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그림자

by 사이

남자는 먼저 와 있었다. 남자 앞 물잔은 반쯤 비었고, 얼음은 거의 다 녹아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 놓인 물잔은 처음 따른 그대로였다. 표면의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레스토랑 안은 아직 저녁 손님으로 꽉 차지 않은 시간대였다. 창가 쪽 몇 테이블에서만 조용한 목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구 쪽에서 일정한 보폭의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여자가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눈이 한 번 마주쳤고, 여자는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가방을 옆에 내려놓는 동안, 남자는 메뉴를 접어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테이블 한가운데 작은 꽃병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아직 켜지지 않은 하얀 초가 하나 꽂혀있었다.

서빙 직원이 다가와 초에 불을 붙이고 가서는 곧 돌아와서, 와인 병을 보여주었다.

갈색 라벨에 얇게 언덕 그림이 인쇄된 병이었다.


“토스카나 레드 와인이고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입니다.”

직원이 병을 살짝 돌려 라벨을 보여주며 말했다.


“오늘 주문해 주신 샤토브리앙이랑, 손님들이 제일 많이 같이 드시는 와인이에요.”


남자는 라벨을 확인하는 시늉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이 잔에 천천히 떨어질 때, 둘 다 그 움직임만 내려다보았다.


“메뉴는 미리 주문해 놓으신 걸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한 템포 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굽기는 두 분 다 미디움. 맞으시죠?”


“네, 그렇게 주세요.”

남자가 짧게 대답했다.


직원이 물러가자, 테이블 위 흰 접시와 와인 잔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여자는 포크를 한번 들어 보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생일 노래가 작은 목소리로 들렸다.

짧은 촛불이 타는 냄새와 박수 소리가 잠깐 스쳐 지나갔다.

여자는 그쪽을 보지는 않고,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택시 한 대가 서 있다가, 승객을 내려주고 다시 움직였다.


“와인, 괜찮지?”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먹었던 건가?”


“아마도? 정확히 기억은 안 나서.”


“그래도 어떻게 잘 시켰네”


여자가 잔을 한 번 가볍게 흔들었다.

잔 안쪽에 얇은 선이 한 줄 남았다가 금방 사라졌다.


음식이 나왔다.

스테이크 접시에서 김이 얇게 올라왔다.

여자는 칼로 가운데를 잘라 굽기를 확인한 뒤, 별다른 말없이 제일 구석 조각 하나를 잘라 남자 쪽 접시 가장자리에 옮겨 주었다.

남자는 그 조각부터 집어 입에 넣었다.


“소스가 지난번보다 진한 느낌이네.”

“그런가?”

그 정도의 대화가 접시 사이로 오갔다.

와인 병은 어느새 절반이 비어 있었다. 남자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을 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남자는 잔을 든 채 시선만 내려 화면을 확인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진동을 끄고, 휴대폰을 조금 더 멀리 밀어 두었다.

두 번째 빵 바구니가 비워질 즈음, 직원이 작은 접시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작은 접시 위에 조각 케이크가 하나, 정중앙에 초가 꽂혀 있었다.

“제가 켤게요.”


남자가 의자에서 몸을 조금 일으켰다.

직원이 건네준 성냥을 그는 한 번에 켜지 못했다.

첫 불은 금방 꺼졌다. 두 번째 불이 초 끝에 겨우 붙었다.


여자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둔 채, 불빛을 바라봤다.

촛농이 열에 조금씩 녹아내렸다.


직원이 짧게 한마디 덧붙이고 자리를 떴다.

남자가 작게 축하의 말을 건넸지만,

‘축하’라는 단어는 금방 주변 소음에 섞여 사라졌다.


여자는 초를 불어서 끄는 대신 케이크의 모서리를 잘라 자신의 접시에 옮겼다.

작게 잘린 조각이라, 포크를 한 번만 움직이면 없어질 정도였다.


초는 천천히 줄어들었다.

촛농이 케이크 위로 떨어져 조용히 굳어갔다.

불꽃이 마지막으로 한 번 길게 흔들리더니, 소리 없이 꺼졌다.

테이블 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은 건 작은 케이크 부스러기와, 반쯤 비어 있는 와인 잔 두 개.

와인 잔의 테두리에 입술 자국이 반원처럼 남아 있었다.

서빙 직원이 빈접시를 치우는 동안, 두 사람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놓았다.

창가 바깥으로 간판 불빛이 한 번씩 흔들렸다.

초록, 붉은색, 다시 흰색.

유리창에 부딪힌 네모난 색들이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듯 옮겨 다니며 와인 잔과 접시를 얇게 스쳐 갔다.


“추워지려나.”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애들 방학 때 나온데? ”


“방학이 워낙 짧아서...”

남자가 들어 올린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딸은 이번에 고3 아니던가?”


“뒤늦게 미술 전공하겠다 그래서 정신없네.”


“바쁘겠네.”


“뭐.. 다들 바쁜 척은 하지.”


여자가 남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자, 안쪽의 자국이 아주 조금씩 내려앉았다.


“예전에 말이야.”

여자가 잔을 보면서 말을 꺼냈다.


“학교 앞 백반집 기억나? 환풍기 소리 시끄럽던 데.”


남자는 잠깐 생각하듯 눈을 깜빡였다.

“동아리에서 자주 갔던 덴가?”

여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냅킨 모서리를 한 번 접었다 펴고 나서야, 짧게 덧붙였다.


“그날, 비 왔었잖아.”


음식 냄새와 젖은 코트 냄새가 섞여 있던 좁은 테이블,

누군가가 남긴 말들,

그 이후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 나왔던 골목 입구가

남자의 머릿속에 잠깐 스쳤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그땐 다들, 시간이 많은 줄 알았지.”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어디로 가든, 나중에 또 만날 줄 알고.”


그 말에, 여자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웃음 같기도 하고, 피곤한 한숨 같기도 한 소리였다.


서빙 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접시를 치웠다.

계산서가 든 가죽 폴더가 테이블 위에 내려졌다.

남자는 폴더를 열어 카드를 넣고 닫았다.

“이제 갈까?”

여자가 말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의자를 밀었다.

테이블 위에는 식은 촛농이 굳은 케이크 접시와, 비워지지 않은 물잔 하나가 남아 있었다.


현관까지 이어지는 좁은 복도.

남자의 구두가 먼저 타닥거리고, 두 박자 정도 늦게 그녀의 굽 소리가 뒤따랐다.

벽에 걸린 흑백 사진 액자들이 그들 옆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문을 밀고 나오자, 바깥공기가 안쪽보다 조금 더 차가웠다.

편의점 간판, 맞은편 미용실의 흰 형광등, 코너를 도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등이

서로 다른 색으로 인도 위를 덮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신호등은 빨간색이었다.

길 건너 택시 정류장에 ‘빈 차’ 불이 켜진 차들이 몇 개 흩어져 있었다.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년엔... 어디서 만나게 될까.”


남자는 신호등 숫자가 줄어드는 걸 한 번 훑어보고 나서 대답했다.

“글쎄. 그때까지, 우리가 이런 거 계속하고 있을지.”


대답은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지만,

둘 중 누구도 웃지 않았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 사람들이 먼저 쏟아져 나갔다.

그때, 멀리서 택시 한 대가 미끄러져 다가왔다.


“여기서 타.”

남자가 손을 들어 택시를 세우며 말했다.


“이쪽이 빠를 거야.”


여자는 잠깐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멈춰서는 택시를 보았다.

“응. 그럼 갈게.”


예전 같으면, 누가 먼저 타라고 몇 번 더 밀고 당겼을지도 몰랐다.


문이 열리자, 택시 안의 따뜻한 공기가 잠깐 새어 나왔다.

여자가 먼저 몸을 숙여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 끈이 코트 소매에 한 번 걸렸다가 풀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남자가 짧게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


여자는 앞 좌석 머리받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택시 안 조명이 꺼졌다.


택시가 출발했다.


가로등 아래 바닥에 붙어 있던 두 그림자가 잠깐 한 덩어리처럼 겹쳐 있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게 늘어지며 천천히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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