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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 후

어제 회식 후 오늘 동짓날에 쓰는 뻘글

by ㅈㅑㅇ



회식을 했다.


사무실 멤버 4명이서 닭갈비 집에 갔다. 밑간 한 닭고기를 연탄불에 구워 먹는 곳이었다. 맛있었다.


첫 잔을 부딪히며 "일 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마음속으로 일 년 동안 마음 쫄리며 납기 맞춰 생산하고 결제했다 싶었다. 회사살림 벌고 꾸리느라 부딪히고 언짢던 순간들, 어쨌든 굽이굽이 지나가는구나 하는 느낌들이 스쳐갔다. 물론 비단 이 한 해 동안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지만, 올해는 더욱 결제의 압박과 그로 인한 생산의 압박, 미래에 대한 고민에 '붙잡혀 있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런 고민들은 언제나 함께였는데 언제나 새삼스럽다.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15년 전에도 함께 일하는 분으로부터 '우리 이렇게는 힘들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일이 많을 땐 많아서, 적을 땐 적어서, 사람이 없을 땐 없어서, 많을 땐 많아서...


입 밖으로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로 갈무리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흔치 않은 귀한 시간. 회의도 흔치 않은 중소기업, 그래서 더 회식을 회의로 여기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무게를 덜고 마음을 가볍게 하니, 함께 일하는 상사와도 즐거웠다. 게다가 음식이 맛있었다. 맥주도 맛있었다.


그 윗분은 이 식당을 아주 자세히 알아봤었다고 한다. 자신의 미래를 위한 백업플랜으로 괜찮은 자영업을 준비해야 할 것만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가 시큰둥해서 실행하지 못했단다.


사무실 과장님은 일 년 넘게 퇴근 후 식당 아르바이트를 해왔다고 했다. 회식자리에 없는 현장 직원들도 공장이 한가할 때면 주말 알바를 종종 한다. 현장 과장님도 주말 알바를 고민해 봤다고 했다, 실행은 안 했지만.


다들 마흔을 넘긴 지 오래, 일부는 쉰을 넘겼다. 누구는 회사의 앞날이, 또 스스로의 앞날이 불안해서 그랬고, 누구는 집 안에서 사춘기 아이들과 부딪히느니 밖으로 나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뭐 하고 먹고살 것인가. 이건 회사를 다녀도 안 다녀도, 사업을 해도 안 해도,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고민인가. 나도 그런 생각해 봤다. 사장님이 연세가 지긋해져서도 이 자본으로 굳이 제조업을 하실까 하는데에 생각이 미치면서,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현재는 대출을 포함한 자본금으로 10명 정도 되는 공장 사람들이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한다. 모두 기혼이다. 만약 회사가 이것저것 상계하고 제조업 정리 후 남는 자본금을 금융업으로 운영한다면, 처참한 주식시장 평균 수익률로 생각해 볼 때, 사장님 한 가족의 생활비도 나올까 말까 하지 않을까. 별 생각을 다 해봤다.


불안한 미래. 그건 중소 제조업체의 숙명?


하긴 중소업체뿐일까 대기업도 맨날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중국의 wto가입 이후, 그러니까 내가 머리가 어느 정도 큰 이후로 회사 사장님들이 경기 좋다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언제나 힘들다고들 한다. 지나고 보면 그래도 그때가 나았다는 희미한 인식이 있긴 하지만 문제는 당시엔 모른다는 것. 다들 야간산행하듯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나 보다. 야간 산행 중 내가 든 등불이 약해지거나 어두워지는 경우, 앞사람 발걸음이 잘 보이지 않거나, 특히 선두에 대한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올 때 더 불안해지는 것도 같다.


설악산 야간산행을 다녀온 기억을 꺼내 본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들과 신사역인가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산에 많이 다녀본 사람을 따라서, 선두를 따라서 한 걸음 한걸음 내디뎠더니. 한낮의 산행보다 훨씬 수월했다. 앞사람만 잘 쫓아가면 됐다. 산행은 한겨울 새벽 4시에 시작됐는데, 해가 뜬 후 너무 놀랐다. 일출 후 걸어올라 간 길을 되짚어 다시 내려오는 내내 주변에 펼쳐지는 겨울 설악산 비선대, 천불동 풍광에 놀랐다. 내가 이 가파른 길을 두려움도 없이 지나왔단 말이야?! 하면서도 놀랐다. 믿을 수가 없었다.


때로 야간산행하듯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돌이켜보면 곡예 같은 길인데, 어쨌든 한 해 두 해 지나 수십 년을 왔다. 발 밑을 비추는 헤드랜턴 건전지는 충분할까. 선두는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를 선두에 세우면 어떡하지. 우리 혹시 제자리만 돌고 있나. 밤 산길에 곰을 만나면 어쩌지. 해가 뜨긴 하는 걸까. 이런저런 의문과 의심이 사슬을 잇는다. 그리고 그게 로프가 된다. 로프를 가이드 삼아 계속 길을 나아간다.


오늘은 일 년 중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다. 잡귀보다 마음속 잡념이 더 무서운 밤이다. 그래도 분명하고 안심이 되는 한 가지, 오늘 이후 밤은 다시 짧아진다. 해가 길어질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믿는다.


오늘 밤엔 길고 긴 잠을 푹 잤으면 좋겠다.


Unsplash - Nicolas C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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