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계절의 동백

by 모든 햇살

햇살을 틈틈이 모았나보다. 청록의 잎 사이로 꽃봉오리가 조금씩 몸을 부풀린다. 아직 바람의 손끝이 매서운 어느 날, 동백은 폭죽을 터뜨린다. 선홍의 꽃잎에 노란 꽃술로 멋을 낸 매혹적인 얼굴이다. 봄꽃들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동백꽃은 홀로 선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이마가 시려도 웃고만 있다. 비오는 날 처마 밑으로 불쑥 들어서는 낯선 사람처럼, 어느 날 걸려온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유 없이 궁금해지는 것처럼, 만남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온다. 무채색 세상 속에서 만남의 기쁨은 핏빛 꽃잎처럼 선명하다. 그 기쁨에 취한 이에게 두려움이란 없다. 처음에 동백은 나무에 핀다.

봄꽃들이 각자의 모양과 색깔로 피어나면 동백꽃은 색다른 공연을 펼친다. 아무도 예상치 않은 순간, 한창 고운 붉은 꽃을 ’툭‘ 땅 위로 떨쳐버린다. 떠나가는 사람처럼,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처럼 매정하다. 동백꽃이 지듯, 헤어짐은 만남보다 더욱 짧은 찰나, 시선과 시선, 호흡과 호흡의 사이에 일어난다.

현실이 아니라고 꽃은 완강히 부인한다. 어느 날 갑자기 유학 떠난 약혼자에게서 연락이 끊겼다던 그녀의 얼굴처럼, 꽃은 서럽게도 곱다. 동백이 이어진 숲길, 발치에 닿는 붉은 꽃들이 아직 내려놓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인양 차마 밟을 수 없어 비껴간다. 두 번째 동백은 땅 위에서 핀다.

사월의 한낮, 떠가는 구름을 따라 비석들이 줄지어 선 공동묘지로 향했다. 노란 수선화 꽃잎이 비석을 쓰다듬는 묘지를 지나, 멀찍이 커다란 동백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 아래엔 세 개의 낡은 돌비석이 있었다. 앞의 비석은 크고 뒤에 나란한 두 비석은 자그맣다. 무수한 동백이 꽃비로 내려, 세 개의 비석과 주위의 잔디를 붉게 덮고 있었다.

묘지에서 걸어 내려오는 길, 나는 줄곧 나무를 심은 이의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동백은 해마다 남은 이의 마음에 피는 선연한 그리움이다. 그 후로 오래도록 동백이 자꾸 피어올랐다. 세 번째 동백은 꽃을 본 사람의 마음에 핀다.

이월, 아직은 바람이 차다. 창밖을 내다보아도 풍경이 단조롭다. 긴 우기를 견딜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 계절에도 꽃을 보기 원한다면, 더불어 청록의 잎을 볼 수 있다면, 그 답은 단연 동백이다. 부지런히 화원으로 향했다. 제일 작은 아기 동백을 골랐다. 거실 창에서 내다보이는 자리에 심어놓고 자꾸 내다본다. 해마다 세 번의 개화를 지나다 보면 또 다시 이월이 올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자가 피할 수 없는 동백의 피고 짐 그리고 긴 그리움 속으로, 나는 기꺼이 동백의 포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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