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향긋한 냄새가 났다. 식탁 위 화병에 가득한 연보라 라일락이 집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웃집에서 가지치기를 했다며 한아름 안고 왔단다. 가끔 짤막한 안부를 묻거나 그 집 잉어들이 잘 있는지 들여다보는 일 외엔 별 사귐이 없었다. 그러나 라일락이 배달된 후 그 집이 시야에 들어올 때면 늘 코끝에서 라일락 향기가 피어나는 것이다.
교생실습 중이던 대학 졸업반 때였다. 스승의 날 아침,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다 교탁 위에 놓인 꽃꽂이를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이름하여 ‘채소 모둠’ 꽃꽂이였다. 학생들 나름대로 엄한 담임 선생님의 마음을 어떻게 녹일 수 있을까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당근, 가지, 오이. 온갖 채소가 커다란 수반 속 침봉 위에 꽂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한쪽 팔이 90도 각도로 꺾인 대파가 압권이었다. 어떠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칭찬해주었지만 아이들의 눈망울은 어쩐지 불안했다.
드디어 앞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굳은 얼굴로 교단에 섰다. 실장이 선생님의 선물을 들고 나가는 순간이었다. 야채 꽃꽂이를 쳐다보던 선생님 한 마디 던지셨다. 먹는 걸로 뭐 하는 거야! 꼬리에 힘이 들어간 선생님의 말에 교실 천정부터 검정 물감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순간 나는 영화 The Sound of Music 속의 물에 빠진 가정교사가 되어 Love them! Love them all!을 소리 죽여 부르짖었으나, 이미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났다. 사태를 눈치 챘는지 선생님은 몇 마디 지시사항을 읽고는 서둘러 교실을 나갔다.
꽃은 그 아름다움으로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시가 되거나 닫혔던 마음을 여는 열쇠로 사용된다. 꽃이 주고받는 이들에게 기쁨이 된다면 그 아름다움이 배가되는 환희의 순간이 된다. 그러나 건네는 이와 받는 이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때 꽃을 건네는 일은 난제가 된다.
오래전 시골 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산들이 연두와 분홍으로 아롱질 무렵이었다. 어느 날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책상 앞에 섰을 때 진달래꽃 한 다발이 수줍게 웃으며 맞았다. 순간 건조한 교무실 공기가 분홍으로 물들었다. 누군가 아침 등굣길에 꺾어왔으리라 생각했다. 그날로부터 이틀이 멀다하고 꽃이 종류를 바꿔가며 등장했다. 진달래, 개나리를 비롯해서 은방울꽃이나 식물도감에서나 보았던 신기한 풀꽃도 있었다.
그제야 수업 중에 아이들에게 무심코 던진 말을 떠올렸다. 얘들아, 공들인 꽃꽂이 말고, 그냥 꺾어서 항아리에 툭 던져놓은 들꽃 참 예쁘지 않니? 초라한 뒷모습에 실망할 일도 없고 말이야. 그 말이 아이들 귓속에 쏙 박힌 모양이었다. 들꽃을 만날 때마다 철없는 담임교사가 생각났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꽃이 이어지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염려가 자랐다. 이러다 등굣길에 아이들 등 뒤에서 손 흔들어주는 그 동네 들꽃들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닐까?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심하다 결국 말을 바꾸기로 했다. 얘들아, 아무리 들꽃이 예뻐도 피어난 자리에 있을 때가 제일 아름답겠지? 문제는 곧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 후 오래도록 그 들꽃들이 그리웠다. 학부형들이 화려한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 요구사항을 늘어놓거나 책갈피에서 돈 봉투가 툭 하고 떨어질 때 그랬다.
꽃을 받는 이의 마음이 열리지 않을 때나 건네는 이가 잘못을 무마하려는 값싼 시도로 꽃을 사용할 때 꽃은 한쪽의 일방적 도발로 취급된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된 말을 하고 그 대답을 요구하는 일이다. 불통으로 찌그러진 꽃잎은 딱하기 그지없다. 화병 대신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거나 꽃을 건넨 사람이 꽃다발로 몰매를 맞는 경우도 있으니, 이 경우 꽃이 고울수록 상황은 더 서글프다.
젊은 시절 꽃을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남편에게 은근히 골을 내곤 했다. 그러나 나를 소중히 여겨야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되었다. 나에게 꽃을 건네는 일은 안전하다. 용기를 내야할 이유도 없고 상대의 반응에 마음 쓸 일도 없다. 튤립에서 시작해서 늦가을 해바라기까지 때에 맞추어 피어나는 꽃들을 집 안으로 들인다. 해마다 등장하는 꽃들이지만 매번 바보처럼 그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미소, 호들갑, 감사, 그 이상이 늘 보장돼 있다. 내게 꽃을 건네는 일은 언제나 취향 저격, 백발백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