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달래보는 불안
요즘 회사에 일이 없어요.
한가해 죽을 맛이에요. 현장 총책임자는 죽상입니다. 현장이 쉬는 날이 하루 이틀 생기면서, 내 이럴 줄 알았다며 개탄하고, 다음 주에는 뭐 할지 걱정하는 한탄이 하루의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회사일에 언제나 부정적인 상사분이라 그러려니 넘겼는데, 3월 중순이 넘어가자 저도 슬슬 걱정이 됩니다. 이대로 길어지면 현금 흐름에 지장이 있을 수 있겠다 싶어서요.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없을까요. 경기가 안 좋기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미덥지가 않아요. 제조업계 디폴트 값은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언제나 '경기가 안 좋다'였거든요. 찬찬히 우리가, 제가 처한 상황을 들여다봅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봅니다. 현.실.직.시.
저희 공장의 성수기는 본래 초봄까지 이어지는 겨울철이에요. 예전 같으면 한창 정신없이 바쁠 때인 거죠. 조용한 겨울이 어색하긴 합니다만, 우리 회사는 최근 2~3년간 내수를 거의 정리해 왔습니다. 내수 영업 관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오너의 성향입니다. 그러니까 조용한 겨울은 새로울 것 없어요.
내수를 정리한 지난 겨울에 뭘 했더라. 새로운 해외 거래처를 위한 제품을 한참 만들었네요. 결제가 원활하지 않아서 거래를 줄였습니다. 아하. 내수에 이어 결제조건이 별로인 수출 건이 줄었네요!
다른 공장에 생산을 맡기는 외부 주문 생산도 생겼습니다. 양은 미미하지만, 저희 현장에서 일감이 줄어들었다고 체감하는 원인 중 하나일 수 있겠습니다.
반면 원자재 값이 너무 올라가서, 결과적으로 매출이 줄지는 않아요. 오르지 않은 것이 없죠 요즘엔. 제품 가격의 95% 이상이 원자재 값과 연동되거든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래도 로빈슨 크루소처럼 이 현상을 차변보다는 대변에 적어봅니다. ‘매출이 늘었다.’
다행이다 싶은 일들을 더 찾아봅니다. 관.점.전.환.
현장 외국인 근로자의 상당수가 이슬람교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 한가해서 다행입니다. 3월 내내 낮에 금식하는 라마단이거든요. 일이 많고 더울 때 라마단이 겹치면 사람들이 상당히 힘들어했어요.
또 불행 중 다행으로 자금줄이 마르지 않았어요. 일 뿐 아니라 자금까지 마르면 정말 피가 마르겠지요. 아마 몇 달 전 추가 실행한 대출금 덕분이겠지만, 그래도 숨 쉴만합니다.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는 거죠.
중소 제조업체인 저희 회사의 업력은 이제 20년을 훌쩍 넘어갑니다. 저도 일한 지 20년 가까이 되어 가고요. 돌이켜보면 급여를 지급하기 힘들 때도 있었고, 지나치게 일이 많아서 힘들었던 때도 있었고, 억울한 세무조사로 기가 막히던 때도 있었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면 좋겠어요. 밀린 평일 업무도 보고 여행도 다녀오면 안되나요? 물론. 그 마음 가짐이 엄청난 고난도 삶의 기술이더라고요.
어린아이 마법 주문 같은 소리 같기도 해요. 실제 삶에선 어렵고 글 속에서나 쉬운 소리인지도 몰라요. 이왕이면 주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한 대로 될지어다. 아.브.라.카.타.브.라.
말이나 글뿐 아니고 실제 행동도 필요합니다.
네이버 스토어에 물건을 올려볼까요. 이베이는 옛날에 올려본 적 있어요. 보통 때에는 가지 않던 길이니까, 한가하니까, 한 번 알아봅니다. 매출 말고 다른 재미로의 길을 안내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회사 소개 자료를 만듭니다. 지인 통해 한 번 영업을 시도해 본다는 제안이 있었거든요. 한글 소개 ppt자료를 만듭니다. 바로 성과가 나타날 리 없어요. 큰 기대는 안 합니다만, 이런 시기에 조금씩 뿌려두는 거죠. 예전에 거래했던 곳, 밀린 대금이 쌓여서 연락 끊긴 곳, 오래된 바이어들, 이렇게 저렇게 이메일을 보냅니다.
바빠서 못했던 밀린 정리도 해요. 돈을 만지는 직원 책상 주변은, 회사의 돈이 오가는 곳이니까 말끔하게. 영업직원 책상 아래는, 이메일과 전화가 오가는 곳이니까 단정하게. 현장총책 책상 아래는, 잘 정돈된 원자재와 물건이 오가는 곳이니까 깨끗하게. 오늘도 먼지를 닦아냅니다. 마음 꼿꼿하도록 몸을 굽혀 청소합니다.
나의 길이, 우리의 길이, 굴곡 좀 있어도, 좋은 인연으로 가는 길이라 믿고 한 걸음씩 걸어갔으면 좋겠어요. 인생사 새옹지마. 길게 보면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만 한 일도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