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현장스케치.
목사님 부부 초대 상차림, 들장미와 고사리 장식 + 바닐라 빠진 레이어케이크 + 닭고기젤리 등
엄지작가 5인의 유별나고 고상한 만찬
지난 5월 9일 밤, 서울 이수역 인근 공유주방에서 유별난 만찬이 열렸다. 장미가 그려진 찻잔에 따뜻한 꽃 차가 채워졌고, 딸기잼이 층층이 발린 레이어 케이크가 가운데 놓였다. 닭고기 젤리, 과일 타르트, 통밀빵 등이 함께 차려진 식탁은 장미와 고사리 닮은 풀로 장식됐다. 엄지작가 5인이 주최한 <빨강머리 앤>의 앨런 목사 부부 초대 식탁 재현 현장이다. 그 특별한 순간을 매거진 엄지살롱에서 다녀왔다. <편집자 주>
서울 이수역 뒷편. 평일 주택가 저녁. 조용한 골목길의 공유주방이 환하다. 식탁에는 케이크과 쿠키, 잼, 장미꽃 등이 한 상 근사하게 차려졌다. 식탁 주변으로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 앤의 식탁을 차리다
소리의 주인공은 30~40대 엄마들로 이뤄진 엄지작가 5인이다. 오늘은 각자 일터와 가정에서 퇴근 후 이 곳에 모였다. 2023년 1월부터 매달 고전문학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책의 한 장면을 직접 재현해보기로 했다. 식사 장면을 고른 것은, 일견 멀어 보이는 고전문학이 제일 가깝게 느껴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어야 사니까.
이들이 재현한 식탁에는 레이어 케이크, 닭고기 젤리, 각종 과일 타르트, 젤리, 직접 담근 살구잼과 황도 병조림, 소화불량에 대비한 호밀빵 등이 올랐다. 식탁의 출처는 루시 드 몽고메리의 1907년작 <빨강머리 앤 (Anne of Green Gables)>. 이야기는 캐나다 동쪽 끝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대자연에서 고아 출신의 앤이 희망과 낭만을 잃지 않고 초록 지붕 집에서 커가는 성장소설로 잘 알려졌다.
오늘의 식탁은 앤 이야기 속에서도 특별한 경우다. 손님 초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들 마을, 에이번리에 새로 부임한 교구목사 부부를 위한 자리이다. 마을 사람 모두가 한번씩은 이들을 초대한 상태. 마릴라의 자존심이 걸린 식탁에는 파운드케이크, 레이어케이크, 비스킷, 노란 자두 잼, 닭고기 젤리와 차가운 혀 요리, 젤리, 생크림, 과일 파이, 차, 과일절임 등이 차려졌다. 소화가 안 될 경우를 대비한 원래 먹던 빵까지 준비됐다.
목사님 부부 내외 2명, 초록 지붕집 식구 3명이 저걸 다 먹을 수 있나 싶다. 이에 대해 엄지작가 쓸 씨는 "우리네 제사상만큼이나 위상있는 손님을 위해 있는 음식 다 내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엄지작가들은 만찬을 준비하면서, 이미 앤이고 마릴라이고 또 앨런 부인이 되었다. 이 날 식탁 준비 현장에서는 밤 9시가 넘어가자 "앨런 목사님 오실 시간 다 됐다"며 앤과 마릴라에 빙의한 엄지 작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 앤과 마릴라가 다섯 명
음식은 5명이 나눠서 준비했다. 끓이고 식혀야 하는 닭고기 젤리는 쓸 작가, 오븐에 굽는 레이어 케이크와 파운드 케이크는 비건 베이킹을 하는 설희 작가, 노란 잼과 젤리, 통밀빵은 쟝 작가, 과일 파이와 꽃차는 지아 작가, 케이크에 바를 딸기쨈과 생크림은 모임을 주도한 나리 작가가 맡았다.
책 속에서 식탁을 장식한 들장미는 설희 작가 부군이 전날 남대문 시장에서 공수한 장미꽃으로 대체했다. 들장미와 함께 놓았다는 고사리는 쓸 작가가 당일 관악산에서 캐온 고사리아재비로 대신했다. 금방 시드는 고사리아재비 특성상 모임 직전에 캐야만 했다고 한다. 흙 묻은 풀은 금새 깨끗해졌고, 만찬이 마무리 되는 10시에는 시들해졌다.
본격 요리 시간. 닭고기 젤리는 낯선 음식이다. 닭을 야채와 함께 끓여 젤라틴을 넣고 식히는 것으로 요리법은 간단했다. 다만 오늘의 식탁을 위해 주말에 쓸 작가는 미리 연습 했다.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느낌이 아니라 무언가 다가오는 느낌, 오랜만에 느껴봤다"는 그녀의 말이 새삼스러웠다. 그녀 뿐이 아니다. 엄지작가들의 열과 성의가 예사롭지 않다.
지아 작가는 장미의 가시를 정리하다가 수시로 찔리면서도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나리 작가는 평생 해본 적 없는 크림 만들기에 멘탈이 붕괴되기 직전이었지만 끝까지 해냈다. 레이어 케이크를 담당한 설희 작가가 베이킹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고 긴장되어 보였다. 설희 작가와 쟝 작가는 해외여행 가는 것 처럼 커다란 여행가방을 챙겨왔다.
설희 작가는 "여행가방 들고 지하철을 두 번 환승해서 오는 길이 쉽진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그러나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떨렸고 설레고 재미있다"며 웃었다. 그녀의 바퀴달린 여행 가방에는 체, 틀, 볼, 계란 대체제, 쌀가루 등 베이킹 도구와 재료가 가득 들어있었다. 쟝 작가는 "가방에 두 종류 잼과 과일절임이 들어있어 좀 무겁긴 했다"면서도 "앤과 마릴라의 식탁으로 여행 온 기분"이라고 했다.
* 맛있는 이야기를 경험하다
만찬의 하이라이트는 레이어 케이크다. 책 속에서 당시 코감기에 걸린 앤은 중대 실수를 한다. 레이어 케이크에 바닐라액 대신 진통제를 넣었다. 약의 냄새가 하도 고약해서, 마릴라 말에 따르면 '사람이 먹을 것이 못되는 맛'이었다. 감정 증폭기 수준의 앤은 이 실수로 오열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 마음씨 좋은 앨런 부인과 오히려 더 친밀해진다.
이 날의 레이어 케이크에도 바닐라 액이 빠졌다. 실수였다. 차마 진통제를 넣을 수는 없어서, 바닐라 액을 챙겨왔지만 막상 시트를 만들 때에는 깜빡한 것. 실수에도 웃음이 난다. 제대로 앤이 되었다. 누군로부터 "이 많은 음식을 앤과 마릴라가 다 준비했을 상상을 하니 정말 엄청나다"는 말이 나왔다. 고전문학 속 인물의 부지런한 성품과 일상적인 고된 노동, 그래도 풍족한 캐나다 시골풍경이 손에 잡히는 듯 했다.
드디어 준비를 마치고 앉아서 만찬을 나누는 시간. 저녁 7시부터 준비한 식탁이 9시가 조금 넘어 완성됐다. 꽤 근사했다. 엄지작가의 케이크는 다행히 달콤했다. 파운드케이크는 말랑말랑했고, 닭고기 젤리도 상상을 뛰어넘는 괜찮은 맛이었다. 맛있는 치킨 스튜의 맛에 가까웠다. 따뜻한 차, 묵직한 호밀빵과 함께 먹으니 앨런 부인이 되어 든든한 한 끼를 대접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은은한 조명과 만찬을 준비한 시간의 마법에 그 곳은 더 이상 21세기 한국이 아니었다. 1900년대 초반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섬, 마을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 부부의 방문을 기다리는 초록지붕집 식탁이었다. 그녀들이 곧 앤이고, 마릴라고 매튜며, 앨런 목사 부부였다. 책 속 인물이 되어 식사 이야기를 체험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엄지작가들이 만찬 이후 풀어낼 각자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이번 만찬을 글 또는 동영상, 팟캐스트 등으로 편집할 계획은 있지만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처음 일단 저질러본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공통의 자리에서 찾은 식사라는 키워드. 고전문학과 일상의 공통분모. 앞으로도 고전문학 속에서 식사장면을 찾아 직접 해볼 계획이라고 한다. 의미있는 재미를 찾아 그녀들의 여행은 계속된다.
천천히 진하게 함께 책을 경험합니다
미니 인터뷰/ 나리
"천천히 봐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엄지작가 모임을 기획한 나리 작가의 첫 말이다.
엄지작가는 천천히 원서읽는 온라인 독서모임, 브이클럽(V-club)에서 파생됐다. 클럽 운영자이기도 한 나리 작가는 "클럽은 천천히 읽고 단상을 톡으로 공유하는 구조"라며 "톡으로 흘려 보내기에 아까운 단상들이 참 많았다"고 운을 뗐다. 단상을 모아 책을 내면 어떨까 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엄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하듯이 쓴 글이라 엄지작가입니다. 거창하지 않죠. 엄지작가로 올초부터 고전문학 읽고 쓰기를 본격 시작했는데, 도대체 읽고 쓰기 안하고 다들 뭐하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즐거워하고 심취해있습니다. 쓰기의 힘이 생각보다 놀랍습니다."
현재 엄지작가는 나리 작가를 포함해 5명. 읽고 쓰기를 각자의 SNS계정에서 지속하고 있다. 출간작가는 아니지만 각자의 평범한 일상과 오래된 문학 이야기를 엮어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러다 고전문학 속에 있는 식사 장면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나리 작가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는 당시 학교의 척추에 불켜지는 식사 장면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며 "함께 책 읽고 쓰는 엄지작가들이 <고리오 영감> 속 먹는 얘기를 꺼낼 때 이거다 싶었다"고 식사 컨텐츠의 시작을 회상했다. 마침 엄지작가의 이 모임을 어떤 컨텐츠로 키워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책을 한 권 내더라도 의미와 흥행을 함께 잡고 싶어 고민이 많았던 때였다.
"쓸 작가님이 직접 요리하기를 강력하게 제안했다"며 "일단 한 번 해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그녀는 "요리는 역시 쉽진 않았지만, 만찬은 참 뿌듯하고 특별한 경험이 된다는 것을 체득했다"며 환하게 웃었다.
"고전 문학을 읽고, 쓰고, 요리하고, 나누며, 진하게 경험하는 책 이야기. 이것을 어떤 컨텐츠로 풀어갈까 고민이 됩니다. 유튜브, 팟캐스트, 웹진 등의 형태를 구상중이지만 일단은 만찬의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습니다."
동네 평상에 모여
함께 음식하는 것 같은 독서
미니 인터뷰 / 쓸
"식사는 중요합니다."
쓸 작가는 강력한 집밥주의자다. 고전문학 속 식사를 직접 요리해 보자고 처음 제안한 것도 그녀였다.
그는 "우리에게 고전문학의 텍스트가 생생해지려면 직접 해봐야 한다"며 이를 통해 "의미에 다가가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일성했다.
출판업계 근무경력이 있는 쓸 작가의 제안은 강력했다. 그녀의 제안은 번거롭지만 확실히 색달랐다. 그리고 실제 식탁을 차리면서 다른 엄지작가의 공감을 얻었다. 식사준비와 만찬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날 식탁에서 "직접 해보니 텍스트 사이사이의 것들이 보인다"며 "마릴라가 어떻게 이걸 다 준비했을까 싶고, 평소에 얼마나 쉬지 않고 일했을까 싶으면서, 그래도 참 먹을 것이 풍족한 집이었구나 싶다"고 말했다. 책이 더 촘촘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언제나 동네 평상에 모여 함께 음식하는 장면을 꿈꿔왔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의 골목 평상같은 장면을 좋아합니다. 그곳에서제철 간식을 나누어 먹고 식재료 다듬는 모습에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고전 속 식사장면을 함께 재현하는 것은 그 따뜻한 평상의 재현입니다."
평상에서 함께 다듬고 나눠먹는 것 같은 책. 그녀에게 이 날 그 시간은 살아있는 책이었다.
최근 아이들 책모임을 시작한 쓸 작가는 만찬자리에서 "함께 먹는 경험은 확실히 텍스트를 더 특별하게 한다"며 "아이들과의 모임에도 먹는 프로그램을 넣고 싶다"고 했다.
우리들의 평상은 계속 될 예정이다. 고전문학 속 식사장면을 찾아 또 직접 요리해볼 계획이다.
쓸 작가는 "요리, 책, 일상이 녹아든 에세이로, 글쓴이 뿐 아니라 읽는이에게도 힐링과 즐거움을 주고자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일단 시작은 했고, 이 경험을 어떤 형식으로 확장시킬지는 고민이 된다"며 동영상, 팟캐스트 등의 제작을 암시했다. 동영상이나 팟캐스트는 개인이 쓰는 글과는 달리 부수작업이 많이 필요해서 엄지작가들 사이에서도 논의중이다.
그는 고민을 한 마디로 마무리했다.
"어떻게든. 엄지니까 될 겁니다."