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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Oct 13. 2024

아무것도 없다

생소한 평안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다. 맞은편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향긋하다. 농장 간판을 보고 들어온 길 끝에서 너른 풀 언덕이 기다리고 있었다. 농장 구경은 뒷전이 되고 마음은 벌써 언덕에 빼앗겼다. 자연보호 구역이니 훼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표지판을 지난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언덕을 오른다.

   이 언덕엔 어떤 방향 표시도 없다. 풀과 누운 풀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방향을 정하는 대로 걸음을 내딛고 그 걸음으로 풀이 눕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 풀 위를 걷는다. 길의 끝은 언덕 위를 향한다. 넓은 길로 내딛다가 좁은 길로 들어서니 누군가 엊그제 길을 낸 듯 발 아래가 푹신하다. 누운 풀의 환대다.

   풀내음을 잔뜩 머금은 탓인지 자꾸 미소가 새어 나온다. 멀찌감치 한 여인이 멈추어 서서 아까부터 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가까워지자, Hi! 내가 인사했다. 바람에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저도 알아요. 이런 곳에서까지 전화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하는데. 그녀가 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멋쩍게 웃었다. 아무도 꾸중하는 이가 없는데 스스로 부끄러워진 이유를 알 듯하다.

   등에 진 바다가 언덕을 오를수록 더 넓게 몸집을 드러내고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니 눈앞에 또 다른 바다가 맞는다. 그제야 내가 있는 곳의 지형을 떠올린다. 이곳은 남북으로 길게 누운 섬. 이 언덕에선 동쪽과 서쪽 바다가 보인다. 동쪽 바다를 바라보자면 여기 좀 보라고 조르는 서쪽 바다의 윤슬에 뒤통수가 따갑다.

   줄곧 따라오던 바람이 언덕 위에서 더욱 기운을 낸다. 귀가 멍해지고 사람들의 말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진다. 다음 순간 몸이 풍경화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나는 몇 번의 붓 터치로 그린, 먼데 흐릿하게 보이는 인물이 된다. 갑자기 생소한 평안이 몸 안으로 밀려든다. 아무 말 없는, 움직이지 않는 인물처럼, 그냥 가만히 여기 놓여있고 싶다. 너그러운 풀의 품에 아이처럼 안겨 마음이 풀처럼 눕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나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내가 외줄을 타고 있었나? 내려딛는 발이 겪을 충격을 넉넉히 받아낼 공기 매트가 필요했나?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난 괜찮다고 우기는데 턱없이 솔직한 몸이 덜컥 병이 나거나, 누군가 건네는 진심어린 한 마디 말에 주책없이 대성통곡을 하게 되는 때. 뒤늦게 나를 돌아본다. 나는 위로가 필요했다. 내가 몰랐던 나였다.

   들여다보면 이 언덕엔 온갖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그득하다. 모두 나름의 색과 모양을 가졌다. 그러다 몇 걸음 물러서보면 풀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같다. 같아 보이는 이유로 누군가는 이곳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시선을 당기는 주인공도 없이, 장식도 화장기도 없이, 바투 서서 함께 비바람을 견뎌낸 그들이 변덕스러운 바다를 초연하게 내려다본다.

   내려오는 길은 여러 갈래다. 직선으로 내려가다 꺾는 길, 숲 쪽으로 크게 돌아 내려가는 길. 사선으로 길게 뻗어 내린 길도 있다. 주인을 따라가는 강아지의 등이 풀섶에서 보였다 말았다 숨바꼭질한다. 멀리 언덕 위에 맨션이 보인다. 그 집이 들어선 땅도 한때는 이런 풀밭이었을까. 이 풀밭이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 화려한 맨션이 주연이 되고 풀이 조연이 되는, 그런 미래는 없기를 바란다.

   그 후로 오랫동안 다시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바람은 접는 것이 좋겠다. 나를 만진 그 평안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어서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게 될까 봐서다. 그 풀 언덕이 마음 안에서 부디 여전하길 바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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