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무 가지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아침 숲에서 시집을 펼친다. 청량한 숲의 공기와 햇살에 기대어 귀를 열어본다. 시인의 마음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투덜거렸지. 어쩐 일인지 이 햇살 아래에선 넉넉한 마음이 된다. 이리저리 헤집다가 희미한 언어들이 안개 걷히듯 조금 빛으로 나오고. 삐쭉 열린 문틈. 아직 많은 것들이 문 뒤에 남아 있다. 문을 활짝 열지 못하고 거기서 걸음을 멈춘다.
그냥 그것으로 됐다. 누군가의 마음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건 본래 어려운 일이니까. 욕심을 낸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유 없이 선택된 어휘는 없으니 어디엔가 공감에 이르는 이들이 있을 테지. 언젠가 어느 컴퓨터 공학자의 아내가 말했다. 남편의 두툼한 책을 펼치면 단 한 줄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내가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그녀의 말에는 지혜가 있다.
상징과 은유가 아닌 보통의 언어로도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다. 닭 날개를 좋아한다는 쉬운 말을 못 알아듣기도 한다. 그 사람의 배우자는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닭 다리만 사왔단다. 마음 아프다는 말은 그냥 등 두드려달라는 말인데 옳고 그름을 따지자고 든다. 사람의 몸을 침대 크기에 맞추려 드는, 침대에 갇힌 아집은 이해를 막는다. 말의 전달은 시가 아니라도 이미 난제니, 시를 통째로 삼키려고 너무 달구치지는 말자.
어느 시인이 말했다. 요즘 시가 왜 이리 어렵냐고. 40년 시를 쓴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어딘가 문제 있는 것이 아니냐고. 처음엔 그녀의 말에 슬쩍 위로받았다. 아마 그녀는 시는 이래야 한다는 자신만의 정의를 가지고 있는가 보다. 또 다른 시인은 말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그 시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점점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깊은 감동은 아니어도 한 번의 한숨이나 미소, 한 번의 끄덕임, 한순간 떠오르는 이미지, 아니면, 뭐라는 거야? 도 나름의 감상이니까.
안개 속처럼 뿌옇거나 길잃은 것처럼 어지럽거나 상징의 소재가 그 뜻과 너무 멀리 떨어져 애가 탄다. 때로는 온도가 다른 단어들의 조합으로 마음이 움찔 뒤로 물러서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이 독자에겐 걸림돌일지 몰라도 그 또한 시인의 선택이다. 그냥 그 정도로 열어 놓는 것이, 조금은 난해한 추상화가 시인에겐 더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다. 어떤 방식이든 써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숙명일 테니 그 간절함을 존중할 수 밖에.
시인만의 비밀 한 조각쯤은 적당히 감추고 싶을 수도 있다. 때론 문자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아니, 그냥 이모티콘 하나면 충분할 수도 있다. 내가 문자를 보낸 그 사람에게서 덜컥 전화가 오면 받기 싫을 때도 있으니까. 타인에게 열고 싶은 문틈의 크기가 다 다르니까.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을 자유도 작가에겐 있는 것이니.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넓이뛰기도, 스무고개처럼 답을 깊이 묻고 힌트만 주어도, 작가에겐 합법이다. 자유롭기 원하는자, 작가가 되어야 한다.
책을 접고 올려다본다. 이름이 금빛 참나무(Golden Oak Tree)인데 아직은 초록이다. 여름이 아침저녁으론 벌써 성큼 내뺐다. 이제 몇 주 후엔 잎들이 햇살 조명을 받아 금빛으로 찬란해질 테지. 참나무가 이름값을 하는 날 다시 와야겠다. 나무 아래 앉으면 어휘들이 마술처럼 빛으로 나와 시인의 스스러운 사이를 좁힐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시는 시로서 여전히 자유롭기를. 나를 따돌린 시인들을 다 용서하기로 한다.
주섬주섬 가방 안에 책을 넣고 일어선다. 침대에 갇히지 않으려면, 아침 산책 나온 사람들을 따라 나도 좀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