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가 된 기분
아이가 핸드폰 없는 방학 캠프에 다녀왔습니다.
무려 3주짜리. 현대를 사는 초등 6학년에게 가능한 일일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카톡도 하며 짬짬이 포키 하고. 아이들이랑 말도 안 되는 문자 폭탄 주고받고. 유튜브 쇼츠로 멍 때리며 게임 영상도 봐야 하는데. 이 모든 걸 접고 방학 캠프가 가능할까 싶었지요. 아이에게 주어진 핸드폰 사용시간은 화, 목, 토 오후 6:30~6:40. 그나마도 충전이 안되어 있으면 사용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가능할까요?
가능하더이다.
일단 아이가 가겠다고 했어요. 민사고 방학 캠프였는데, 반 친구 중 누군가 여름에 다녀왔고 그게 꽤 재미있어 보였나 봅니다. 아님, 아이 스스로도 핸드폰과 게임으로부터 한 번쯤 떨어져 보고 싶었던 걸까요. 지금 막 든 생각이지만 너무 터무니없네요. 암튼 일체의 개인용 전자기기 및 인터넷과 단절된 채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도 살짝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영어로 수업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생존 영어는 가능한 아이이고,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무서워하지도 않지만. 다만 쓰기를 따로 해본 적이 없어서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만성 기침도 좀 있고, 피부도 건조한데, 추운 강원도 산골에서 엄마 없이 괜찮을까. 차라리 이 돈으로 4인 가족 남국 여행이 더 좋을까. 별별 걱정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캠프에 있는 동안 마음이 어찌나 평온하던지. 저도 제 마음에 놀랐습니다. 가슴에 있던 돌덩이가 하나 치워진 기분이었습니다. 혼자 멍 때리고 싶은 순간이 줄어서 카페를 덜 찾게 되었습니다. 어깨가 뭉치는 일보다 편안해서 마사지샵 검색도 하지 않게 되더군요. 글쓰기로 풀어야 할 마음의 응어리도 적어지더군요.
뇌 썩음을 겪지 않고 있을 아이의 두뇌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할 일을 내가 코치해주지 않아도 자기 몫의 과제를 하고 있을 테고. 아침에 일어나라 돌림노래를 하지 않아도 7시에 일어나 나보다 먼저 식사를 하고 있을 테고. 잔소리 미궁에서 탈출하여 하늘을 날고 있는 다이달로스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들로부터 도착한 레터에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매우 잘 어울리고, 심지어 인솔 선생님도 배려해 주고,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고 쓰여있었습니다. 절반만 믿어도 매우 훌륭한 상태. 저만 좋았다면 좀 미안할 뻔했지만, 아이도 아주 즐겁고 특별한 시간을 보낸 모양입니다. 다행입니다.
캠프 생활은 크게 민사고 주변 자연관찰 (Field Observation & Presentation), 뉴턴의 운동법칙과 응용 수업 보고서 작성 (Report Writing), 연극 대본 짜고 시연 (Story Telling), 그리고 주말 활동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자연관찰을 위해 거의 매일 민사고 내 숲으로 가서 딱따구리와 그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뉴턴의 운동법칙을 배우고 무동력 나무 자동차의 속도를 올리는 방법을 도출해, 자동차 경주를 했다네요. 아이 팀이 만든 자동차가 준결승까지 갔지만 최종 우승은 못했고, 너무너무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캠프 중에 위기도 있었습니다.
아이는 기숙사 공용전화로 연락을 해왔어요. 처음 3~4일은 이걸 모르고 조용히 있었는데, 나중에 공용전화를 알게 된 후 공중전화가 허용되는 매 식사시간, 그러니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내용은 오직 한 가지 보고 싶어 사랑해. 1주쯤 되었을 때에는 '좋은 경험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데려가달라'도 있었어요. 캠프가 좋긴 한데 집에 너무 오고 싶다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두 번 쓰던 영어 일기가 있는데,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혀있더라고요.
'오늘 집에 전화를 여러 번 했다. 엄마 아빠랑 같이 밥 먹고 놀고 싶다. 전화를 하는데 너무 많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좀 무서웠다. 나도 그들처럼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은 것일 뿐인데. 캠프 선생님도 좋고 친구들도 수업도 재미있지만, 가족과 비교할 수는 없다. (선생님 미안해요) 집에 가고 싶다. 근데 집이 너무 멀다.'
선생님의 코멘트가 인상적이에요. '너의 느낌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걸 견뎌내 봐. 나중에 분명 더 즐거울 거야, 이 과정을 전부 다 마친 너를 부모님이 바라볼 때.' 이 선생님 아이들을 많이 만나보셨나 봐요. 저는 전화에서 좋은 경험이고 아이가 엄청 성장해서 올 것 같다고 격려해 줬습니다. 지금은 여기가 그립지만 나중에는 거기가 그리워질 수 있다고. 또 어떤 도움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저찌, 아이의 위기는 지나갔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이는 건강해 보였습니다.
건강식으로 먹어서인지, 공기 좋은 곳에서 매일 산책해서인지, 규칙적인 생활 덕인지, 아이 피부는 오히려 좋아져서 왔습니다. 치킨, 과자, 음료수 거의 먹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저에게 그곳 식단표를 넌지시 내밀면서, 이렇게 해주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인도네시아 볶음밥 나시고랭과 중국식 마파두부가 한 끼에 제공되는 식단이더군요. 등짝 스매싱 날려줬습니다. 집에서는 한 끼에 반찬 하나죠.
아이는 집에 돌아온 날 거기에서 하던 것처럼 영어 일기를 썼어요.
'마침내 졸업하여 집에 왔는데,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엄마 아빠를 만난 것은 좋은데, 캠프에서 사귄 좋은 친구들, 수업, 선생님이 좀 그립다. 다음에 또 가고 싶다.'
그럼요. 여기 있으면 저기가, 저기 있으면 여기가 그리운 게 인생사죠.
그래서. 아이가 핸드폰을 졸업했느냐? 아니 최소한 좀 해드폰 사용이 줄었는가?
그럴 리가 있나요. 2년 가까이 군대 생활 후 제대한다고 그 규칙적인 생활 얼마나 가던가요.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빛의 속도로 기존 생활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과제 부분 빼고 노는 부분만요. 돌아온 날은 거의 하루 종일 아이들과 문자를 주고받고, 틈틈이 유튜브 쇼츠를 확인한 것 같습니다. 3주간 참았으니 인터넷을 만끽하도록 내버려 뒀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설 연휴가 되었습니다. 조부모님 댁에 가면 컴퓨터부터 켭니다. 온갖 게임 비슷한 것은 다 건드려 봅니다. 핸드폰은 주머니에 소중히 넣고 다닙니다. 짬짬이 확인해야죠. 티브이도 놓지 않아요. 밀린 수학문제집은 최소한으로 1쪽 할까 말까 합니다. 개념 코치를 해주려니 괜찮다고 극구 거절합니다. 이거 했니? 저거 할 거지? 일어나야지? 양치해야지? 오늘 저녁에 놀려면 부지런히 끝내는 게 좋겠구나! 등등 다시 시작됐습니다. 몇 번 하다가 그냥 관둡니다.
다이달로스인 줄 알았는데, 이카루스였나 봅니다.
잠깐 날다가 추락해서 바다에 빠진 이카루스요. 잔소리를 바닷속에 묻어둡니다. 그리고 카페에 나와서 이렇게 끄적입니다.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은 조금 산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