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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시라카와고

어정쩡한 딸들의 일본 나고야 여행 2일 차

by ㅈㅑㅇ


나고야 2일 차 금요일이 밝았습니다.


(친정엄마는 할머니, 저는 엄마, 딸은 딸로 지칭하기로 합니다.)


다행히 간 밤에 속 깊은 대화의 시도나 과도한 친밀감의 표시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숙소 내 온천에서 기분 좋게 씻고 푹 잤습니다. 온천 옆 우유 자판기에서 고소한 유리병 우유도 마셨더랬지요. 중소브랜드 아니고 메이지유업 제품이었어요. 유리병 우유를 자판기로 팔다니. 그 병을 회수하는 수거함도 있다니. 여긴 정말 일본이구나 했습니다.


오늘은 하얀 강의 마을을 보러 가는 날입니다.


시라카와고(백천향). 여행 커뮤니티마다 나고야 필수코스로 언급이 되더라고요. 눈이 많이 내리는 기후현의 깡시골입니다. 나고야의 북쪽, 높은 산들이 모여있어 일본의 알프스라고도 불린대요. 눈 많은 산악지역이 겨울철 나고야에 외국인들이 모이는 이유 중 하나라네요. 가는 길에 작은 소도시 다카야마를 들렀다가, 나고야로 저녁 6시경 되돌아오는 일정입니다.


일본 여행의 백미는 지방 중소도시에 있다고 생각해요. 100년, 200년 대를 이어온 가게들이 있는데, 촌스럽기보다 세련된 느낌을 주는 지방 중소도시요. 교토에서는 400년은 되어야 장인 명함을 내밀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날로그 중의 아날로그. 인구 8만 정도의 다카야마와 산속 시라카와고 방문 일정의 당일 여행을 신청한 이유입니다.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여행사의 당일치기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면, 그날 하루만큼은 제가 일정을 짜면서 일행들과 의견 조율하는 에너지는 물론 이것저것 신경 쓸 것도 줄어들잖아요. 여행에 드는 품과 부담을 더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덤으로 가이드로부터 주워듣는 이야기도 있죠.




아침 7시쯤 길을 나섰습니다. 걸어서 15~20분 거리의 미라이 방송타워 주변에서 관광버스로 8시에 출발하는 프로그램이었거든요. 이른 시간 부지런을 떨었더니 좀 뿌듯합니다. 양복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걸어갑니다. 가게 문을 열려고 준비 중인 듯한 아저씨가 쓰레기를 뒤지러 온 까마귀를 요란스럽게 내쫓으십니다. 날은 맑고 춥고, 하늘은 여전히 쨍합니다. 참 맑습니다.


아침은 든든하게 먹고 나왔는데 커피가 아쉬워요. 버스 출발 직전 차에서 내려 문을 연 카페를 찾아봅니다.


모퉁이에 있는 카페를 찾아 벌컥 문을 열었는데, 헛. 옛날 시골 다방 분위기. 각진 패브릭 소파에 정숙한 탁자. 패브릭 재질 때문인가 소리가 먹먹하게 들립니다. 멈칫한 순간 할머니 바리스타 한 분이 드립커피를 만들면서 '이럇샤이마세~'를 경쾌하게 외치시네요. 어디선가 앞치마를 두른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나셨어요. 양복 입은 아저씨 손님이 조용히 혼자 커피와 단팥잼, 도톰한 토스트를 드시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니. 여기서 30분만 있다가 갔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테이크 아웃은 안 되는 곳이었어요. 바리스타 할머님께서 친절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테이크아웃은 죄송하지만 안됩니다' 하셨어요. 일본어 무능력자인데 그 일본어는 분명했어요. 여행을 돌이켜보면 정말 일회용 컵에 커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어요. 어쩌다 보면 역시나 한국인이었죠. 그저 우연인지도 몰라요, 표본이 너무 적어서 잘 모르겠네요.


다시 버스탑승. 딸들 사이의 과도한 친밀감을 경계하는 한 사람으로서, 관광버스에서 할머니랑 붙어 앉아야 하면 어쩌지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먼저 따로 앉으셨고 딸은 엄마 옆에 붙어 앉았습니다. 할머니가 생각보다 독립적이네 싶었어요. 할머니는 편히 혼자 앉겠다 하셨지만, 다른 젊은 여자 여행객과 앉아야 했습니다. 큰 관광버스가 사람으로 가득 찰 정도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더라고요.



고속도로를 타고 교외로 나갑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다카야마.


다카야마 풍경


가이드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다카야마는 현재 인구 8만 정도의 도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인근 산악 지역의 벌목을 위해 개발한 도시라고 하더군요.


벌목공들이 머물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한 상업이 발달했고, 그래서 지역 상인들이 부유해졌지만. 엄격한 사농공상 신분 구분에 따라 상인들은 좋은 나무로 집을 짓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무슨 나무로 지었는지 모르도록 까만 옻칠을 했고, 그 거리가 지금의 다카야마 지역 풍경이 된 거라네요. 한 동안 버려졌기에 더 그대로 보존이 될 수 있었고, 돌아온 정착민들은 집 임대를 제한적으로 하는 등 건물을 지켜나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 되었고. 매일 오전, 아침부터 정오까지 지역 특산물을 파는 시장이 열립니다.



왼쪽은 다카야마 아침 시장에서 구매한 간식, 금방 다 먹어치웠습니다. 오른쪽은 술 가게, 잔술도 살 수 있고 그 잔은 가져갈 수 있다 했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어요.
된장국이 생각보다 진했습니다.
푸딩가게 진열장. 가게 안쪽에는 통유리를 통해 푸딩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아주 진지했어요. 다카야마에서 이것저것 많이 먹어봤습니다. 히다규 스시는 사진이 없네요..



다카야마의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까만 목조건물 거리. 간간이 날리는 눈발과 매서운 바람. 골목 수로마다 맑은 물이 졸졸 거리고. 마을 밖엔 조용히 흐르는 넓은 강. 도처에 산. 예스러운 마을을 배경으로 결혼사진을 찍는 일본 커플. 아침시장의 소란스러움. 좌판 위에 가지런히 전시된 사과. 북적거리는 관광객. 젊은 청년들이 팔던 여러 가지 맛의 부각과 강정. 푸딩가게 안 유리병 속 색색의 푸딩들.


유서 깊은 된장 가게가 있었어요. 시식용 된장국을 주는데 한국의 것과 맛이 매우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가이드 선생님이 여기서 된장을 구매하시더라고요. 일본 와서 살게 된 지 10년쯤 되었는데, 이제 일본사람들처럼 현관에 큰 지진이 있을 경우 꼭 필요한 대피물품을 비치해 놓고 산다고 하셨어요..


점심을 다카야마에서 해결합니다. 가까운 우동집에 들어갔습니다. 가이드 선생님이 추천해 준 가게들 중 하나였어요. 국물도 맛있고 면도 맛있습니다. 메뉴 이름은 소바인데, 아무리 봐도 우동입니다. 맛있긴 한데 반찬이 간절합니다. 김치 단무지는 없을 것 같고 매실장아찌 우메보시가 생각났죠. 다행히 판매하신대요. 조그만 한 접시에 100엔이었고, 할머니랑 엄마는 이 반찬 덕분에 더 잘 먹었습니다.


옛날 괘종시계를 걸어둔, 아날로그라고 대문자로 쓰여있는 듯한 카페들도 있었지만. 하루짜리 관광상품에 그런 여유는 없습니다. 없는 여유 쪼개서 소고기 초밥 '히다규 스시'를 줄 서서 먹었더니 시간이 많이 지났어요. 서둘러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딸이 성화입니다, 지금 부지런히 가야 시간 안에 도착한다고. 그래 딸은 시간 개념이 있구나, 아들과 다르구나, 먹고살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어요.




오늘의 하이라이트 시라카와고로 갑니다.


차는 산속으로 산속으로. 쌓인 눈이 점점 더 많아지고, 인적은 드물어지더니 강원도 산속 어딘가를 연상시키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에 관광객들이 어마어마합니다. 이 두메산골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니 싶어요. 어마어마한 사람들에 놀라고, 주차장 한편에 쌓인 어마어마한 눈에 또 놀랍니다. 사람 키를 훌쩍 넘어서도록 쌓여있네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보행자 전용 흔들 다리.


쇼가와 강 위로 위태로워 보이는 다리가 있는데, 그 위로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지만, 강원도 영월 동강의 어딘가가 떠오릅니다. 이를테면 단종 유배지 청령포 같은 곳. 산과 산 사이, 물을 건너 닿을 수 있는 곳, 인근에 사람 사는 곳 찾기 힘든 산골이요.


시라카와고 입구.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그림자.
시라카와고 눈. 처마 밑 고드름은 무시무시하게 큽니다.




마을이 새하얗습니다.


눈이 왕창 내려 계곡이며 산이며 다 덮어버렸어요. 올해 한국에 눈이 그렇게나 많이 내렸는데, 그런데도 눈에 놀라게 됩니다. 시라카와고 마을의 집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목조주택과 다르게 생겼습니다. 일본 보다는 디즈니 만화 모아나의 집과 닮았어요. 눈 쌓인 모아나의 집이랄까요.


두 손을 마주한 것 같은 지붕이라 합장, 갓쇼즈쿠리라고 불린다 합니다. 지붕의 주요 재질은 억새라고 들었어요. 워낙 물자가 귀한 오지라 주변의 억새를 엮어 만들었고, 못 없이 보와 기둥이 서로 꼭 맞도록 했다네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었고. 최근에는 공영방송을 통해 수리할 자원자를 모집해서 방송 다큐를 찍으며 지붕을 고쳤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 어쩌다 사람이 살게 되었을까요. 뭐 사실 이유가 있나요 그냥 어쩌다 살게 된 거겠죠. 또 북극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만. 가이드 선생님 얘기론, 겐페이 전쟁에서 패한 헤이시 후손이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합니다.


겐페이 전쟁. 1180년대 헤이안 시대 막을 내리는 겐시(원 씨)와 헤이시(평 씨) 간 전쟁으로, 헤이시가 패하고 대대적으로 숙청당했습니다. 그 숙청을 피해 헤이시 후손이 도망친 곳 중 하나라는 설이지요. 이 전쟁 이후 본격 무사의 시대가 열렸다지요. 시라카와고는 역사의 큰 바퀴에서 떨궈진 흙먼지 같은 곳일까요. 떨궈진 흙먼지에도 우주가 있네요..


산은 적막하고 강은 무심한데 높은 지붕마다 거대한 눈이 있습니다.


눈의 존재감이 사진으로 봤을 때와 다른 느낌입니다. 이건 꼭 김환기 화백이나 마크로스코의 작품을 실제로 대면했을 때의 충격입니다. 눈이 이렇게 거대할 수 있나. 사방이 하얀색이다 보니 동공도 확장되는 듯합니다.


거대한 눈을 이고 끼고, 키 큰 집들이 띄엄띄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서 있네요. 할머니, 엄마, 딸처럼요.



Unsplash - Hyungman Jeon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 잠이 든 딸이 춥지 않도록 창가 쪽에 외투를 대줍니다. 평소 딸들 간 과도한 친밀감을 경계하고 거리 두고 싶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친밀감은 마음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도 같습니다. 할머니도 저 쪽 의자에서 잠이 든 것 같습니다.


남쪽으로 가는 버스 안. 거대한 눈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버스의 왼쪽 창문에, 지는 해가 하늘을 물들입니다. 버스의 오른쪽 창문으로 보이는 들판은 이미 어둑어둑해요. 들판 위 집들에 불이 켜지는 것을 봅니다. 휴게소에 들러 다 함께 먹은 갓 구운 카레빵은 정말 맛있었어요.


아까의 불 켜진 집에도 친밀감이 적당히 깃들길.


사진 - 네이버 네일동 카페, 무짓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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