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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음 씨의 압도적 존재감

일상을 이어가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어디서 희미해지는가

by ㅈㅑㅇ



그분이 오셨습니다.

귀찮음이요.


게으르고 싶고, 빈둥거리고 싶어요.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온라인 원서 읽기 모임에서 매일 책 읽고 인증하는 것도 시들하고, 음식 해 먹는 것도 귀찮고, 정리는 더 귀찮고, 씻는 것도 심드렁, 그렇습니다. 한동안 그냥저냥 일상을 쌓아가면, 알아서 착착 인연이 엮이는 즐거움이 확실히 있었거든요. 그 즐거움이 시들해진 건 아닌데, 소소한 일상을 이어가는 힘이 떨어졌어요.


만사 피곤합니다. 그냥 누워있고 대충 어슬렁거리고 싶어요.


갑작스러운 귀찮음님의 방문에 저도 참 난감합니다. 피곤님이랑 같이 오셔서 더 곤란해요. 그 거대한 덩치들이 저희 집을 꽉 채우는 바람에 집 안에서 움직이기가 힘들어요. 사무실에선 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려앉아 제 눈과 귀를 가려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좋은 점이 잘 안 보여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면 '아 저 사람 또 저래'하며 고약하게 뒤틀린 마음이 됩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질병이 침범하듯, 일상을 유지하는 힘이 떨어지니 귀찮음이 왔습니다. 네. 그런 때가 찾아왔어요.


이런 때에는 어슬렁 산책이 상책입니다.


집이고 사무실이고 내버려 두고, 일단 밖으로 나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나뭇잎을 바라보며 마음을 비우거나,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러 긴 걸음을 하거나, 정처 없이 버스 타고 돌아다녀요. 집에 빨래가 쌓이고, 사무실에 서류가 쌓이고, 여기저기 눈치가 보이고, 정리되지 않은 질서 그러니까 무질서가 늘어납니다.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좀 들긴 합니다만. 이러면 어때.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지 머 하는 생각이 뱃속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와서 머리로 뻗칩니다. 짜증도 덤으로 쫓아오네요. 그렇게 됐습니다. 너무 오래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열심히(?) 딴짓 산책 중입니다.



이 와중에

엄지들과 읽고 떠든 책이 있어요.

아마 혼자였다면 초반에 덮었을 책..

거기서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루시 마네트의 초월적 일상이요.





루시 마네트가 살던 시대는 마차를 타고 멀리 이동할 때에는 강도에 유의해야 하고, 자칫 재판에 회부되면 성난 군중 앞에서 사형당하고, 잘린 목이 썩어 떨어질 때까지 거리에 꽂혀 있기도 한 시대로 묘사됩니다. 시체 도굴꾼도 들끓고 말이죠. 안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때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전후. 루시 마네트는 프랑스인 찰스 다네이와 결혼해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격동의 시대였지만 그들은 런던의 소호 거리에서 행복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찰스 다네이가 프랑스에서 혁명 직전 '샤를 에브레몽드 후작'이라는 본인의 귀족 신분 및 자산을 정리한 게 문제가 됐습니다. 귀족의 자산은 국가로 귀속되어야 했거든요. 그의 프랑스 생활 정리를 도왔던 가벨 씨가 뒤늦게 감옥에 갇혀 증언을 요청했고, 찰스는 혁명 중인 프랑스로 가족 몰래 돌아갑니다.


당연히. 찰스 다네이는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투옥됩니다. 귀족 출신에 해외 망명자는 당시 법령에 죄인. 루시는 온 가족, 루시의 아버지와 어린 딸과 함께 프랑스로 남편 찰스를 찾으러 갑니다. 그리고 피의 혁명이 한창인 그곳에서. 찰스가 언제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에서 목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던, 그 시간의 그곳에서. 그녀는 일상을 삽니다.




조용히 신의와 선함을 지키는 자들이 언제나 그러하듯 이 시련의 계절에 그녀는 더없이 도리에 충실했다.

그들이 새로운 거처에 자리를 잡고 아버지가 규칙적으로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남편이 그곳에 함께 있는 것처럼 소박한 살림살이를 꾸려갔다. 모든 것에는 정해진 장소와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마치 영국 집에 다 함께 모여 있는 것처럼 그녀는 어린 루시를 규칙적으로 가르쳤다.

그들이 조만간 다시 함께 하리라는 신념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며 사용한 소소한 장치들 -그의 의자와 책을 따로 챙겨놓는 등, 그의 신속한 귀가를 위해 준비해 둔 사소한 것들- 과 더불어,


p.484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시공사



루시는 찰스가 수감된 감옥 앞에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서 있습니다. 오후 3시에 혹시나 찰스가 볼 수 있을까 싶어서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에 가서 서 있죠. 그 와중에 루틴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루시가 일상을 지탱해 간 힘은 대체 뭘까요?


희망? 기도? 도리? 천성? 지금 저에게도 그런 내면의 힘이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저에게 지금 부족한 게 뭘까요. 뭐. 루시가 좀 보통 사람이 아닌 듯 하긴 해요. 아름답고, 헌신적이고, 차분합니다. 일상이 엉킨 요즘의 저에게 그녀의 루틴은 일상적이라기보다 초월적입니다.


루시뿐인가요. 책 속 영국인 로리도 아주 차분합니다. 텔슨 은행의 종신 직원 자비스 로리요. 책 맨 처음에 등장하는 그도 좀처럼 흥분하거나 게을러진다거나 하지 않아요. 어떻게 이렇게들 한결같죠?


저는 루시도 로리도 아니니까.

좀 널브러져 있어도 되겠죠?


귀찮음의 시간에,

부지런한 일상을 쌓아가는 힘을 생각해 봅니다.

인연을 엮어가는 즐거움을 떠올려 봅니다.


조금은 간절한 척.

대체로 무심한 척.





Unsplash - Erik Witose



여기까지 써두고 산책 나갔다 와서 다시 끄적입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 일상을 지탱하던 힘이 빠지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지요 :


화내고 싶은데 웃음 띤 얼굴로 네~ 하며 흘러야 하는 어떤 상황 이후 같아요. 휴... 내 마음에 반하는 말을 했고, 그런 상황이 앞으로 반복될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던 어느 시점. 예전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데, 그런 일이 십 년 이상 계속될 것이고, 무엇보다 제가 그 대상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인가 봅니다. 쓰다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아이코.


마음에 환멸과 미움이 싹터서 그런 거였나 봅니다. 작은 불편한 마음에 제 일상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있었네요. 당장 경로를 수정해야겠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상황에 매달리면 곤란하죠. 나와 나를 가치 있게 봐주는 이들에 대한 신의를 회복해야죠. 말은 그럴싸하네요. 사실 경로 수정이 가능하긴 한지 모르겠습니다 ㅎ.


어쨌든 문제인식.

산책과 글쓰기의 수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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