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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문의 소원

‘난 정말 이기적인 놈이야!’

by 김영수


정말 둥글고 컸다. 슈퍼문, 슈퍼문 하더니 아름다웠다. 새벽 출근하면서 공사가 한창인 아파트 위로 둥실 걸린 보름달은 SF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이국적이기까지 했다. 둥근달을 보자 나는 습관적으로 소원을 빌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정말 이기적인 놈이야!’

달이 뜨면 달이 떴다고, 산길에 돌탑이 쌓였다면 쌓여있다고, 연못에 동전을 던지면 던지면서... 돈 안 든다고 이래저래 댓글 달듯 빈 소원을 모으면 책 10권은 될 듯하다. 그런데 돌아보니 하나같이 모두 나 잘되게 해 달라는 것 일색이었다. 가끔 아이 아픈 것 낫게 해 달라고,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소원이 있었지만 이것도 결국은 내가 편하려는 것이니, 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인 내가 잘돼야 곧 가정이 잘된다’ 뭐 이런 주의였다.

정말 오직 남을 위해 소원을 빈 적이 있었던가? 이번만은 진정 다른 사람을 위해 소원을 빌어보자 싶었다. 그리고 떠오른 사람은 바로 마누라! 25년을 같은 방에 살며 잊고 살았다니! 가장 이기적인 동물인 남자는 영원히 철들지 않는다는 말이 변명이 될까.

며칠 전 저녁을 준비하던 마누라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이었다. 밥을 짓던 전기밥솥에서 김이 빠지면서 증기기관차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혹시 폭발하나 싶어 코드를 뽑고 김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한소리 했다.


“그러게 뚜껑을 꽉 닫아야지. 그놈의 건망증...”


나는 질책성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내가 발끈했다.


“이 밥솥이 언제 산 건지 알기나 해요! 요즘 계속 밥이 설익더니, 드디어 망가진 거라고요.”


언제? 가만히 생각하니 2002년 월드컵 열리던 해, 사내 체육대회에서 경품으로 받았던 것이었다.

우리 집 가전제품은 모두 고령이다. 신혼 때 마련했던 덜덜이 냉장고는 최근에야 바꾸었고, 같이 산 전자레인지는 버튼이 되다 안 되다 하지만 지금도 투덜거리며 꾸역꾸역 쓰고 있다. 세탁기는 통이 돌지가 않아 4년 전 바꾸었고, 절반이 멈춘 김치냉장고는 할인에 할인을 거듭해 김장철이 지난 재고를 들여놓았고, 신혼 TV는 몇 개월 전에 브라운관이 ‘퍽’하면서 먹통이 돼서 인터넷에서 컴퓨터 모니터만 한 액정으로 구매했다. 우리 집에 들어온 가전제품들은 적어도 20년은 노역을 해야 했다.

밥통을 살피던 마누라가 인터넷을 검색했다. 헐거워진 고무 패킹을 바꿔보고 그래도 문제 있으면 바꾸겠다는 거였다. 왠지 나는 찔끔했다. 나는 ‘돈 줄 테니, 당장 바꿔!’이렇게 큰소리 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망가져 가는 건 가전제품뿐만이 아니었다. 아내도 여기저기 고질병으로 약봉지가 끊이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게 내 탓일지 모른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가전제품처럼 마누라도 내게 노역을 한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슈퍼문을 바라보며 마누라를 위한 소원을 빌어보자 생각했다. 건강하게 그리고 원하던 교습소를 차려 잘 되게 해주십사 하고. 아이들 놀이방이나 초등학생 영어 강사만 20여 년 했는데, 이젠 나이가 들었다고 학원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었다.

달님, 철없는 남자의 소원을 한번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6개월 뒤 우연한 기회로 마누라는 정말 영어교습소를 차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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