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영 반장의 첫 집
택지지구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 완공을 앞둔 무렵이었다. 조경 작업이 한창이었고, 가설 담장에는 붉은색 글씨로 쓴 ‘외부인 출입 금지’ 경고문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나는 분양받은 동의 29층 옥상에 올랐다. 입주민으로서는 내가 첫발임이 분명했다. 짙게 드리웠던 아침 안개가 바람에 걷히면서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산 정상에서나 맛볼 수 있는 바로 그 광경이었다. 마치 에베레스트 정상인 양 기념 셀카를 찍었다. 뿌듯했다. 2년 전, 입사 면접을 보던 날이 가을 하늘에 몽실몽실 떠올랐다.
당시 건설사 채용 담당자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못 미더운 눈초리로 내게 물었다. 직영 반장 자리는 관리직이 아니라 직접 삽질하고 빗자루도 잡고, 필요하면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는데 괜찮겠냐는 것. 직영 반장 일이란 자재관리, 용역관리는 기본이고, 민원이나 폭우 등 돌발 상황에 대처해하고 협력업체들이 빠뜨리거나 미비한 모든 공정에 관여하기 때문에 군대로 치면 상사와 같아서, 이른바 '노가다'에 잔뼈가 굵은 노련한 경력자에게 적합한 직함이다. 그런데 축산학과 출신의 내 경력은 건축과는 거리가 멀었다. 면접관은 나를 이전 직영 반장처럼 얼마 못 버티리라 예단하고 있었다. 무슨 배짱에서인지 난 신병처럼 씩씩하게 답했다.
“내 집 짓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력서에서 등장하는 흔한 겉치레 포부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내가 분양받은 바로 그 아파트 현장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내 아파트를 내 손으로 짓는다! 이보다 더한 동기가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근로계약서를 썼다. 계란이 자글자글 익을 정도로 달궈진 삼복더위 상판에 물을 뿌려가며 작업했다. 토요일, 공휴일까지 쉬지 않고 작업했기에 퇴근하면 초저녁에 곯아떨어질 만큼 고된 일과였다.
그렇게 인부들의 땀방울로 비벼서 쌓은 콘크리트 아파트가 옥상 덮개를 완성했다. 정말 얼마 만의 성취감이던가! 모내기 끝낸 농민들이 들이키는 막걸리 한 사발이 요 맛일 게다. 남들은 정년퇴직을 바라볼 나이에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땀 흘린 대가였다. 단풍을 머금은 노란 바람이 옥상 위에 내 뺨을 스쳤다. 문득 이런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무소유 행복? 정말 그럴까?’
예전에 다음 이야기를 듣고 돈오돈수한 것처럼 무릎을 탁 친 적이 있었다. 어느 노부부가 이국의 해변으로 여행을 떠났다. 어려운 공부 하느라고 청춘을 다 바치고, 결혼해서 애들 뒷바라지하다 보니 중년이 되었고, 직장 아래위 눈치 살피니 어느덧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린 정년퇴임을 맞았다. 노부부는 처음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떠났다. 황금빛 모래 위를 갈매기가 선회하는 한가한 어촌. 그곳에서는 늙은 어부가 자기만큼이나 낡은 고깃배 옆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노부부가 어부에게 숨 가쁘게 살아온 지난날을 털어놓으며 여유 넘치는 이곳이 바로 행복의 천국이라고 감격해했다. 이에 늙은 어부가 반응했다.
“왜 그렇게 멀리 돌아왔소? 처음부터 직접 여기로 오시지.”
어부의 일갈에 나는 촌철살인의 희열을 맛보았다. 행복에 지름길이 있다니! 하지만 지금과 생각해보니 경솔했다 싶다. 뙤약볕에서 일하는 어부는 여유를 즐기는 도회지 관광객이 오히려 부럽지 않았을까? 도시의 노부부가 처음부터 어부로 살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행복했을까?
나는 안빈낙도를 동경하며 살았다. 하지만 전세 보증금은 치솟고 아이들은 컸다. 구직 사이트를 뒤져봐도 50대 이상은 최저임금만 강요하고 있었다. 평균 수명이 80세인데, 앞으로 25년 이상을 뭘 먹고살란 말인가? 행복의 좌표를 다시 설정해야 했다. 도시의 노부부가 어촌 휴양지에서 행복했던 이유는 도시에서 치열한 경쟁에 신물이 나서 비로소 여유의 가치를 절감했기 때문일 게다. 결국 행복이란 불행을 절감한 자에게 돌아가는 보상이 아닐까.
파랑새 동화가 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헤맸지만 어디에서도 파랑새는 찾을 수 없었고, 지쳐 돌아와 보니 집안의 새장에 있더라는 이야기. 난 생각을 달리한다. 파랑새는 세상 밖에도 집안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교훈에 어깃장을 놓자는 게 아니다. ‘~에 있다’는 고정관념을 스스로 경계하고자 함이다. 안빈낙도의 보상은 무엇일까? 가진 사람은 비움에서, 없는 사람은 채움에서 행복의 낙차 에너지를 발전(發電) 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채움의 행복에 매료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