장조사 자료 정리 및 스캔, 샘플실 관리가 주였다. 처음으로 감각이 필요한 일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DTP 컬러 맞추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사수 언니들은 2~4번 만에 척척 맞췄지만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근무 기간 동안 1개의 디자인을 여러 번 시도하기 일쑤였다.
직원들은 전반적으로 순한 사람들이었다. 디자인팀도 그러했다. 하지만 실장님은 카리스마가 상당했다.
톰보이를 연상케 하는 실장님은 어투가 날카로웠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신 실장님은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중간에 어떠한 일로 서로 어색해지기는 했지만)
대학 졸업 후 줄곧 근무를 하신 장기 근무자였기에, 사장님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과 친근했다.
과장님은 노후한 건물의 회사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항상 깔끔하고 우아함이 묻어났다. 컬러 감각도 상당했고 액세서리나 패션에도 관심이 많은 분이셨다. 실장님은 상냥하고 조곤 한 어투를 지녔지만, 이상하게 친밀해 지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30대 사수 언니는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어투도 조용했고 굉장히 차분했다. 기독교에 큰 관심과 활동을 했고 국내에선 보기 드문 굉장한 콜라병 몸매의 소유자였지만, 전체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20대 사수 언니는 상당히 활발했다. 에너지가 넘쳤고 일도 운동도 열정적으로 했다. 클럽 음악을 좋아하지만 모태 기독교라 한 번도 클럽에 가본 적은 없는 분이셨다. 관리에 신경도 많이 쓰고 하체 라인이 유전적으로 예뻤음에도 운동을 하는 분이었다. 디자인 팀의 분위기 메이커였고, 초반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실장님의 마음을 돌릴 정도로 끈기도 있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리는 충원이 아닌 결원이었다. 20대 사수 언니가 퇴사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입사 후 알게 되어 아쉬움이 컸다. 이유는 20대 사수 언니가 정말 잘 대해주었고, 잘 알려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비타민 같은 분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그래서 내 자리가 부담되었다.
나의 이러한 성향을 과장님도 아쉬워했다. 20대 사수 언니는 과장님 하고도 친했기에, 퇴근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딱히 눈치를 주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심심해하거나 아쉬워하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외근이 많은 과장님은 따로 드셨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실장님은 항상 무엇을 먹을지 주제를 꺼냈다. 사수 언니들은 메뉴를 말하면 실장님은 나름의 이유를 대며 나은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점심 메뉴 결정은 항상 골머리를 앓았다.
여유가 남으면 동네를 걸으며 산책을 하기도 했다. 도보 한가운데에 철도도 있고 공원도 있는 곳이었다. 노후된 동네였지만 옛 정이 생각나는 곳이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흔하지는 않지만 용산 아이파크 몰을 둘러보기도 했다. 언젠가 30대 사수 언니와 실장님과 함께 몰을 돌았다. 실장님은 나에게 많이 보러 다니라고 했다. 항상 말은 날카로웠지만 뜻은 따뜻했다.
입사 후 얼마 안 됐을 때였다.
30대 사수 언니가 갑자기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싸며 귀여워!라는 말을 했다. 무방비로 정리하던 나는 깜짝 놀라 '언니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머쓱해진 30대 언니는 웃으며 팔을 풀었고, 내 옆에 있던 20대 사수 언니는 과정과 모습을 봤다.
몇 시간 후, 20대 사수 언니는 나에게 조용히 그런 일이 있을 땐 하지 말라고 그대로 말하기보다, 불편하니 자제해 달라는 형식으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성이었다면 성희롱이었다. 잘못된 행동을 단호하게 지적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알겠다고 말했다.
20대 사수 언니는 자신의 여동생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항공 지상직을 준비하는 동생은 쌍꺼풀이 진했다. 사수 언니와는 완전 다른 스타일이었다. 동갑이라서 나름 대화가 잘 맞았지만, 많은 시간을 보내진 못했다.
5명에서 4명이 되자, 시끌벅적했던 분위기는 바로 차분해졌다. 나는 활달한 성격도 아니었기에 분위기를 올릴 수 없었다. 애초에 올리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럴 용기나 성향 자체도 아니었다.
다들 20대 사수 언니의 존재를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어쨌든 시간은 흘렀다.
자리는 칸막이 없이 나란히 줄 지어 있는 구조였다. 그래서 서로 대화하기도 편했다.
실장님은 주로 30대 사수 언니에게 자녀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언니는 내향적이지만 사회생활을 잘하는 타입으로, 누가 봐도 적당히 호응이나 액션을 잘해줬다. 가끔 TV나 예능, 연예인 이야기도 했지만, TV를 보지 않는 나에게는 어떤 이야기도 이해가 어려웠다.
언젠가 낯선 사람이 사무실에 있었다.
처음 보는 여성분이셨는데 실장님이 오자 신나게 대화를 했다. 그리고 넓은 책상이 있는 구역에서 패턴을 떴다. 샘플 원단으로 샘플 옷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었고, 그때만 오는 분이셨다. 아이가 있으신 여성분으로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패턴을 뜬다는 사실에 관심이 갔지만, 항상 자녀 이야기를 하시던 분이라 금세 거리가 생겼다.
귀엽다며 보여주는 자녀 사진을 봐도 어떻게 호응해야 할지 몰랐다. 30대 사수 언니처럼 너무 귀여워요~라는 말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관심 없는 타인의 자녀에 대해 호응을 해야 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피로하고 스트레스를 줬다. 이때의 경험으로 자녀 이야기를 하는 상사나 동료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입사한 지 꽤 시간이 지나서야 사장님을 처음 보게 되었다. 마른 체형의 사장님은 새로 온 디자이너구나? 한마디만 하고 관심 없는 듯 실장님에게 말을 이어갔다. 사장님은 회사보다 여행을 더 많이 다니는 사람이었다.
매일 퇴근하기 전, 사장실의 컵을 치우고 책상을 닦는 일을 해야 했지만, 언제나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사장님은 형에게 회사를 받았다고 한다. 최초 사장님은 형님이셨고, 동생인 현재 사장님이 형의 여러 사업체 중 하나를 받은 거라고 했다. 정확히 사장님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매출이 떨어질 땐 조금은 예민해진다는 건 알았다.
30대 사수 언니는 가끔 ㄴ스킨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경로가 있었다. 그래서 구매가 가능할 때만 팸플릿을 가져왔다. 제품 만족도가 높았던 회사 사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니를 통해서 주문을 했다. 처음 접했던 나는 괜스레 따라서 1개 정도를 주문했었다. 기억에 남지 않는 걸 보면 나에겐 그냥 그랬나 보다.
언젠가 구강 쪽에 문제가 생긴 30대 사수 언니는 병가를 가게 됐다. 수술까지 했기에 카톡으로 괜찮은지 물었다. 언니는 아무런 말 없이 수술받은 후의 자신의 셀카를 찍어 보냈다. 꽤 심한 상태였다. 깜짝 놀란 나는 쾌유를 바랐고, 어느 정도 나아진 언니는 회사에 다시 나왔지만 항상 힘이 없고 어딘가 불편함을 호소했다.
언니에겐 여동생이 있었다. 회사에서 마녀라고 불린다는 동생 분은 돈을 잘 벌었다. 부업도 하며 자신의 능력도 있었지만, 부유한 남편 분을 만나 더 많아졌다고 했다. 언니는 동생이 나빴는데 운이 좋고 잘 된다고 욕하면서도 부러워했다. 동시에 현재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한탄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몸매의 소유자라 성희롱도 많이 당했고, 나이가 드니 몸은 항상 아픈 것에 슬퍼했다. 동생은 믿지 않는 종교를 자신은 믿고 활동도 하고 있는데도 자신이 더 못 사는 것에 자기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는 예전에 다녔던 회사는 야근이 많아 항상 저녁마다 친구를 불러 술과 담배를 했다고 했다. 기독교를 믿게 된 지금은 둘 다 안 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그때 술 담배 했던 게 지금 다 돌아오는 게 아닐까요? 하는 말을 했다. 언니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사수 언니와 나의 관계는 어색해졌다. 계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 쪽에서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된 것 같았고, 나는 자기 연민이 강한 언니와 점차 맞지 않게 되었다.
"너 내가 만만하니?"
샘플 원단실을 정리하고 있는 내게 온 사수 언니가 갑자기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아니라고 답하자 언니는 그럼 왜 그렇게 행동하냐며 반문했다. 당시 어떠한 언행을 보고 언니는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언행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언니가 느꼈던 그러한 생각을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느끼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말도 함께 했다. 오해가 풀린 것인지, 할 말이 없는 것인지 2초 정도 말없이 서 있던 언니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언니가 간 뒤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길어서 2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