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얻으려면
의식주를 남에게 의존하면서 자유를 외치는 건 사기다
자식을 둔 부모라면, 사춘기에 든 자식과의 한판 결전은 불가피하다. 나의 경우 대입 진로 논쟁 때, 최고조였다.
반항기 가득한 첫째의 논조는 이거였다.
왜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서양처럼 자식이 자유롭게 의사 결정하게 놔두면 안 되냐...
이에 대해, 부모의 책임이니까, 경험이 많은 인생선 배니까 등등의 논리를 동원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꼰대’, ‘라떼’ 같은 퇴물 취급이었다.
섭섭함은 물론이고 배신감이 밀려왔다.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이 절감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갈등은 부모 자식 사이에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 같은 인생 홍역일까?
그렇게 공안(公案)을 안고 곰곰이 곰삭힌 끝에, 이건 ‘세대차이’라는 인류 보편적 갈등의 대리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성이 결여되어있었다. 각자의 치열한 인생 고찰에서 오는 갈등이라기보다, 자신의 단편적인 견해와 욕망을 세대차라는 보편적인 논리를 빌려 명분 싸움으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내가 먼저 변해야 하지 않던가.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실마리를 찾았다.
돌이켜보니, 저맘때 나도 기성세대를 꼰대로 취급했다. 내 사춘기의 절정은 대학시절이었다. 민주화 열풍에 휩싸여, 기성세대는 척결해야 할 구태였다. 그렇게 군 복무, 취업 재수, 취업, 결혼을 지나면서 기성세대로 바뀌어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떤 계기가 나를 가장 변하게 했을까?
나이가 들면서? 사회의 때가 묻어가면서?...
온갖 생각으로 어지럽게 난반사 충돌한 끝에 가라앉은 앙금은, 주식투자 실패였다. 정확히 말해 ‘실패’였다. 의식주를 모두 잃을 수 있겠구나, 아니 의식주는 잃을 수도 있는 것이구나 절감했다.
회사에서 돈 주고, 결혼해서 부모님이 전세 돈 빌려주고... 그동안 의식주는 마치 내게 저절로 따라오는 부속품으로 생각했었던 것이다. 책임과 자유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각성되었다.
난 고등학생인 첫째에게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너를 완전히 성인으로서 대우하겠다. 너의 생각을 완전히 존중한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
“의식주를 네가 스스로 해결해라. 그러면 너는 완전히 자유다.”
즉, 의식주를 의존하는 동안은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부모로서 권세를 부리려는 게 아니었다. 회사에서 월급 받으려면 상사의 말에 다라야 하고, 대한민국에서 살려면 국법을 따라야 하는 것과 같은 보편성의 연장이었다.
경제적 독립 요구에 녀석은 황당해했다. 진학을 해야 하는 고등학생으로서는 공부하랴, 나이 제한에 알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의식주를 남에게 의존하면서 자유를 외치는 건 사기다. 자본주의에서 책임이 없는 완전한 자유는 굶어 죽을 자유뿐이다. 책임은 안 지고 자유만 갖겠다는 요구는 부당하다.
내 말에 녀석은 침묵했지만,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녀석의 강렬한 자유 쟁취 여정이 시작되었다.
지방 국립대에 입학하면서 자취 학비, 월세, 생활비를 자기 손으로 벌겠다는 당찬 목표를 세웠다.
주말, 방학 알바를 꼼꼼하게 계획하여 돈벌이와 학업을 병행했다. 하늘이 감동했는지 소득분위에 해당되는 장학금을 받아 생활을 해결했다. 얼마나 구두쇠인지 마트 할인 시간을 다 꿰고, 할인 쿠폰을 활용하고, 음식점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생활인이 되었다.
내 용돈을 거절할 땐 섭섭하기도 했지만, 녀석의 자유 쟁취 의지가 대견했다. 다른 친구들은 방학 때 국내외 여행을 하는데 자기는 알바만 하니, 녀석의 꿈이 방학 때 여행이란 말에 내 마음이 쓰렸다. 코로나 때문에 이동제한이 걸려 그나마 위안이었다.
둘째도 따라서 주말에 아르바이트하여 자기 용돈을 버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난 효도를, 부모가 걱정하지 않게 자식이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선 돈이 ‘갑(甲)’이란 걸 체험했고, 경제적 독립을 시도하고 있다는 면에서 녀석은 효자에 한 발자국 가까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