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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pr 01. 2024

포인트 노 포인트(Point No Point)

봄이 오는 바닷가에서

  

                                                       


   작은 등대가 있는 곶(point)이 있다. 묘한 이름의 바닷가 공원이다. 탐험가 Charles Wikes는 멀리서 이곳을 보고 배들이 닻을 내리기에 알맞다고 여겼다. 막상 도착해보니 포인트 해변의 물은 얕고 땅은 진흙이었다. 실망한 그는 그곳의 이름을 포인트 노 포인트(Point No Point)로 지었다. 실망한 건 그였고 내겐 조용한 시간을 보내며 생각에 젖어 들기에 더없이 적당한 곳이다. 몸에 기운을 불어넣기에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식히기에도 좋다. 발끝에서 작은 생명과 그 흔적들을 만나고, 고개를 들면 먼 데서 배가 나타나거나 돌고래 떼들이 검은 등을 보이며 지나가기도 한다. 

   모처럼 해가 얼굴을 내미는 아침, 낚시 도구를 챙기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냉장고가 비어서 가야 한다고 했지만, 다 알고 있다. 그는 먹는 것 보다 잡는 걸 즐거워한다는 걸. 토요일이라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했다. 남편은 낚시용 방수 장화와 바지를 꺼냈다. 많이 잡힐 거야. 확신에 찬 그 말에 나 혼자 물음표를 매달고 씩씩한 그의 걸음을 따라 걸었다.

   오늘따라 하늘은 맑고 하얗게 눈을 얹은 먼 캐스케이드 산이 선명하다. 바다가 어찌나 음전한지 말소리조차 조용해야 할 듯하다. 이렇게 포근하게 맞아주다니 마음도 잔잔해진다. 남편은 낚싯줄 끝에 새우를 달아 멀리 던져 넣었다. 나는 찰랑이는 물가를 따라 남으로 걷는다. 큰 수달 한 마리가 해변 가까이에서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뭘 하는지는 몰라도 녀석은 그것을 즐기고 있다. 지나가다 마주친 여자가 말했다. 아까부터 수달이 자기를 계속 따라왔다고. 누가 누구를 따라온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해변에는 떠내려온 유목(driftwood)이 그득히 쌓여있다. 어찌나 물에 시달리며 여기까지 왔는지 뾰족한 모서리도, 거친 껍질도 없다.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이 스며든 유목으로 모래 위에 작은 집들을 지어놓았다. 티피(tepee)처럼 나무를 세워 지은 삼각형, 귀틀집을 닮은 사각형이 보인다. 집터에서 난 것으로 지은 집은 짓고 무너지기를 반복해도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바람과 햇살이 간간이 허락되나 타인의 시선은 슬쩍 가릴 수 있는 그곳에서 누군가 쉬었다가 떠났다.   

   마냥 걷다 보니 저만치 눈앞에 왜가리 한 마리가 물에 발을 담그고 서있다. 귀부인처럼 긴 목으로 우아하게 걸으며 풍경을 음미하다가 가끔 고개를 숙여 발아래 지나가는 물고기를 찾는다. 이토록 우아한 사냥이라니. 새의 등 뒤로 구름에 가려진 레이니어가 보인다. 언제나 거기에 있어 든든한 산이 오늘은 반쪽 얼굴만 보여준다. 

    한 소년이 커다란 막대기로 모래밭에 글을 쓴다. I love… San… 여자 이름인가? d… wiches. 아하! 너 아직 애인이 없구나! 낚싯대에 꿈을 드리운 남편처럼 소년도 꿈을 꾸고 있다. 언젠가 샌드위치를 대신할 누군가를 꼭 만나게 될 거라고.

   누구나 한때 꿈을 꾼다. 누군가는 그 꿈을 이루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라면서 꿈이 점점 작아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지기도 한다. 온갖 장비와 도구를 갖추고 애써 얻고자 했던 무엇이 그리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명 날 수도 있다. 그 꿈을 이루었다 해도 구하는 것이 얻어지면 행복할 거라는 기대가 무너질 수도 있다. 만선을 기대하는 배가 힘차게 바다로 달려 나가도 돌아올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연이 허락한 것뿐이다.  

   잠시 한눈판 사이 배가 통통한 갈매기 한 마리가 미끼로 사 온 새우 봉지를 뜯어 포식하고 있었다. 놀란 내가 달려가는데 녀석의 걸음은 여유롭기만 하다. 멀어지는 척 몇 걸음 물러서다가 다시 새우 근처로 다가온다. 녀석은 이 구역의 베테랑 생존자다. 가끔은 남의 양식을 노리는 뻔뻔한 포식자들이 누군가의 성실한 삶에 끼어들기도 한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잡은 물고기는 달랑 한 마리다. 실망했던 탐험가처럼 그가 아쉬워한다. 다음에 또 오자고 달랬지만, 사실 그 순간 나는 주머니 속 조개껍데기를 만지작대며 흐뭇했다. 그가 알면 다 두고 가자고 할까 봐 몰래 웃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마음이 설레는 건 나의 병이다. 

   주머니만큼 두둑한 것이 있다. 봄이 몰고 오는 수더분한 바람을 폐포에 가득 담았다. 먹물 머금은 붓이 마음껏 곡선을 그리듯 노는 수달과, 우아한 사냥꾼 왜가리, 해 지는 저녁에야 온몸을 드러내며 붉은빛을 발하던 레이니어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니. 오늘은 수지맞은 날이다.  

   꿈을 이루진 못했어도 이 해변에서 만난 모든 것으로 나는 이미 만선을 이룬 것은 아닐까. 거창한 무엇을 성취하지 못해도 한 걸음씩 디뎌온 걸음이 결국 만선을 이룰지도 모른다. 포인트 노 포인트에 생각 아닌 생각들이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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