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이하기에 좋은 곳이 있다. 식물들이 이름표를 달고 종류대로 새싹을 내미는 주립대학 수목원이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긴 우기를 뚫고 올라온 연두의 싹들이 기특하다. 첫발을 내딛는 아기를 응원하는 마음이 된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중 유독 마음을 사로잡는 나무가 있다. 꽤 큰 덩치의 그 나무는 도끼로 가지를 무참히 잘라낸 상처들을 그대로 갖고 있다. 단번에 잘라낸 작은 가지의 상처와 꽤 큰 가지였던지 네댓 번씩 도끼를 댄 커다란 상처들이 보인다. 다이아몬드나 오각형을 닮은 검은 상처들이 기둥을 덮었다. 물오른 연둣빛이 감도는 겉살과 대조되는 검은 속살의 도형이 과감하다. 파릇파릇 생기가 도는 사실화들 속에서 그것은 마치 검은 빛을 발하는 한 점의 추상화다. 언뜻, 빛나는 선들이 그림에 겹쳐진다.
킨츠기(金継ぎ)는 그릇의 깨어진 금이나 조각들을 금(金)으로 수리하는 일본의 예술이다. 금이나 조각은 불상사다. 흠을 가리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만, 킨츠기는 그 깨짐을 가리지 않고 반짝이는 금으로 더 드러낸다. 깨짐은 지나간 상처와 허물이다. 치부를 인정하고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부서진 조각들을 고수의 손에 맡기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상처가 처절하다는 건 그만큼 용기 내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금(金)을 사용했다 해서 다 예술이 되는 건 아니다. 어떤 킨츠기 작품들은 압도적인 재료에도 불구하고 깨졌다는 사실을 넘어서지 못한다. 금(金)과 더불어 필요한 건 작가의 소양이다. 상처의 본질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건 결국 고수의 손이다. 깨어진 그릇도 소중히 여기는 고수의 마음이다. 그의 손 안에서 금(金)은 금을 넉넉히 덮는다. 금선은 예상치 못한 방향과 모양으로 뻗다가 휘다가 고이며 보는 이의 눈을 잡아당긴다. 아름다움을 압축한 선과 점의 추상미술이 된다.
도끼가 만든 참혹한 것, 그 검은 도형에서 아름다움이 보이는 순간 마음이 울컥한다. 피멍 든 무릎으로 다시 일어난 아이를 바라보듯 대견하다. 금을 금(金)으로, 상처를 예술로. 얘야, 내가 너의 상처를 예술로 바꿀 거야. 그 상처가 아무리 아파도. 나를 잘 아시는 분께서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내게 속삭이신다. 이토록 명료하게 전달되는 은밀한 메시지. 그 세심하심에 또 한 번 감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