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여름날, 직장 동료가 모시 한복을 입고 출근했다. 어머니가 손수 모시풀을 키우고 옷으로 지어 딸에게 보내주셨단다. 동양의 마, 모시의 멋에 반한 사람들이 그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너도나도 한 벌씩 주문하고 싶다고 했다. 그 틈에 나도 이름을 적어넣었다. 다림질과 풀물 먹이는 과정이 번거롭기도 했지만, 육아와 직장생활로 늘 지쳐있던 그 시절, 모시옷은 나의 유일한 사치였다.
몇 해 전 봄맞이 행사로 꽃씨를 사러 갔다. 새롭게 뒷마당에 등장할 꽃으로 서양의 마, 아마꽃(flax)을 골랐다. 가녀린 줄기가 올라오고 자잘한 봉오리가 맺히더니 5월에 나풀나풀 파란 꽃들을 피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꽃이 오래간다고 칭찬했지만, 아침마다 꽃잎이 파랗게 발치를 덮는 이유가 궁금했다. 알고 보니 개화 기간은 3시간 정도, 매일 나를 반긴 것은 부지런히 이어달리기하는 새 꽃이었다. 더 격하게 반겨주었어야 했다.
꽃을 꺾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움찔했다. 가느다란 줄기가 어찌나 질긴지 웬만해선 부러지지 않는다. 바닥으로 코를 박아도 좀처럼 시들지 않는다. 인류의 조상들이 왜 이 풀로 옷을 지어 입었는지 알 수 있다. 아마로 만든 리넨은 의복용 섬유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여린 듯 강하게 오래 버텨온 풀이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웃는 김수영의 풀이다.
아마는 환경과 사람에 무해하다. 키울 때 살충제도, 많은 양의 물도 필요치 않다. 아마로 만든 리넨 옷은 면보다 훨씬 적은 양의 물로 세탁이 가능하다. 태우지 않아도 스스로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니, 흙으로 돌아갈 인간의 수의로도 적절하다. 오염된 인간을 감싸는 무해한 옷이라니. 과분하다.
아마를 거두어들이는 일도 남다르다. 뿌리에 섬유질이 많아 자르지 않고 뿌리째 뽑는다. 뽑힌 아마는 밭에 누워 자연 현상들을 겪는 인고의 시간(retting)을 보낸다. 이슬과 비에 젖고 곰팡이가 동원되고 바람과 햇볕이 말린다. 몇 주가 지나면 섬유질만 남고 불필요한 것들이 제거된다. 마른 아마를 두드리고, 훑고, 실로 꼬아 리넨을 만든다. 새것이지만, 어쩐지 조금 낡은 듯 보이는 리넨의 느낌은 이 지리한 시간을 견뎠기 때문인가 보다.
단순한 디자인은 리넨 옷의 질감을 더 드러내 준다. 어떤 모양의 옷을 짓느냐보다 원단 자체에서 풍기는 까칠한 멋으로 벌써 우위를 점한다. 몸에 붙지 않는 촉감으로, 아래로 살짝 떨어져 내리는 느낌을 준다. 특유의 구김조차 리넨이기 때문에 멋으로 간주한다.
인간에게 최적의 온도와 안전이 주어진다면 옷이 필요치 않을까. 옷을 입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엔 수치심이 있다. 가릴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누구나 마음에 담고 산다. 이런 인간의 몸을 덮어주는 풀 옷. 비바람 견뎌낸 너그럽고 무해한 풀이 날로 사나워지는 인간의 마음을 녹여주지 않을까. 리넨 옷을 입을 때 느끼는 편안함은 그 때문일까. 리넨 옷에선 풀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