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by 모든 햇살

물망초 꽃씨를 살 거야. 내 말에 딸은, 또? 하더니 킥킥 웃었다. 하긴 나와 물망초의 씨름은 벌써 두 해 전에 시작되었다. 가족과 함께 빅토리아섬에 있는 정원에 갔을 때였다. 딸아이는 그 많은 화려한 꽃들을 마다하고 가장 앙증맞은 꽃에 넋을 잃었다. 파란 꽃잎 안쪽에 노란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잔잔한 물망초가 눈웃음을 쳤다. 나를 잊지 마세요, 꽃말이 떠오른 순간 얼른 꽃씨 한 봉지를 집었다.

기다리던 봄이 왔다. 물망초 씨앗을 심어놓고 깜빡했다.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잡초인줄 알고 뽑아 던졌다. 물망초는 가을에 파종해야 꽃이 실하다는 말을 듣고 가을을 기다렸다. 파종 후에 따스하게 잘 자라라고 큰 화분에 좋은 흙을 사다 담고 집 안에 보관했다. 마르지 않게 물도 자주 주었다. 구월에 작은 싹이 올라오더니 시월쯤엔 손가락만한 잎들로 자라났다. 꽃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마음이 들떴다. 마침내 두어 개의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할 때부터 이상하게도 기운이 쇠한 듯 보였다. 어느 날 부터인가 잎이 누렇게 변해버렸다. 너무 들여다보아서 질려버린 걸까?

가을 파종을 한다. 내한성이 강하다. 이런 특징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 겨울이다. 물망초는 추운 겨울을 나고 봄에 꽃을 피운다. 꽃눈의 분화를 돕기 위해 씨앗을 냉장고에 일정 기간 보관한 후에 심기도 한다. 씨앗을 속여 인위적으로 겨울을 나게 해주는 것이다. 나의 결정적 실수는 씨앗의 겨울을 빼앗은 것이다. 씨앗은 잠자는 상태인데 일정 기간의 추위는 씨앗의 잠을 깨우는 자명종이 된다. 겨울이 없는 물망초는 튼실한 꽃대도 없다. 작은 씨앗은 자기만의 고집, 그 고유의 성질을 포기하지 않는다.

열여섯 살 학생이 말했다. 이사 간 새 동네의 아이들은 모두 부잣집 아이들이라 유명 브랜드 옷을 입고 고급 차를 타서 자기는 기가 죽는다고. 그리고 그 애들은 자기를 친구로 끼워주지 않는다고. 그러자 듣고 있던 대학생이 조언을 했다. “나도 전교에서 몇 안 되는 동양인이었어. 혼자 노는 법을 배워봐. 난 러닝맨을 틀어놓고 신라면을 먹었지.” 많이 외로웠을 어린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코끝이 찡했다.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이 누리는 것은 부모님들이 이룬 것인데 그 애들의 부모님과 너 자신을 비교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결국 별로 부러워할 일이 아니야.” 의젓한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모든 것들이 인내와 배려가 없는 성인 아이를 만든다는 것을 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생각의 깊이가 자라는 일에도, 성품이 다져지는 데도 겨울이 필요하다. 어른이 되도록 누군가를 돕는 일에도 냉장이 필요하다. 얼른 달려가 일으켜주고 싶어도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조금 떨어져 지켜보아야 하는 약간의 냉정함 말이다.

앳된 얼굴이 늠름한 사나이가 되기까지, 진은 지금 겨울을 지나고 있다. 추위를 감출 수 없어 가끔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는다. 그래도 작년 가을, 처음 만났을 때의 불안한 표정보다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그간 목도리와 장갑, 그리고 외투를 마련한 모양이다. 앞으로 벽난로에 넣을 장작을 마련하고 근육도 키워가며 이 겨울을 잘 견뎌내길 바란다.

아침에 창을 여니 첫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으아리 잎 가장자리마다 은빛 보석가루가 반짝인다. 만만치 않은 계절, 겨울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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