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인 있다 :P
인 Phosphorous.
인이라는 물질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멕시코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 누구나 몸 안에 성냥갑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썰을 풀어요. 누구나 한 번쯤 타오르고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그러면서 성냥갑 마찰면에 묻은 인이라는 인화성 물질을 언급하지요.
처음 인이 발견된 것은 1669년 독일의 헤닝 브란트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연금술사로 은을 금으로 바꾸는 액체를 만들려고 공기를 차단하고 소변을 가열정제하다가 왁스형태의 물질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금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독특한 빛이 나는 물질이었습니다.
물질의 이름은 인 Phosphorous.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모두 phosphorus라고 불렸는데, 그리스어로 phos는 빛, phorus는 운반자를 뜻한다고 합니다. 원소기호로는 P. 한자어로도 '도깨비불 린'이라 하여 도깨비불처럼 빛나는 것을 뜻했습니다. 빛이 날 때 인은 화학적으로 들뜬상태라고 합니다.
성인은 체중의 약 1%에 해당하는 양의 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냥갑 같은 형태는 아니고 대부분 뼈와 이 속에 있습니다. DNA에도 인이 있습니다. 생명에 요긴한 물질이라 올더스 헉슬리의 책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체로부터 꼭 회수하는 물질이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비료에도 있고 살충제에도 있고, 심지어 저희 회사에서도 용접소재 원료로 씁니다.
산업현장에서 인은 낮은 온도에서도 불이 잘 붙는 물질이기에 요주의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그래서 다른 금속과 합금된 안정적 상태로만 사용하지요. 사람이하루 평균 섭취하고 배출하는 인이 1~3g 정도 된다는데. 그럼 우리도 위험물질 후보군일까요.
지구 반대편의 나라 작가가 쓴 책에 내가 회사에서 접하는 인에 대해 비중 있게 이야기하니까 신기했습니다. 언젠가 영화 승리호에서도 회사에서 만드는 용접봉 얘기가 스쳐 지나갑니다. 굉장히 반가웠지요. 배우 유해진이 우주선을 수리하면서 용접봉 사야 하는데 돈이 없어 못 산다고 푸념하던 장면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는 이 적은 일터 이야기가 대중적인 작품에 나오면 각인이 되더라고요. 일상의 확장. 적어두고 싶었어요.
책 <달콤 쌈싸름한 초콜릿>은 1900년대 초반 멕시코에 살았던 티타의 이야기입니다.
티타는 집안의 재능 있는 요리사입니다. 그녀의 요리는 사람들을 감동시켰거든요. 그녀가 머무는 집과 농장은 마마 엘레나라는 강력한 여자 어른에 의해 빈틈없이 부지런하게 돌아갑니다. 이 집에는 관리효율을 위해 지켜지는 전통이 있는데, 막내딸은 결혼하지 않고 엄마를 모셔야 했습니다. 티타가 태어난 후 아빠가 돌아가셨기에, 그녀는 빼박 막내딸입니다.
티타는 사랑하는 연인 페드로가 언니 로사우로와 결혼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아니 결혼식 케이크부터 파티 음식 전부를 준비합니다. 눈물의 결혼식 케이크였죠.
집안의 어른, 마마 엘레나는 페드로를 티타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고 싶죠. 티타를 제외한 가족을 지키려고, 페드로와 로사우로 가족을 미국으로 보냅니다. 페드로가 영어를 잘했대요. 문제는 로사우로가 아이를 잘 먹이지 못한다는 것. 그동안 티타가 알아서 애지중지 먹이고 키워왔었는데, 타지로 떠난 아이는 결국 못 먹어서 죽습니다.
티타는 찍소리 내지 못했던 비보를 전해 듣고 소리칩니다. 마마 엘레나에게 '당신이 아이를 죽였다'라고 소리치고 비둘기장 높은 곳에 올라가 미쳐버립니다. 마마 엘레나는 고소 공포증이 있거든요. 쨌든 반항은 처음이었죠.
피폐해진 티타에게 의사 존이 나타납니다. 존은 마마 엘레나로부터 티타를 데리고 그 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녀를 보듬어줍니다. 실성한 티타에게 말을 억지로 시키지도 않아요. 원치 않는 행동을 강요하지 않아요.
천천히, 그는,
몸속의 인화성 물질,
인(P)에 대해 얘기를 꺼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몸 안에도 인을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있어요. 그보다 더 한 것도 있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알려 드릴까요?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하고 성냥불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뜻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 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라우라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우리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존의 이야기가 너무 좋습니다. 어쩐지 마음속에 작은 벽난로를 켜두는 것 같은 말입니다.
다만, 제가 불꽃이나 빛이 되는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지는 않아요. 회사에서? 글쓰기에서? 거리가 좀 있어 보입니다. 집 안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 집에 엄마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더 환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사춘기 때에는 별 상관없었던 것도 같지만. 야튼. 집에서 벽난로가 되어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도 분명 가치 있는 일인데, 이왕이면 가정 밖에서도 빛나고 싶다는 아쉬움이 들어요. 파랑새는 항상 집 밖에 있을 것 같잖아요.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한데, 아직 그걸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 걸까요. 가족의 일원으로서 말고 무엇으로 빛날 수 있을까요. 상상해보고 싶은데 그림이 잘 안 그려집니다. 월요일 아침을 앞둔 일요일 밤이 되니 더욱 뭔가 그려보고 싶은데 잘 안됩니다.
티타는 책의 마지막에 화산처럼 타오릅니다.
일주일간 불꽃처럼 타올라 주변에 재를 가득 뿌리고 토양을 비옥하게 해 주죠. 판타지가 섞인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그래서 차가운 입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장 강렬한 불길이 꺼질 수 있으니까요. 그 결과는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입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답니다."
존은 양손으로 티타의 한쪽 손을 감싸며 간단히 덧붙였다.
"축축해진 성냥갑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이 있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라우라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차가운 입김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라니 출근하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 인을 지닌 이가 나뿐 아니라 더 많이 있음을 떠올려보면. 음. 그래서 빛날 수 있는 사람들이란 것을 떠올려보면. 조금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축축해진 성냥갑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이 있다니까. 안심하고 출근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