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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May 24. 2024

속초는 속속들이 초록

고맙다 친구야. 이 찬란한 날!

   속초에 가고 싶었다. 몇 해 전 그곳에 다녀온 언니가 속초의 매력에 빠진 후부터였다. 자연이 선물세트같이 담긴 속초는 내가 사는 시애틀과 닮은 점이 많다. 

   올봄 드디어 친구와 함께 속초 여행을 떠났다. 밀린 수다로 흥겹게 동으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미시령이었다. 산을 돌아가던 옛길과 달리 직선의 긴 터널들이 생겼다. 금방이야, 하던 친구의 말이 실감났다. 영嶺을 넘어서자 동해가 너른 팔로 반겼다. 일상의 벽을 넘고 싶을 때 마음 안에 출렁이던 그 동해였다. 동해와 嶺 사이, 거기 속초가 있었다.

   코 앞에 바다가 펼쳐진 소나무 숲에서 커피를 마셨다. 모래밭에 놓인 원색의 의자에 앉아 하늘로 두 팔을 올렸다. 손가락 사이,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파고들었다.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고 그들의 등 뒤로 파도가 덩달아 넘실댔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친구와 나도 그 시간을 담아두려고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손가방 두 개를 샀다.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각자의 가정사로 힘겨웠던 때 서로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이유로, 오랜 세월 친구로 남았다. 내가 미국으로 이주한 후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몇 해 만에 만나도 엊그제 본 듯했던 건 마음으로 서로의 안녕을 바라는 투명한 선의善意 때문일까. 각자의 모퉁이가 세월의 물결에 다듬어진 유목流木 같아진 지금, 함께 있어 편안하다. 모두 내가 옳다는 세상에서 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바닷바람 같은 소통이다.  

   영랑호의 오월은 초록이 무성했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영랑호 윗길을 택했다. 가로수 그늘 따라 호수의 반 바퀴를 도는 코스. 호수에 가득한 윤슬을 부수며 물새가 날아와 앉고, 이름 모를 새들이 우리들의 대화에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풀에 덮여버릴 듯한 낡은 집, 들판과 언덕도 지나갔다. 줄곧 앞서가던 것은 초록이었다.   

   농장 간판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의 발이 그리로 향했다. 요즘들어  공감하는 것은 식물 사랑이다. 한강의 소설 속 영혜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지. 다른 존재를 해할 수 없는, 폭력을 거부하는 나무였다. 오래전 드라마 속 여주인공도 같은 말을 했다. 한곳에 뿌리내리는 나무처럼 헤어짐의 아픔을 피할 수 있기를 바라서였다. 폭력과 이별, 또 다른 인생의 격랑을 겪다 보면 식물이 주는 잔잔한 위로에 점점 마음이 기울게 되는가 보다. 

   농장엔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익숙한 꽃부터 처음 보는 작은 허브까지 여러 종류의 식물들이 주인의 살뜰한 돌봄을 받고 있었다. 친구는 클레마티스와 앙증맞은 꽃 화분 하나를 골랐다. 화분을 들고 걷는 친구의 얼굴이 선물 받은 아이같다. 다리가 아파질 무렵 저만치 주차장이 나타났다.   

   호수에서 얼마 걸리지 않아 낯익은 설악산이 몸을 드러냈다. 초록의 몸에 가파른 머리가 보였다. 오랜만이다. 대학 졸업여행으로 저 산을 넘었지. 그 무렵 내 마음은 미래로 가득 찼던지, 산과 바다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속초는 그저 영嶺 넘어 마을. 지금은 같은 산이 왜 이리도 위풍당당한 매력이 넘치는지. 줄곧 내게 무슨 말을 걸려는 표정이다. 시골순두부 식당 창으로 따라온 산에 자꾸 눈길을 빼앗겼다.  

   친구와 나, 각자의 삶에 앞으로 어떤 일들이 다가올까. 부디 오월의 속초와 같은 날들이 가득하기를. 속새 풀이 많아서 속초라 이름지었다지만, 나에게 속초는 속속들이 초록이다.  



학창시절, 서로 많이 달랐던 우리.  이젠 각자의 모퉁이가 유목처럼 시간의 물결에 다듬어져, 함께 있어 편안하다. 오랜 뒤에 서로의 말에  진정으로 귀 기울인다.
 저마다 제가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에서  서로의 희로애락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는 건  바닷바람처럼 시원한 소통.
구지  자물쇠로 묶지 않아도 투명한  선의. 확인하고 조르지 않아도 서로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바다를 향한 창처럼 맑다.
앙증맞은 꽃화분을 사들고 아이처럼 웃으며 영랑호 윗길을 걸었다. 아마도...속초는 속속들이 초록이라는 뜻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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